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새해맞이 콘서트

▲ 耕海 김종길
TV 리모컨을 눌렀다.

여자 바이올린 주자가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고 있었다.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이었다. 진홍색 드레스를 바닥까지 늘어뜨리고 바이올린을 자유자제로 켜는 자태가 현란했다.

집시풍의 애잔한 선율에 숨을 죽였다. 활대로 현을 애무하듯 살금살금 터치하다 불현듯 활대를 치켜세워 현을 내려쳤다. 불꽃이 튀듯 질주가 폭발적이었다. 테크닉이 섬세했다. 청중을 긴장과 무아경으로 몰아넣었다.

내가 이 곡을 처음 만난 건 고교 2학년 때였다. 같은 반 친구가 바이올린을 학교에 가져오는 날이면, 도시락을 일찌감치 먹어치우고는 교탁 주위로 책상과 걸상을 밀고 당겨 간이무대를 만들었다.

그가 무대에 섰다. 왼쪽 어깨에 바이올린을 올려 놓았다. 받침대에 턱을 붙이고는 왼손으로 줄베개를 붙잡았다. 오른손으로 바이올린 활대를 잔잔하게 그리고 긴박하게 움직였다. 몸과 마음이 바이올린과 하나 되어 흘러나오는 애절한 선율에 숨을 죽였다. 넋을 잃고 감상했다.

지고이네르바이젠이었다. 사라사테는 다섯 살에 바이올린을 시작해 여덟 살 때 첫 연주회를 했단다. 19세기를 대표하는 바이올린의 천재였다고 설명했다.

3학년이 되자 대학입시 계열별로 학급은 개편되면서 점심시간의 향연이 끝났다. 아쉬웠다. 그 뒤, 대학입시에 매달려 서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졸업하고는 대학으로, 사회로 뿔뿔이 흩어졌다.

오랜 세월이 지났다. 그는 대학진학을 못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서 거리악사가 되었다는 애달픈 소식이 풍문에 들렸다. 그가 정처없이 떠도는 집시가 되고파서였을까? 가난해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恨이 얼마나 절절했을까?

명동의 주막에서 악사가 방으로 들어와 바이올린을 켜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지고이네르바이젠을 신청했다. 술에 거나하게 취하고, 애달픈 선율에도 취해 감상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수수했던 고고시절과 거리악사가 못 견디게 그리웠다. 명치끝이 저리도록.

뒤늦게야, 여자 바이올린이스터의 협연이 KBS의 <새해맞이 콘서트>임을 알았다. 베토벤의 웅장한 합창, 낭만적인 꽃의 왈츠, 경쾌한 행진곡이 이어졌다. 은발의 웨이브가 어깨 위로 흘러내린 지휘자의 열정이 무대를 꽉 채웠다.

KBS가 콘서트와 보신각타종을 동시중계 했다. 보신각 주위에 운집한 7만 군중이 영하 15도의 혹한을 뜨겁게 달구었다. 제야의 종소리가 군중의 열기를 온 누리로 실어날았다.

‘하느님, 죄송합니다’란 소리가 목에서 새어나왔다. 이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추위에 떨고 있는데 나는 따뜻한 방에서 음악을 즐겨도 될까? 내가 무엇이건대? 자책감이 들어 십자성호를 그었다.

세계인구 60억 중 10억이 굶주린다고 한다. 굶주림뿐이겠는가? 전쟁, 테러, 착취, 고문, 병마, 옥고에 신음한다. 죽어서 지옥이 아니다. 지구촌 곳곳이 살아서 지옥이다.

남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더욱이 휴전선 너머 수많은 동포들은 지옥보다 더 처참하게 살고 있다. 삶이 아닌 죽음의 행렬이다.

하느님, 북한 동포들도 하루속히 ‘새해맞이 큰잔치’에 함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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