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 耕海 김종길
잊히질 않는 옛 추억

안형!

소식이 끊긴지 참 오래되었습니다. 그동안 외국에서 인생살이에 희로애락이 많으셨지요. 이계복 KBL대표와 점심을 함께 하면서 안형의 미국 주소를 알게 되어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그는 나의 고등학교와 대학의 후배라 각별한 관계입니다. 안형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입었다고 하더군요. 안형이 귀국하면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해 두었습니다.

나와 안형과의 인연은 44년이 되었네요. 백야白夜의 여름에서 백설白雪의 겨울로 계절을 바꾸어가며 노르웨이 해운아카데미에서 공부할 때였습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로워 적응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평생을 해운인으로 살아야하는 나로선 새로운 지평선을 열어야겠다는 각오로 공부하느라 밤을 지새웠습니다.

방랑의 길을 떠난 폐르가 돌아오길 호호백발이 되도록 애타게 기다리는 솔베이지의 청순한 사랑을 작곡한 악성 그리그의 「솔베이지 송」, 우리나라 여성들이 여필종부를 천부의 계율로 삼았던 시대에 가정을 박차고 뛰쳐나간 노라를 통해 여성해방과 남녀평등을 외쳤던 문호 입센의「인형의집」, 기나긴 겨울에 태고연한 설원에서 산을 넘고 눈 덮인 크고 작은 호수 위를 털모자를 쓴 스키어들이 하염없이 달리는 풍경은 동화책의 그림이었습니다. 공해가 없는 신선한 공기와 물을 마시시며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복지국가가 부럽기만 했습니다. 이러한 북유럽 바이킹족의 조국 노르웨이 문화를 우리는 함께 호흡했었지요.

겨울방학 때 스키캠핑을 갔습니다. 1976년 1월 6일, 오슬로에서 버스로 4시간을 북쪽으로 달렸습니다. 온 누리가 눈으로 덮혔습니다. 띄엄띄엄 있는 집들은 눈에 파묻혀 졸고 있었습니다.
가파르게 굽이치는 산골자기 눈길 아래 낭떠러지를 차창 너머로 내려다보면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달리는 버스기사의 운전솜씨에 경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도착한 스키캠프장 와달은 첩첩 산중이었습니다. 칠면조, 산양 등 육류와 각종 생선, 한겨울에 딸기와 토마토 등 야채와 과일로 차려진 푸짐한 뷔페 식사를 즐겼습니다. 스키를 타다가 지치면 침실로 돌아와 책을 읽고 창가에서 아름다운 설경을 바라보며 두고 온 가족이 그리웠습니다. 되돌아갈 수 없는 그때가 가슴이 아리도록 그립네요.

인구 4백만 명에 불과한 소국이 우리보다 13배나 많은 선박을 보유하고 3국간 수송을 했습니다. 선박운항기술, 해운경영기법, 보험과 P&I, 조선이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우리 해운은 언제 저렇게 될까하고 부러워했습니다.

1976년 2월 26일 눈 덮인 오슬로를 떠나 대륙에 도착하니 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럽 여러 나라의 해운과 항만을 돌아봤고 유럽에서 묻은 때를 카나리아군도의 대서양 바닷물에 씻고서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 들렸다가 일본으로 날아와 도쿄와 요코하마항의 구석구석을 견학하고서 귀국하는 세계 일주를 했습니다. 노르웨이 정부에서 주는 생활비 월 2000크로네의 절반을 저축한 돈으로…

해양대학에서 선박운항기술 분야를 개괄하고 정부에 들어가 해운행정을 하면서 해운을 섭렵한 줄 알았는데 노르웨이에서 shipping을 공부하면서 내 문외한을 깨닫고 부끄러웠습니다. 국장으로 승진하여 본부의 몇몇 직책을 두루 맡았고 부산과 인천해운항만청장으로 전심전력을 다해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그 직책들이 외국과의 해운협정과 IMO 등 국제기구들과 관련 있어 국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행운도 노르웨이 유학 덕택이었습니다.

현직에서 활동과 경험들을 기록으로 남겼고, 은퇴 후엔 본격적으로 보고 듣고 체험한 것들을 해운 역사책으로 발간했습니다. 그리곤 내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하겠다고 수필을 공부해 국제PEN클럽 회원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쓴 내 인생을 고백한 수상록을 동봉하니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귀국하면 잊힐 리 없는 아름다웠던 옛 추억들을 나누길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2019년 1월 27일
耕 海 김 종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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