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 경영학 박사(한국물류포럼 대표, 능인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 박태원 박사
한진해운의 침몰과 현대상선의 표류로 대변되는 우리나라 해운산업의 현실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시아역내항로 선사들마저도 공급과잉에 몸살을 앓고 있다. 항로안정화를 위해 출범한 한국해운연합(KSP)도 ‘제 살 깎아 먹기식’의 구조조정에 신음하고 있다. 동남아 항로를 중심으로 시장 참여자들이 앞 다투어 선박의 대형화와 선복 확대를 추구한 결과다.

해양수산부는 “정부의 각종 제도 마련에도 불구하고 업계의 적극적인 노력 없이는 해운산업 재도약이라는 결실을 얻을 수 없다”면서 “해운산업을 재건하는 주체는 해양수산부도, 신설되는 한국해양진흥공사도 아닌 해운업계”라고 강조한다. “대형선사는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육성하고 중소선사는 중견 해운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더불어 잘사는 해운’을 만들기 위한 정부의 해운정책 방향”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당초 지난 2월로 예정되었던 정부의 해운강국 위상 회복을 위한 ‘해운 재건 5개년 계획’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최근 열린 산업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에서도 STX조선과 성동조선 등 중견 조선사 구조조정안에 밀려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해양수산부 관계자는 “조선업 이슈가 워낙 중요하다 보니 후순위로 밀렸다”고 한다.

현대상선을 비롯한 국적선사들은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정부의 지원방안을 토대로 선박을 발주해 본격적인 글로벌 경쟁력을 키울 계획이었지만 정부의 결정이 늦어지면서 자칫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1980년대에 정부는 산업합리화 조치를 취했다. 당시 재무부 주도하에 중화학 공업 개편 등 숱한 산업구조 개편 정책이 이뤄졌고, 그 중엔 해운산업합리화(海運産業合理化) 조치도 있었다. 1983년에 해운산업은 업황 부진과 업체 난립으로 과당경쟁이 이뤄지며 경영난에 빠진 선사들이 줄을 이었다. 이에 정부는 개별선사를 통합하여 규모의 경제를 달성할 목적으로 1984년에 기존 63개 해운선사를 17개로 통폐합하는 해운산업합리화계획을 단행했다.

필자는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의 전신인 한국해운기술원에 공채 1기로 입사한 1984년에 해양수산부의 전신인 해운항만청과 세계은행(IBRD)의 지원으로 미국의 TBS(Temple, Barker & Sloane, Inc.)와 함께 “한국해운산업의 발전전망과 전략에 관한 연구(1985. 1)”를 수행했다. 해운산업합리화정책과 관련하여 한국해운산업에 대한 검토와 평가, 그리고 국제경쟁력 강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연구였다.

그 당시 정부의 지원방안으로 △해운산업에 대한 장기간 지속적인 지원, 특히 선사의 신조계획에 대한 대규모 자금지원 △건전경영의 유인책으로 재무구조의 개선과 해운업으로부터의 자금유출 방지 △노후선대 대체를 위한 호조건의 금융·세제지원 등을 제시하였다. 또한 외항운송의 50% 달성을 목표로 한 과거의 적취율 향상정책, 이른바 자국선자국화(自國船自國貨) 정책은 선사의 재무건전성을 저해하는 선대 확충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재고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33년이 지난 지금 서재에 꽂혀있던 연구보고서를 다시 펼쳐보면서 오늘의 한국해운산업의 난국을 타개하는 해운정책의 데자뷰가 아닌지 착각이 든다. 해운재건을 위한 정책은 무엇보다도 속도감 있게 적시(適時, just-in-time)에 이루어져야 그 실효성이 살아난다. 사경을 헤매는 응급환자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골든타임이 중요하듯이, 아무리 좋은 정책도 시기를 놓치면 공염불에 불과하다.

지난 몇 년간 해운업과 동반 침체했던 조선업이 정부의 과감한 지원과 업황 회복으로 서서히 살아나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정부의 해운업에 대한 한발 늦은 대처가 안타깝기 그지없다. 세칭 해양수산부가 타 부처에 비해 힘이 약해서 국가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과거의 사례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해운정책의 우선순위가 달라져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해운재건정책을 보다 신속하게 추진하여 해운산업의 회생에 필요한 골든타임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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