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호(한일상선 前회장, 수필가)

김문호
김문호

서여기인(書如其人), 글씨는 그것을 쓴 사람과 같다는 뜻이지요. 사람마다 외모며 성품이 다르듯 다른 사람의 글씨를 똑 같이 베껴 쓸 수는 없다는 의미도 되겠지요. 그래서 필적감정이라는 수사기법도 있는 것인지요.

옛 중국의 동진(東晋 317~420)이라는 나라에 왕희지(王羲之)라는 명필이 있었습니다. 서예를 숭상하는 한자문화권에서 서성(書聖)으로 추앙받는 대가였지요. 그에게 헌지(獻之)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또한 아버지에 버금갈 만한 필치였답니다.

하루는 아들이 ‘大’자를 큼직하게 써서 서대 위에 펼쳐놓았고, 우연히 그것을 본 아버지가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가로 긋는 첫 획은 무난했지만, 둘째 획 삐침과 셋째 획 파임의 간(間)과 격(隔)의 안배며 동정상응이 마땅찮았거든요. 붓을 들어 점 하나를 찍어서 자형을 잡으면서 ‘太’자로 바꿔 놨습니다.

아버지의 가필을 모르는 아들이 어머니에게 자랑했습니다. 자신의 솜씨가 아버지에 비해 손색이 있느냐고. 그러자 어머니가 아직 멀었다면서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래도 점 하나는 제대로 찍었다면서 말이지요. 후진들이 만들어낸 이야기 같습니다.

현존하는 왕희지의 필적으로 난정서(蘭亭敍)라는 것이 있습니다. 당시 우장군(右將軍)이라는 지방관 직책에 있던 그가 지금의 절강성 소흥현에 있는 난정이라는 정자에서 41명 시인묵객들의 시회(詩會)를 주관하고 회첩(會帖)을 만들면서 서문으로 쓴 것입니다. 글의 내용도 대단하지만, 그것보다는 행서체의 유려한 필적으로 더욱 유명한 걸작이지요. 324자의 문장 중에 20여 차례나 나오는 갈지(之)자의 형태와 취향을 저마다 달리하면서 변화의 묘를 이뤘거든요. 그러나 몇 군데 고쳐 쓴 곳도 있고 해서 개서를 시도했지만 초고에는 도저히 미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자신의 솜씨가 아닌 신의 조력이었다면서 자손 대대로 전수시켰답니다.

의당 그랬겠지요. 그때 그들은 춘삼월 신록의 계곡 물가에서 소위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잔치를 벌였거든요. 구불구불한 물길 양편에 둘러앉아서 시 한 수에 술 한 잔씩을 띄워 보내는 운치였지요. 그렇듯 화창한 날씨와 수려한 경치, 빛나는 인재들이 삼위일체로 취한 경지의 산품을 맨송맨송 총기로 재현할 수는 없었겠지요. 주력은 필력이라는 서예가들의 우스개도 그렇게 기인된 것일 런지요.

현장법사의 반야심경에 발문을 쓰는 등, 문장과 서예에도 일가견을 지닌 당 태종이 왕희지의 필적을 수집하면서 백미로 회자되는 난정서만은 얻지 못해 안달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왕희지의 7세손이 후사 없이 죽으면서 자신의 제자인 어느 스님에게 그것을 맡겼다는 풍문이었습니다. 칙령으로 스님을 불러들여서 수만금의 회유와 협박을 해 봐도 허사였습니다. 한사코 모른다는 스님의 일관이었거든요. 급기야 측근 신하들의 대책회의가 열리고 감찰어사 한 사람이 필생의 소임으로 뽑혔습니다. 평복으로 갈아입은 그가 수 천리 이사를 해서 신도를 가장하며 스님의 절을 오르내렸지요.

여러 해 공을 들이면서 친해졌을 때, 감찰어사는 황제가 마련해 준 왕희지의 진적 몇 점을 스님에게 내보이면서 자랑했습니다. 그것을 보고도 대수롭지 않다는 스님의 태도에 낌새를 눈치 챈 감찰어사가 소위 작업의 고삐를 다잡았지요. 스님께서 부처를 모시면서 그러듯, 자신은 둘 없는 천하의 걸작들을 지니면서 다른 원이 없다고 약을 올렸지요. 그러자 스님이 대들보의 구멍 속에서 서첩 한 권을 내려와서 내밀었습니다. 이걸 보고도 그러겠느냐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이번에는 서문 몇 쪽을 뒤적이던 감찰어사가 볼 것도 없는 위작이라면서 밀어놓았습니다. 천하 서성이 그것 몇 줄을 쓰면서 수정하는 붓질까지 했겠느냐면서 말이지요. 그러자 일체의 경계심을 푼 스님은 천하의 진품을 예사로이 간직했고요.

