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 耕海 김종길
아들 한결에게

 미국가톨릭철학계간지(American Catholic Philosophical Quarterly 90. 2016)에 네 논문이 게재되었더구나. ACPQ는 80년 전통을 가진 미국가톨릭학회 저널이라면서? 유수 철학저널에 게재된 것이 5회나 되네. 장하다.

강의하랴 논문 쓰랴 눈코 뜰 사이 없겠다. 남의 나라 말로 강의하고 논문 쓰기가 오죽이나 힘들까! 계속 우수강의로 평가도 받고. 자랑스럽다.

‘고독하고 고달픈 학문의 길이 아직도 아득한데 좌절하지 않도록 건강과 지혜를 주시옵소서’라고 이 아비는 매일 기도할 뿐이다. 철학서적 출간이 남아있네. 양서를 출간하여 중견 철학자 반열에 오르기를 기대한다.

아주 오래전에 내가 너에게 이런 말을 했다

‘배가 부산항을 출항해 태평양을 횡단하는데 큰 태풍이 온다고 회항할 수 없다. 오션루트를 청취하며 태풍의 진로를 피해 항행을 계속해야 한다. 그리고 항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수시 육분의(sextant)로 별들의 고도를 관측하여 그때 그때 침로를 변침(alter course)해야 목적항구에 정확하게 도착할 수 있다. 인생항해도 대양항해와 다를 바 없다. 철학항해도 그럴 것이고’

내가 지난 2월 26일 의미 있는 상을 받았다. 8순인데도 어린이처럼 마음이 들떴다. 전에 받았던 훈장이나 상과는 달리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다. 그 소회를 수상답사에 표현했다. 읽어보아라.

『해사문화상을 주신 한국해운물류학회 회장님과 회원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해운간행물이 희소했던 35년 전, 한국해운정보센터가 주2회 해운정보지를 발행했습니다. 그『해운정보』48호(1981년 10월 6일) ‘羅針盤’란에 ‘해운문화는 해운발전의 밑거름이다’란 제목의 글을 게재했습니다.
그 내용은 ‘선박과 항만시설 등 하드웨어 확충만으론 해운이 발전될 수 없다. 법률과 제도는 물론, 각종 연구소와 학술단체가 해운정보와 학술논문을 다양하게 공급할 수 있는 문화적 토대가 구축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해운문화란 용어가 생소할 때였습니다.

제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40년 전입니다. 노르웨이 해운아카데미에서 해운전문 과정을 수학할 때였습니다. 노르웨이 선주협회에 스태프진이 150여명 이었습니다. 그들이 세계 각국의 산업동향과 생산지수를 수집 분석하여 해운과 무역 전망을 예측했습니다. 해운아카데미는 다양한 커리큘럼을 체계적으로 개발하여 풀타임과 파트타임, 통신강의를 통해 현업종사자들을 전문가로 양성했습니다. 특히 해운브로커가 세계해운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하게 전망하던 강의는 인상적이었습니다.

노르웨이 인구는 4백만에 불과한 작은 나라입니다. 해상 물동량도 미미합니다. 그럼에도 거대선대를 제3국간에 취항시켜 막대한 운임수입을 가득(稼得)했습니다. 수도 오슬로는 인구 40만에 불과한 소도시였습니다. 브로커들이 해운시장을 떠받쳤고, 선급 DnV가 특수선을 설계 감리하고, 각종 연구기관이 간행물을 발간하는 등 해운산업 활동이 종횡무진이었습니다.

하여, 오슬로가 런던과 뉴욕과 더불어 세계3대 해운시장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노르웨이처럼 해운선진국이 언제쯤 될 건가하고 부러웠습니다.

그 후 40년 동안, IMO해상안전관리, 선박행정의 변천사, 되돌아본 해운계의 사실, 영예로운 해운인들, 한국과 소련과의 해운교류 예측 등 다수의 서책과 논문을 발표하며 해운문화 창달에 기어코자 했습니다. 아둔해서 졸작이지만 열정을 다 바쳐 기록하고 또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법률을 제·개정하고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데도 혼신의 노력을 했습니다.

꼭 받고 싶어 했던 해사문화상을 오늘 황혼의 산마루에서 받게 되어 감개무량합니다. 한국해운물류학회가 해운문화 창달에 밑거름이 되어 주시기를 간곡히 당부 드리면서 해사문화상을 주신 여러분께 거듭 감사를 드립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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