커다란 이권이 다른 사람에게 가 버렸으니 실세들의 입장은 난처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마책으로 민영화하기로 내놓은 4개의 국영기업 가운데 가장 좋은 회사를 우선적으로 골라잡을 수 있는 특혜(?)를 주어 곤경에서 벗어나는 편법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골라잡은 것이 재무상태가 그런 대로 좋고 발전전망도 있는 대한해운공사라는
대한해운공사의 민영화를 추진하기 위한 모든 법령상의 절차는 마련됐다. 문제는 당시로서는 거대한 규모인 대한해운공사의 정부소유 주식을 인수하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또다시 대한해운공사의 민영화 계획은 지지부진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해운공사는 1961년 1월 8일 주주총회를 열고 민영화가 이루어질 때까지는 정부의 감독을 받도록 하는 정관 개
1967년 1월 조선과장으로 승진한 박종규과장은 승진 턱으로 술자리를 마련하고 선배 과장들로부터 축하의 인사말을 들었다. 평소부터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것이며, 종업원들이 나서서 제대로 된 국민기업을 만들어 보자는 구상을 하고 있던 박종규 신임과장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즘 돌아가는 정국의 흐름으로 보아
연재/ 大韓海運公社의 40년(1) 한국해운신문은 이번호(1004호)부터 현대 한국해운의 모태인 대한해운공사의 40년 역사를 연재한다. 이글은 재단법인 한국해사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잃어버린 航跡'의 3편(민영 대한해운공사 1기)과 4편(민영 대한해운공사 2기)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明暗속의 대한해운공사 民營化□ 國營業體 運營에 따른 官療的 弊端 국책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