스님이 사나흘 여정으로 절을 비우면서 산문을 나선 잠시 후에 감찰어사가 절을 들어섰습니다. 주인이 출타중이라면서 상좌승이 막아서자, 일전에 두고 간 서책을 가지러 왔으며 올라오는 길에 뵙고 말씀드렸다면서 내실로 향했습니다. 스님의 행선이며 일정까지 꿰고 있는 그의 언행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겠지요.

진품을 접한 황제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인 우세남(虞世南)과 저수량(褚遂良), 자신의 총신 위징(魏徵) 세 사람에게 진위를 감별시켰습니다. 서성의 진적임이 확인되자, 앞의 두 서예가에 구양순(歐陽詢), 육간지(陸柬之)를 더한 대가들에게 붓 자국 하나 다르지 않은 필사를 엄명했지요. 그러면서 원본은 자신이 비장했다가 훗날에 눈을 감으면서 부장품으로 가져가버렸고요.

3백여 년을 전설로 내려오던 원조 걸작이 사라지면서 후세 서예가들의 필사본이 진적으로 둔갑했습니다. 그로부터 1400여 년, 시대마다 대가들의 필사가 거듭되면서 현존하는 왕희지 난정서가 5백여 종이라 합니다. 얼마만큼 서여기인의 참모습일 런지요. 그런데도 오늘의 서생들은 법첩(法帖)이라면서 베껴 쓰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적어도 천 번은 써 봐야 운필의 변죽이나마 더듬을 수 있다면서 말이지요. 하긴 서성의 생시에는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면서 바지가 뚫어지고, 벼루를 씻으면서 마당 앞 연못물이 검은 빛이었다더군요.

당 태종의 재위 23년을 중국 역사상 3대 치세의 으뜸으로 꼽는답니다. 그때 당나라는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 모든 면에서 최고의 성세면서 명실상부 세계제국이었으니까요. 한사코 직간하는 신하와 이를 포용한 황제의 통 큰 정치, 이른바 정관지치(貞觀之治)였습니다. 그럴 만도 했지요. 자신이 죽인 형의 책사로 있으면서 자신을 죽이라고 여러 번 상주했던 위징을 평생의 총신으로 기용했으니 말입니다.

하루는 이세민이 퇴청하면서 “제 놈이 황제요 내가 신하인 것 같다”면서 식식거렸습니다. 내일 등청하면 기필코 죽일 거라고 분을 삭이지 못했지요. 그러자, 대례복으로 갈아입은 황후가 그의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제야 폐하께서 그만한 신하를 얻으면서 명실상부 황제가 되었음에 소첩이 경하 드린다고.

열여덟 살 연장의 위징이 죽자, 이세민이 그를 기리면서 애도하는 비문을 썼습니다. 그런 얼마 후에 실록을 들춰보고는 자신이 쓴 비문을 깎아버리게 했습니다. 실록에는 자신이 형과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를 압박해서 태자 책봉을 받던, 소위 현무문(玄武門) 사건을 소상하게 담은 위징의 기록이 실려 있었거든요.

당 태종의 단 두 가지 실책은 고구려를 넘보다가 화병에 신병까지 얻어서 쉰한 살에 요절한 일과 자신의 실록을 들춰본 일이라 합니다. 유언으로까지 말리던 간신(諫臣) 위징이 죽자, 기다렸다는 듯이 저지른 황제의 독단이었지요. 그런데도 스승처럼 받들면서 친구처럼 격의 없는 신하라는 뜻의 ‘사우(師友)’는 당 태종 이래 치세의 정석으로 굳어졌습니다. 매사에는 허상의 그림자가 따르는 것인지요.

렌, 세상만물의 참모습이라는 것이 있기나 한 것입니까. 있어도 맨눈의 시각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그래서 심안이니 혜안이라는 말이 있는지요.

길지 않은 삶을 되돌아봐도 뭐가 뭔지 보이지 않습니다. 이대로 덤벙거리다가 끝나도 되는 거라고 마음을 눅여 봐도 석연치가 않습니다. 끊임없는 광음에 무슨 매듭 같은 것이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해를 넘기고 맞으면서 그대가 보고 싶습니다. 안개 짙은 광야에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내 작은 삶의 가난한 자유여, 고독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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