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동지가 된 대한해운공사 출신들

▲ 박종규 회장
이맹기 前대한해운공사 사장님의 지원 아래 설립된 코리아케미컬캐리어스㈜의 초기 임원은 나와 강병연, 허배, 조용휘 등이었다. 해운공사 시절 나와 의기투합했던 두만석은 주주로만 참여하고 임원을 맡지는 않았다.

대표이사는 이맹기 사장님의 지시로 내가 맡게 됐고, 서울대학교 동문이자 대한해운공사 1년 후배이며 기획실에 같이 근무했던 강병연이 상무이사를 맡게 됐다. 우리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허배는 해운공사 시절 기관장, 조선 감독 등을 했던 경험을 살려 부산사무소장(상무)을 맡았다. 총무담당 이사를 맡은 조용휘도 해운공사에서 같이 일했던 경험이 있어서 창립멤버로 합류하게 됐다. 우리 창업동지들은 무교동 코오롱빌딩 앞 광일빌딩 501호의 10평 남짓한 사무실에 둥지를 틀었다.

창립총회를 마친 코리아케미칼캐리어스㈜ 입장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케미컬 탱커를 하루라도 빨리 도입해 일본 선사들이 독점하고 있는 시장에 뛰어드는 일이었다. 당시 우리의 계산으로는 우리나라 화주들의 석유화학 제품 수입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3척 정도의 수송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 중에 우선 1척이라도 도입을 해야 우리가 운송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기에, 우리에게 선박도입은 너무나도 간절한 소원 사항이었다.

그러나 당시 자본금 300만원의 회사 실정에서 한척에 7천만엔에서 9천만엔하는 케미컬 탱커를 도입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난제 중의 난제였다. 대한해운공사에서 선박도입 업무를 도맡아 해봤던 나로서도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나는 ‘국적취득 조건부 나용선 도입’이라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해외금융을 리스 방식으로 조달해 선가를 몇 년간 분할해 상환하고 선가 상환이 끝나면 국적을 취득해 우리 배로 만드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적취득 조건부 나용선 도입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선진국에서는 이런 방법이 보편적으로 이용되고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경험이 전무한 상태였다. 더구나 신설 회사로서는 담보가 없는 상태에서 1억엔에 가까운 자금을 빌리려면 선박을 도입한 후 용선료를 꼬박꼬박 갚을 수 있다는 소위 ‘용선료 지급보증’을 누군가 해줘야 하는데, 그것을 얻어내기가 매우 어려웠다. 나는 대한보증보험을 찾아가 지급보증을 요청했고 대한보증보험에서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자 후속작업을 임원들에게 맡기고 곧바로 외화를 빌리기 위해 일본으로 날아갔다. 그 때가 1970년 1월이었다.

뒷돈 요구로 무산된 첫 선박도입 계약

일본에서 돈을 빌려 일본 선주의 선박을 사서, 그것을 국내로 들여오는 일은 예상했던 대로 너무나도 어려운 과제였다. 전작에서 밝힌 내용이지만, 처음에 우리 회사에 선박을 팔기로 했던 ‘K운송’은 여러 번 애를 먹였다.

처음에 우리가 매입을 검토한 선박은 K운송 소유의 300gt급 석유화학 운반선 제3교쿠호마루호였다. 도쿄무역이라는 회사가 선박 매입자금을 빌려주기로 한 상태였다. 우리는 이 선박을 7000만엔에 매입하기로 하고 계약금 700만원까지 준비해 간사이(關西) 지방에 있는 K운송을 찾아갔으나 K운송 사장은 “팔 수 없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1000만엔의 뒷돈을 달라는 요구를 했다.

내가 이 요구를 거절하자, K운송의 사장은 이번에는 제3교쿠호마루호 대신 자기 보유선박도 아닌 자신들이 용선한 선박을 팔겠다는 식으로 나왔다. 서로 옥신각신한 끝에 결국은 그가 두 번째 제안한 대로 제7교쿠호마루호를 9300만엔에 사기로 합의하게 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믿었던 대한보증보험이 지급보증을 해 줄 수가 없다고 통보해 왔다. 그러니 당연히 처음에 금융지원을 하기로 했던 도쿄무역측에서 금융지원을 할 수 없다며 발을 빼버렸다. 이렇게 해서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된 나는 해운공사 시절 선박 도입할 때 거래하던 ㈜도쇼쿠(東食)라는 회사를 떠올렸고, 마침 동경을 방문하신 이맹기 사장님을 모시고 도쇼쿠의 야스다 전무를 만나 자금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도쇼쿠의 입장에서는 지급보증도 없이 1억엔의 자금을 빌려달라는 우리의 요청이 허무맹랑한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야스다 전무는 나의 간곡한 부탁에 “검토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사실 이 말은 ‘해줄 수가 없다’고 거절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본어로 ‘검토해 보겠다’는 말은 사실상 ‘거절합니다’라는 뜻인데, 그것을 잘 몰랐던 나로서는 매일같이 도쇼쿠에 출근하면서 이제나 저제나 검토가 끝나서 승낙이 나기만을 기렸다.

동복(冬服) 한 벌로 5개월을 버텨내다

날짜가 지나가고 있었지만, 도쇼쿠로부터는 어떤 대답도 듣지를 못했다. 야스다 전무도 입장이 곤란한지, 의식적으로 나를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일이 매우 어렵게 돼가는 것을 직감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나로서는 도쇼쿠로 출근하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비자를 연장해 가면서까지 그 추운 겨울과 봄 5개월을 겨울 양복 한 벌로 버텼다. 그래서 나중에 도쇼쿠 직원들은 나를 ‘겨울양복의 사나이’라는 뜻에서 ‘후유후쿠(冬服)상’이라고 불렀다.

그 사이 도쇼쿠의 이사회는 상정될 때 마다 상정유보 상태였다.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동경에 왔을 때, 해운공사 시절 절친한 사이였고, 당시 해운공사 동경지사에 근무하던 김영선씨가 필요할 때 쓰라고 내줬던 저금통장의 돈까지 모두 써버리고 바닥이 난 상황이었다. 하는 수 없이 거처를 호텔에서 비용이 싼 하숙집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도쇼쿠 사무실에 더 이상 나갈 용기도 나지를 않았다.

어느 날 동경 시내 포장마차에서 술을 먹다가 보험회사 직원으로부터 “자살을 해도 그에 따른 사망 보험료는 나온다”는 말을 듣고 여차하면 중대한 결심을 하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을 했다. 정 안되면 사망 보험금이라도 받아서 그 걸로 배를 사고 우리 회사를 출발시키면 된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던 것이다. 하지만 매우 다급했던 나로서는 이런 엉뚱한 생각이 배수의 진을 치는 셈이 됐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됐다. 나는 심기일전해 도쇼쿠로 출근하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이때부터 도쇼쿠측의 태도가 많이 바뀌기 시작했다. 나를 피하기만 하던 직원들도 나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했는지, 내가 잘 되기를 모두 응원하는 분위기로 바뀐 것이다. 도쇼쿠는 종당에는 대한보증보험 대신에 한국의 대기업 보증만으로도 금융을 해줄 수 있다는 대안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한 줄기 서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나는 곧바로 인맥을 동원해 대기업인 P기업의 지급보증을 요청했고 P기업도 우리의 요청을 받아들이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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