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기획원 앞에 진을 치다—계속되는 노력

▲ 박종규 회장
이맹기 사장이 대한해운공사 사장으로 부임해 왔을 때도 나는 여전히 선박도입 업무를 맡고 있었다. 선박도입 업무야말로 회사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중차대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박승완 전무도 그만 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일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나의 어깨는 그야말로 무거웠다. 정부 돈으로 몇 백만 불의 달러를 구해서 선박을 확보하는 일이었으니 자칫 잘못하면 한순간에 회사를 위기에 빠트릴 수도 있는 문제였다.

이맹기 사장도 부임하자마자 상황을 파악하고 선박도입 업무의 중요성을 인식을 했다. 자연히 나를 수시로 사장실로 불러서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사장실을 드나들면서 내가 다시금 느낀 것은 이맹기 사장이 아주 건전한 사고방식을 가졌고, 상당히 바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경영자라는 사실이었다.

그 당시는 한일 경제협력자금을 누가 얼마나 따내느냐 하는 것이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 특히 선박을 확보해야 하는 해운공사 입장에서는 일본이 제공하는 민간차관을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더 많이 따오는 것이 목표가 되어 있었다. 일본은 국내에서 신조선을 건조할 때도 자신들의 기자재를 팔아먹기 위해 민간차관을 제공했는데, 이 자금을 우리가 따내야 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배상지원금은 정부원조 3억불에 민간차관 5억불, 합계 8억불이었는데, 5억불의 민간 차관 가운데 선박건조 자금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이 자금을 따내기 위해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을 수시로 들락거렸으며 경제기획원으로는 거의 매일 출근 하다시피 했다.

당시에 내가 매일같이 출근하다시피 한 곳은 경제기획원 아래층에 있는 다방이었다. 그곳에서 사무관들과 차 한 잔을 같이 하면서 정보를 교환했다. 그 때 나는 많은 정보를 얻었고 지식도 많이 쌓을 수가 있었다.

그렇게 해 우리가 확보했던 선박이 미주 라이너 정기선 서비스에 투입했던 1만 2000톤급 4척이었다. 370만 달러짜리 2척과 405만 달러짜리 2척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4척은 최초의 미주 라이너 서비스를 개설한 선박이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이맹기 사장과 담당 실무책임자인 내가 합작을 해 얻어낸 차관으로 도입한 최초의 선박이라는 의미도 컸다.

나는 관계부처의 실무자들에게 로비를 하고 이맹기 사장은 높은 사람들을 접촉해 일을 성사시켜 나갔다. 당시에 나는 경제기획원 등 정부부처 공무원들에게 인심을 잃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때그때 많은 협조를 받았고 그로 인해 정부의 지원 자금을 많이 따낼 수 있었다.

이맹기 사장과 나는 죽이 척척 맞았다. 전혀 모르던 양반이었는데 함께 일을 해보니 손발이 척척 맞는 것이었다. 이맹기 사장도 나의 성실한 점을 인정해 결국에는 나를 신설된 조선과장에 진급을 시켜주었다. 계장을 단지 4년 만에, 그리고 입사한지 6년만에 선박도입의 실무책임자가 된 것이다.

당시 조선과에는 과장인 내 밑에 선박 기관장 출신, 조선과 출신 등 실무자들이 있었다. 이들을 통솔해 내가 하는 업무 중에 중요한 것은 해운시장을 조사하고, 해운시황을 예측하는 업무였다. 우리는 앞으로 어떤 해운분야에 사업을 넓혀가야 하고 어떤 종류의 선박을 사야 하는지를 심도 있게 연구했다.

▲ 대한해운공사 마지막 사장이자 대한해운 창업주 故이맹기 회장
나의 연구의 결론은 4가지 사업을 중심으로 해 앞으로 사업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첫째는 장기계약이 되어 있는 포항제철의 전용선 사업, 두 번째는 컨테이너 시대 도래에 대비한 컨테이너선 사업, 세 번째는 석유화학 시대를 이끌어갈 VLCC 운항 사업, 그리고 마지막으로 케미컬선 운항 사업 등을 향후 해운공사가 진출해야 할 유망한 사업분야로 꼽은 것이다. 나는 이 4가지 사업을 중심으로 한 ‘향후 사업 확대 방안’을 정식 안건으로 만들어 이사회에 올려 심의를 요청했다.

그런데 이사회에서는 위의 세 번째까지의 사업에 진출하는 것은 찬성했지만, 마지막 케미컬선 운항사업에 대해서는 공사가 진출할 사업이 아니라며 퇴짜를 놓았다. 케미컬 운송사업과 같은 작은 사업 분야는 민간인들이 하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때 이사회가 거부한 그 케미컬 사업을 나중에 내가 하게 됐으니, 참으로 묘한 일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 당시 내가 케미컬선 운항사업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연구한 것이 나중에 사업을 닦는데 보탬이 된 셈이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회사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그 일이 바로 자기의 일이 돼 버린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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