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 耕海 김종길
말동무

뒷산 관악산으로 올라간다.

약수터 근처에 벤치들이 여기저기 놓여있다. 벤치가 산으로 올라오느라 숨이 가쁠 터이니 쉬어가란다. 한적한 벤치를 골라 앉는다. 푸르른 숲에 생명이 넘친다. 하늘은 높고 바람은 시원하다. 하늘과 숲과, 바람과 내가 하나다.

한 남자가 다가오며 “구 구 구”하고 소리를 지르니 비둘기들이 날아든다. 호주머니에서 쌀을 한 주먹 집어내 비둘기들에게 던진다. 평화의 전령들이 다투어 쪼아 먹는다. 평화스럽다.

"비둘기들이 선생님 목소리를 알아 듣는가 봐요?”라고 내가 말을 건넨다. “산에 올 때마다 그렇게 하니 목소리도 알아듣고 얼굴도 아는가 봐요”란 대답이 돌아온다. 이렇게 말이 시작된다.

그는 명문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신흥사립 고등학교 교사를 하다 대학원을 이수하고 대학교수가 됐다. 환경운동에도 참가했다. 나이가 동갑이라 동시대를 경험했다. 인생경험에 서로 공감한다.

그를 통해 새로운 내 자신을 발견한다. 내 자신이 진보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를 만나고선 내가 보수적임을 알았다. 상대에 따라 나의 사고와 이념의 위치가 달라진다. 변수 x와 y 사이에 x의 값이 정해지면 따라서 y의 값이 정해지는 함수관계가 인간관계에도 적용되는가 보다. 그와 나는 누가 독립변수고 누가 종속변수라 할 수는 없지만 그저 그렇다.

그는 교직에 있었기 때문에 진보이고, 나는 공무원이었기에 보수가 되었을까? 단정할 수 없으나 두 사람이 그런 성향인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대화에 아무런 장애가 없다. 상대를 그러려니 인정해주니 논쟁이 없다.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것을 그를 통해 느끼게 된다. 그도 그런 것 같다. 산에서 내려와 점심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계속한다. 이렇게 말동무가 됐다.

말동무! 나이를 먹을수록 말동무가 줄어든다. 동창모임, 직장모임, 종교모임 등등 모임이 많다. 보통 10명에서 20여명이 모인다. 모임에서 상대의 말을 들으려하지 않고 자기주장을 줄기차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이가 들어 청력이 떨어지니 너도 나도 목청을 높여 와글와글하다. 도란도란 이야기해야 정겨울 터인데. 말을 하는 사람은 계속 목청을 높여 말하고 말이 없는 사람은 ‘너희들은 떠들라면 떠들어라, 나는 밥이나 먹으련다’이다. 이렇게 해서 모임이 끝나면 헤어지기가 아쉽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이 오늘의 현실을 바라보는 생각들로 많은 화제를 뿌릴 수 있는데도, 소통이 없으니 누가 무순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말동무를 만나려면 미리 전화를 해서 장소와 시간을 정해야 한다. 번거롭다. 하여, 만나기가 뜸해진다. 이러다 몇 번 놓치면 소식이 깜깜하다.

그와 나는 같은 아파트단지에 산다. 아침 먹고 “오늘 약속 있습니까?” “아니요” “그럼 약수터에서 11시 30분쯤 만나실까요” “좋습니다” 이렇게 쉽게 약속이 된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수업시간에 한 학생에게 “교과서를 읽어라”고 했다. 영어 교과서를 펴들고 읽지 않고 가만히 서있다. “왜 안 읽어? 빨리 읽지 않고!”란 선생님의 재촉에 학생들이 와그르르 웃었다.

선생님은 그 학생이 말이 어눌함을 몰랐다. 한참 만에 학생이 띄엄띄엄 읽었다. “다음 수업시간에도 읽힐 거야” 그렇게 몇 번 되풀이됐다. 예습을 해서 술술 읽고 발음도 정확하다. 학생이 자심감이 생겼다.

대학입학시험을 치르고 학생이 찾아왔다. “어떻게 됐어?” “떨어졌어요” “어떤 놈이 우리 xx를 떨어뜨렸어?”라 크게 외치고는 “괜찮아, 괜찮아”라며 꼭 껴안아줬다. 교무실에서 이를 바라보던 선생님들이 박수로 환호했다.

합격한 학생들은 자랑스럽게 선생님을 찾아오는데 떨어지면 창피해 오지 않는다. 그런데 그 학생은 찾아왔다. “학원에 가지 말고 학교에서 배웠던 것을 정리복습하면 내년에는 꼭 합격할 거다”라고 용기를 북돋아줬다.

선생님은 깜박 잊고 몇 년을 지냈다. 어느 날, 그 학생이 문 밖에서 서성거렸다. “너 웬 일이야”라고 물었다. “붙었어요” “뭘” “사법고시에요” 선생님이 급히 다가가 꼭 껴안아주었다. 두 번째 포옹이다.

“어머니께 먼저 가지 않고?” “어머니가 선생님께 먼저 인사드리라고 하셨어요” 이것이 참교육이다. 구호를 요란하게 외치는 참교육보다…

그 학생이 판사로 발령받아 경력을 쌓아 중견법관이 됐다. 설과 추석이면 한 번도 빼지 않고 선생님을 찾아뵙는다. 사제동행(師弟同行)이 아름답다. 이런 분과 말동무가 되다니!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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