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개 재벌회사도 인수 꺼린 동해조선

▲ 박종규 회장

동해조선이 이처럼 망가진 것은 결국 인사정책이 실패한 것이고 그 모든 책임은 궁극적으로는 나에게 있었다. 경영능력이 없는 설계전문가를 CEO로 택한 결정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또한 조선은 조선 전문가에게 맡겨놓아야지 해운전문가가 이것저것 참견하면 회사 경영이 잘 안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도 잘못된 판단이었다. 이맹기 사장님이 C씨의 사장 천거를 극력 저지하려 했던 이유를 이 때 가서야 알 수 있었다.

내가 동해조선의 위기를 감지한 것은 1977년 10월쯤이었다. 동해조선의 C사장이 갑자기 서울에 올라와서 함께 점심을 먹었는데 그 자리에서 C사장은 동해조선을 매각하자는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동해조선이 유럽시장을 뚫어 6척이나 수주를 함으로써 조선소에 대한 평가가 좋은 이때 조선소를 팔아서 돈을 버는 것이 골치 아픈 조선업을 하는 것보다 낫다고 주장하면서 자기가 소개해 조선소가 팔릴 경우 판매대금의 1할을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천청벽력 같은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경영자가 아니라 브로커를 사장이라고 모셔온 것이니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이었다. C사장은 결국 우리 회사를 물러나고 말았다.

동해조선은 이미 심각한 나락으로 떨어져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대표이사에 취임해 상황을 파악하고 대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나는 곧바로 울산 현지로 내려가 실태파악에 들어갔다. 울산에 내려가서 보니 동해조선은 생각보다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방만한 경영을 했다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직원식당은 식단을 포함한 관리상태가 엉망이었다. 반면에 간부들은 주변의 고급횟집을 단골로 정해놓고 회사 밖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직원들의 근무실태나 경영관리 상태도 그야말로 수준 이하였다. 당시 동해조선 근무인원은 1200명이었는데, 1만톤급 이상 선박을 건조한 바가 없는 소형 조선소가 너무나 많은 인원을 고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더욱 한심한 것은 현재 인원 파악이 잘 안 된다는 점이었다. 쓸데없는 인원이 너무 많았고 심지어 어떤 경우는 이름만 올려놓고 월급만 타가는 경우까지 있었다. 공정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기능이 필요하다며 많은 인원을 채용한 것이 화근이었다. 더구나 빽으로 조선소에 들어온 사람들도 있으니 실제로는 일도 안하면서 월급만 축내는 부류들도 있었다.

나는 한 달 정도 조선소를 실사했는데, 그 결과는 참담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문제는 독일선사로부터 수주한 컨테이너선 6척을 건조할 수 있는 방안이 없다는 점이었다. 계속적으로 적자가 나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건조작업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이 때 나는 결국 조선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동해조선을 정리하는 문제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1977년 12월경에 나는 재벌회사 12군데와 접촉을 해 보았지만 동해조선 매각은 불발됐다. 삼환기업의 최종환 회장은 울산 현장까지 직접 내려와 조선소를 둘러보고는 결국 “못하겠다”고 딱 부러지게 말하고는 돌아가 버렸다. 럭키의 구자경 회장도 우리회사 후원자인 이맹기 사장에게 “조선업의 ‘조’자도 꺼내지 말라”며 거절의사를 밝혔다는 후문이었다.

회사 망쳤다는 생각에 극단의 선택

그러는 사이 자금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1978년 5월 10일에 독일이 발주한 첫 배를 진수하면서 진수 대금을 받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5월 6일에 상환이 돌아오는 큰 금액을 결제해야 했는데 이를 막을 돈이 없어서 부도가 날 처지였다. 때문에 우리들은 독일 선주에게 4월 중순부터 진수 대금을 1주일 정도 앞당겨 송금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독일 선주는 계속해 답변을 주지 않다가 5월 3일에서야 ‘배를 진수 못하거나 회사가 부도가 날 경우 조선소의 자본과 경영권 일체를 자신들에게 넘긴다’는 조건으로 조기송금해 줄 수 있다는 전문을 보내왔다.

나는 독일선주에게 회사를 넘기는 것 보다는 차라리 부도를 내서 국내 다른 기업이 인수하게 하는 것이 애국이라는 생각을 했다. 따라서 독일 선주의 조건부 지원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내용의 전보를 보내버렸다. 하지만 이런 거부 의사가 오히려 독일선주를 안심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독일선주는 갑자기 5월 5일에 진수 대금을 앞당겨 송금해 왔다.

이렇게 선주로부터 선불금까지 받아가며 어렵게 배를 지어 가고 있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버틸 힘이 없었다. 12개 재벌들을 상대로 벌인 회사 매각 협상도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최각규 상공부장관을 통해 추진하려던 현대중공업의 동해조선 인수 방안도 현대건설 아파트 로비사건으로 물거품이 됐다. 이제는 파산할 날짜만 기다리고 있는 비참한 상황이 됐다.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해결 방안을 모색했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임원 모두가 지쳐 있었고 종당에는 나까지 기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큰 어음 결제일을 며칠 앞둔 1978년 8월 하순, 나는 외로울 때마다 찾는 프라자호텔 최상층 라운지를 찾아갔다. 시청 시계판이 마주 보이는 창가에 앉아 상념에 잠겼다. ‘이제 정말 사업가로서의 나의 생명은 끝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외로움’이 밀려왔다. ‘사업가가 망하면 위로보다 욕을 얻어먹게 되는 법인데, 나야 말로 회사를 망해 먹은 중소기업 사장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자 수치심이 끓어올라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창밖을 향해 몸을 던져버렸다. 정말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신이 들고 보니, 내가 완전히 뒤로 넘어져 있었다. 이마는 욱신욱신 아파왔다. 창문에 끼워져 있는 두꺼운 유리에 몸이 부딪히고 뒤로 나동그라졌던 것이다. 손님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의식도 차츰 회복이 됐다. 나의 자살미수 해프닝은 이렇게 끝이 났다.

나는 부도가 나더라도 채권자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들자, 곧바로 주거래은행인 서울신탁은행을 찾아가 홍윤섭 행장을 만났다. 마지막 인사나 드려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홍윤섭 행장에게 더 이상 어음을 결제할 수가 없으니 부도가 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인사를 왔다고 말했다.

홍윤섭 행장은 “왜 은행에 피해를 입히느냐”, “부도야말로 은행에게 사기 치는 것이다” 등등의 말을 쏟아내며 20~30분간 나에게 호통을 치면서 화를 냈다. 나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돼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는데 홍윤섭 행장은 중역들을 물러가게 한 다음에 나의 손을 덥석 잡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상공부 장관을 만나야 해, 부도가 나기 전에 꼭 좀 만나게 해 줘” 하면서 내게 상공부 장관과 다리를 놓아줄 것을 부탁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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