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 경영, 유황수송선 사업의 실패

▲ 박종규 회장

우리 회사는 1977년부터 1979년까지 남해설파호, 남해파이오니어호, 동해설파호 등 3척의 융용유황수송선을 도입했다. 이 사업은 때마침 시작된 융용유황의 수입 시장을 새 선박 3척으로 100% 전담하겠다는 각오로 의욕적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좋지 않았으며 우리에게 오기 경영은 안 된다는 큰 교훈을 남겨줬다.

우리가 1975년부터 국내와 일본의 정유산업과 유황 수요를 면밀히 조사해 본 결과 새로운 수송수요가 생길 것이 확실했다. 국내 정유시설들은 탈황시설을 갖춰야 했지만 탈황 시설 가동은 요원해 보였고 결국은 일본에서 액체 유황 수입이 계속 늘어날 것이 예상이 됐던 것이다.

그러나 액체 상태의 유황을 수송하는 데는 섭씨 130도를 유지할 수 있고, 특별한 장치를 갖춘 전용선이 필요했다. 우리는 이 전용선을 자체적으로 건조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2500적재톤 규모의 융용유황수송선 2척을 신조하면 한 달에 5항차씩 운항해 연간 14만톤씩 28만톤을 수송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국내 예상 수입량 30만톤을 거의 100%로 우리 선박으로 수송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러나 유황전용선을 건조한 경험이 있는 니혼강관(日本鋼管)에게 기술 이전을 제의했으나 이들은 우리의 요구를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아마도 자국의 유황전용선을 운항하고 있는 선사를 보호하려는 조치인 것 같았다.

필자는 하는 수 없이 니혼강관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유황전용선을 설계하고 건조한 경험이 있는 데라오카조선소를 찾아가 설계와 건조기술을 지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데라오카조선소의 데라오카 사장은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1976년 가을 데라오카 사장은 직접 우리가 만든 조선소인 동해조선까지 방문해 기술자를 만나보고 조사를 마친 다음에 동해조선과 계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1977년부터 융용유황수송 전용선인 남해설파호, 동해설파호가 건조되기 시작했다. 2척이 투입될 경우 사업 전망은 매우 밝다고 우리는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자신감은 일본에서 똑같은 유황전용선이 2척 건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절망감으로 변하고 말았다. 미쓰비시석유에서 계열사를 통해 우리가 건조하는 선박과 똑같은 크기의 융용유황 전용선을 히가키조선에 발주해 건조 중에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문제인 것은 한국측 수입업체인 남해화학이 FOB가 아닌 CIF 조건으로 계약을 맺어서 수입 수송권이 미쓰비시측에 있었던 것이다. 미쓰비시측이 당시 우리 해운당국이 채택하고 있는 웨이버제도(외국선사가 국내 화주의 화물을 수송하려고 할 때 그 기간에 수송이 가능한 국적선사가 없음을 증명해야 하는 제도)를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다. 국내에서는 유황전용선이 있을 리 없다고 지레짐작한 결과다.

남해화학은 국영기업이었다. 따라서 우리들은 남해화학이 유황을 수입할 때는 FOB계약을 하고 수송문제는 한국선주협회나 해운항만청에 의뢰를 해 올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런데 CIF로 계약해 일본측에 수송권을 넘겨준 것이니, 그 때의 당혹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해운항만청은 한국선사가 융용유황선 2척을 짓고 있는 사실을 환영하면서 외화절약이라는 차원에서 기필코 웨이버제도를 관철시키겠다고 밝혔다. 반면에 남해화학은 이미 맺은 계약이기 때문에 CIF조건의 계약을 철회할 수 없다고 나왔다. 아무리 웨이버제도가 있다고 해도 수입업자인 남해화학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지 못하면 운송회사로서는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미쓰비시측도 난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남해화학과의 계약이 있다고 해도 결국 웨이버제도가 걸림돌이 될 것이기 때문에 사업 추진이 원만하지 않으리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미쓰비시측은 일단 건조하려던 선박 중에 1척을 우선 취소시켜버렸다.

남해화학은 우리 회사를 훼방꾼으로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해운항만청이 우리 회사를 밀어줄수록 우리 회사는 화주인 남해화학의 미운털이 잔뜩 박히게 됐다. 남해화학은 미쓰비시와의 계약도 지키고 웨이버제도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미쓰비시측이 건조한 배를 국적선사인 H해운이 용선해 투입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당시 해운항만청은 국내 조선소에서 국적선사가 건조하는 배를 나두고 외국선박을 용선해 쓴다는데 대해 “절대 허용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아 놓고 있었다. 해운항만청장이 직접 나를 불러 “절대 양보하지 말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사실 나는 이 때 이 사업을 포기할 생각을 했었다. 아무리 웨이버제도가 있다고 해도 화주인 남해화학과 평생 등을 지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선적지가 많아 선박운영이 어려운 사업에 무리하게 진출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판단도 하고 있었다. 그래서 H해운에게 우리가 짓고 있던 배를 넘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회사 간부들과 골프를 치다가 한순간에 바뀌었고, 그것이 우리를 괴롭히는 족쇄가 됐다. 간부들이 H해운에 배를 팔 것이냐고 묻는 바람에 내가 오기로 “팔긴 왜 팔아”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것이 ‘말의 씨’가 됐다. 직원들은 배를 팔면 H해운에 우리가 지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 결국 H해운이 국취부나용선으로 들여오려던 선박을 우리가 들여오게 됐다. 이 배가 1978년 3월에 미쓰비시측과 계약을 해 들여온 남해파이오니호이다. 하지만 이 배의 무리한 도입은 결국은 화를 자초하는 일이었다.

우리 회사는 갑자기 유황 전용선을 3척이나 가동하게 됐지만, 우리가 선적할 수 있는 화물량은 예상보다도 적었다. 사업은 고전에 고전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생각다 못해 용융유황선을 다른 선종으로 개조해 볼 생각도 했지만, 화물창이 너무 작은 선박이어서 그것도 실익이 없었다.

결국 동해설파호의 완공을 늦춰가면서 고심한 끝에 찾아낸 대안이 수산화나트륨을 수송하는 선박으로 개조하는 것이었다. 이 선박은 결국 한양화학과 장기계약을 체결함으로써 한숨을 돌렸지만 이 화물 수송도 수익을 내기는 어려웠다.

융용유황수송선 사업은 이렇게 우리에게 고생만 시키고 수익은 전혀 남겨주지 못한 잘못된 선택이었다. 한양화학과 장기계약이 1985년 2월에 종료된 동해설파호는 그 후 곧바로 매각 처리했고, 제16케미캐리호와 남해설파호도 그 이후에 차례로 매각했다.

마지막으로 들여왔던 남해파이오니어호도 1991년 6월에 매각해 우리 회사는 용융유황수송선 사업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결국 이 용융유황선 사업은 ‘오기로 경영을 해서는 안 된다’는 큰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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