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 김종길
밥상머리

그때와는 세상이 많이도 바뀌었다.

그때는 식구들이 모두 밥상머리에 둘러앉았다. 안방이나 대청마루에 밥상을 차렸다. 한여름에는 마당에 덕석을 펴고 저녁상을 차렸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보름달이 떠있다. 처마 끝에 전깃불이 매달렸다. 마당 귀퉁이에 모깃불을 피웠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매캐한 모깃불 냄새가 마당을 꽉 메웠다. 뒤뜰 대숲에서 댓잎이 사각거렸다. 이름 모를 풀벌레들이 구슬프게 울었다.

자급자족의 밥상이었다. 할아버지가 머슴과 놉을 부려 쌀, 보리, 밀, 콩 농사를 지었다. 어머니가 남새밭에서 무, 배추, 파, 고추 등 온갖 채소를 가꾸었다. 간장, 된장, 고추장, 식초도 어머니가 손수 만들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소반에 앉았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한 소반에, 어머니는 누나들과 둥근 교자상에 둘러앉았다. 밥상 세 개에 식구들이 모두 모였다. 할아버지가 기침을 하고는 숟가락을 들면 그제야 식구들이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밥상이 훈훈했다.

밥상머리에 집 나간 식구들도 함께했다. 시집간 큰누나, 일본으로 간 큰형, 태평양전쟁에 지원병으로 끌려간 작은형도.

할머니는 그들이 무엇을 먹는지, 몸은 아프지 않는지 걱정했다. 어머니는 말은 않지만 작은형이 전쟁터에서 몸을 상하지 않았는지 마음을 졸였다. 그리움과 걱정으로 밥상머리가 순간 울적했다.

할아버지는 철없이 밥을 먹는 막내손자 나를 빙그레 내려다보았다. 야단치지 않고 다독거렸다. 고사리 손가락에 젓가락질을 가르쳐주었다. 가지나물을 먹지 않으면 “반찬을 골고루 먹어야지. 그래야 몸이 튼튼하단다”라 했다.

농사꾼이 곡식 한 톨을 짓기 위해 뙤약볕에서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는지 알려줬다. 밥그릇에 숭늉을 부었다. 밥알 한 톨도 남기지 않았다. 몸에 배인 할아버지의 근면과 절약을 밥상머리에서 배웠다. 할아버지의 생활습관이 내 인생의 뿌리가 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깊은 자애, 아버지의 냉엄한 훈계, 옹달샘처럼 마를 줄 모르는 어머니의 사랑, 형 누나들의 살가운 정, 이 모두 밥상머리에서 우러났다.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가족을 하나로 묶었다. 나는 그렇게 자랐다. 그때가 눈물겹도록 그립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밥상머리는 차차 멀어져갔다. 형 누나들은 제 갈 길로 갔다. 작은형은 동부 뉴기니 전선에서 전사했다.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나마저 집을 떠났다. 아버지, 어머니도 고향을 떠났다. 가족은 뿔뿔이 헤어졌다. 가정은 해체됐다. 밥상머리도 사라졌다.

내가 새 가정을 꾸렸다. 딸 하나, 아들 하나의 핵가족이었다. ADB차관으로 건설한 아파트에 둥지를 틀었다. 1/10의 경쟁을 뚫고 당첨됐다. 아파트가 대중화되기 전이었다. 사람들이 아파트 생활을 부러워했다. 나도 만족했다.

단지가 젊은 엘리트 집단촌이 됐다. 초등학교가 설립되고 이어 중학교가 들어섰다. 명문교로 부상됐다. 아이들은 치열한 경쟁으로 내몰렸다. 엄마는 ‘공부! 공부!’ 하며 다그쳤다. 애가 1등을 하면 성적표를 뽐내며 내밀었다. 2등으로 밀리면 방문을 닫아걸고 책상에 엎드려 분을 삭였다.

아빠는 아침 일찍 출근해 밤늦게 돌아왔다. 주말에도 출근해야 했다. 더욱이 지방근무나 외국에 나가면 몇 달, 몇 년을 가족과 떨어져 살았다. 애들은 밥상머리를 모르고 잘았다.

나는 祖父孫 삼대가 함께 살았다. 대가족이었다. 부딪히고 칭찬받고 야단맞았다. 울고 웃으며 나누어 먹었다. 봄에는 잔디밭에 누워 종달새 지저귀는 소리를 들었다. 여름엔 시냇물에서 홀랑 벗고 미역을 감았다. 돌을 뒤엎어 가재를 잡았다. 가을엔 논두렁에서 콩서리를 했다. 얼굴이 깜둥이가 됐다. 그 추억들이 잊히질 않는다.

내 아이들은 콘크리트 숲에서 자랐다. 각박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아야 했다. 자연이래야 멀리 보이는 산뿐이었다. 공해로 하늘은 찌푸렸다. 명문학교를 나와 그들도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고향도 집안 내력도 사촌 얼굴도 모른다. 그들의 정서가 온전할까? 세상은 점점 팍팍해져 가는데……, 미술과 음악을 한다고 정서가 순화될까?

누군가가 아침밥 한 끼만이라도 꼭 가족과 먹겠다고 했다. 그런다고 그 옛날의 밥상머리가 되돌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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