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 耕海 김종길
布德行惠(포덕행혜)

소슬바람이 불어서일까?

오늘따라 거실 벽에 걸어둔 「布德行惠」 액자가 눈길을 잡는다. 동료가 품격있게 표구까지 해서 준 선물이다. 성의가 고마워 거실 넉넉한 벽에 걸어두고 감상해왔다. 그 동료가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다. 때론 얼굴에 외로움이 서려있지만 헌칠했던 그 모습이 그립다.

처음 선물을 받았을 때, 서예대가 原谷 金基昇 선생의 작품을 소장했다는데 흡족했다. 획수가 작은 두 글자와 획수가 많은 두 글자, 네 글자를 어쩌면 저렇게도 고르게 썼을까! 역시 대가는 대가로구나 하고 글속을 보지 못하고 겉만 바라봤다. 布德行惠와 오랜 세월을 함께 하면서 의미를 깨달았다. 풀이하면 ‘덕을 넓히고 은혜를 행하라’이다. 동양고전 四書五經 중 禮記에서 따온 고사 성어다.

이를 가훈으로 했으면 했다. 옛날엔 웬만한 가문에는 가훈이 있었다. 가장 오래된 가훈은 김유신 집안의 「忠孝」이고, 최영 집안의 가훈은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였단다. 집안 구성원이 가훈을 마음에 새겨 절제하고 올곧게 인격을 갖추면 그 가문이 계승 발전된다. 그러나 치열한 경쟁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현대사회에서 가훈 따위는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해서, 布德行惠를 나의 좌우명으로 했다.

내 고등학교 교훈은 「學行一致」이다. 휴전협정 직후라 6․25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아 온 나라가 굶주리고 헐벗었다. 어려운 시기를 살아선지 교훈이 가슴에 각인됐다. 지금은 사교육에 밀려 공교육이 설자리를 잃었지만 그땐 그렇지 않았다. 교장선생님과 선생님들은 존경을 받고 당당하셨다. 학생들은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지 안 했다.

내가 졸업 후 교장선생님은 대학학장으로, 선생님들은 대부분 대학교수로 자리를 옮기셨다. 가끔 선생님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중 화학전공의 담임선생님은 잊히질 않는다. 출석부를 보지도 않고 화학기호를 암기하듯 줄줄이 호명하셨다.

매월 한번 운동장에서 전교생 조회가 있었다. 조회가 끝나고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웅성거리는 데서 출석을 부르셨다. 출석부를 보지 않고 60여명을 한 명도 놓치지 않고 호명하셨다. 장난치느라 호명에 응답치 않는 학생에게로 다가가 눈을 부릅뜨고 출석부로 어깨를 갈겼다. 당사자는 겸연쩍 해 머리를 긁적거렸다. 학생들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선생님도 웃음을 참지 못하셨다. 師弟同行의 따뜻한 담임선생님을 이 가을에 꼭 찾아뵈어야겠다.

고교시절이 아름다웠다. 상급생의 기합이 없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았다. 바다를 유영하듯 자유로웠다. 밤을 지새워 공부했다. 청운의 꿈을 불태웠다. 이성을 연모하는 풋풋한 사춘기도 경험했다. 學行一致를 인생항로의 등불로 삼아 반듯하게 살았다. 그랬기에 많은 동기동창들이 사회지도층이 됐다.

「布德行惠」나 「學行一致」나 열심히 배우고 덕을 쌓아 이웃과 더불어 살라는 뜻이다. 기독교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답하셨다. 많이 배운 사람이 자기 실속만 챙겨서는 안 된다는 도덕률이다.

나에게 布德行惠를 선물했던 동료도 그런 마음이었으리라. 그가 세상을 떠난 걸 한참 뒤에야 알았다. 그리고 차일피일하다가 오랜 세월이 흘렀다. 올 가을에는 동료가족을 찾아 조의를 표하고 명복을 빌련다. 布德行惠를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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