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련된 선원들 빼내가는 LNG 운항선사들

▲ 박종규 회장

우리가 LNG선 운항사업에 직접 참가하지 못하게 된 것을 매우 섭섭하고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정부가 입안했던 국적선에 의한 LNG 수송 계획은 수립 단계부터 석유화학 관련 운송선사인 ‘한국특수선’의 자료와 자문을 많이 참조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막상 이 계획이 세워지고 운영선사를 뽑는 단계에 이르게 되자 “작은 회사에서 어떻게 이런 대형프로젝트를 소화할 수 있겠느냐”는 주장이 나오면서 재벌그룹에 속해 있는 대형선사들만 운영선사로 선정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숙련된 우리의 선원들을 신규 LNG 운항선사들에게 많이 빼앗겼기 때문이다. 당시 LNG선을 운항할 수 있는 선원들은 아무데도 없었다. 오직 우리 회사, 즉 한국특수선만이 특수화물을 장기간 전문 수송해 왔기 때문에 상당한 노하우와 운항기술을 갖고 있었다. LNG 운항선사로 선정된 5대 국적선사들도 컨테이너화물이나 벌크화물을 위주로 취급해 왔기 때문에 위험화물에 대한 운송 경험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반면에 우리는 LNG선보다 더 까다로운 운송기술이 요구되는 LPG선과 암모니아선 등의 운송 경험을 많이 쌓고 있었기 때문에 LNG선 운항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이에 따라 우리 선박에 승선하고 있는 선원들의 주가는 하루아침에 치솟고 있었다. 위험화물 운송 경험이 있는 선원은 우리 선사 선원들뿐이었으므로, LNG선 운영선사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선원들을 빼가기에 혈안이 돼 있었다. 우리는 운영선사로 선정되지 못한데다가 잘 훈련시켜놓은 우수한 선원들을 LNG선 운영선사들에게 빼앗기는 설움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 우리는 훈련된 선원들을 잃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만 했다.

이러한 처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많은 선원들을 빼앗겼다. 자본력이 미약한 우리로서는 대기업들의 공세를 막아낼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1992년 한해만도 고급선원들을 포함해 모두 19명의 전문직 선원들이 LNG운항선사로 옮겨가 버렸다. 이 숫자는 우리의 고급선원 전체의 60%를 차지하는 것이었으니 우리로서는 몹시도 분한 일이었다. 해당선사들에게 부당 스카우트를 자제해달라는 공문도 보내고 호소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 때 정말 중소선사의 설움을 처절하게 맛보았다.

우리가 LNG선 사업에 지분 참여만 하던 것도 그만두고, 이 사업에서 손을 떼다시피 한 것은 LNG 5호선 이후부터이다. 운영선사도 아닌데 지분 참여만 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판단을 한데다가 당시 우리 회사는 상장을 검토하고 있었기 때문에 LNG선에 많은 투자를 해 부채비율을 높여서는 안 된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기 때문이다.

5년만에 재개된 사장의 승선 항해

1992년, 우리의 많은 선원들이 스카우트 열풍에 휘말려 다른 선사로 자리 옮김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5년 동안 하지 않던 승선 항해를 다시 시작했다. 나 자신이 직접 배를 타고 가면서 선원들의 근무실태를 점검하고, 그들의 애로사항 등을 들어줌으로써 해상 승무원들의 마음을 잡아두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본격적으로 승선항해를 시작한 것은 1993년부터로 우리 회사가 운항하는 대형선에 승선해 선원들과 일일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 사업 초창기부터 회사의 주요 항로와 선박은 가급적 직접 승선해 선원들의 근무실태를 직접 확인하려고 노력했었다. 당시에 국적선사들 중에 사장이 직접 승선해 선원들의 근무상황을 살피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특히 1993년에 내가 우리 선박에 많이 승선했던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우리 선원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고, 둘째는 선박사고를 줄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으며, 셋째 새로 출범하는 LNG선 운영선사들에게 더 이상 선원을 빼앗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해운회사에서 해난사고 만큼 두려운 것은 없다. 특히 인명 사고나 선체 손상 사고 등이 발생하면 엄청난 비용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신용도와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게 되기 때문에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 해난사고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서서 우리 회사의 주종 선형이 된 대형 가스선에서도 자주 사고가 발생해 회사 경영상 큰 골칫거리였다. 특히 탱크에서의 누설 사고, 선체와 탱크 사이의 침수 사고 등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이런 경우 대부분은 간단히 수리를 할 수 없는 것이어서 회사 경영에 큰 타격을 주었다.

당시 3년간 통계를 집계해 보니 연간 평균 205만 달러 정도를 사고 수습비용으로 지출하고 있었다. 나는 비상 대책을 마련해야만 한다고 판단하고 1993년 한해동안 닥치는 대로 우리 배에 승선하게 됐던 것이다. 특히 새 배나 좋은 배 보다도 사고가 발생하는 문제선박에 집중적으로 승선했다. 당시로서는 선사의 사장이 직접 승선해 선원들과 함께 생활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런 나의 행동은 해운업계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이런 소문 때문인지 그 해 말에는 KBS에서 ‘박사장의 선원수첩’이라는 제목으로 다큐멘터리 특집 프로그램이 방영되기도 했다.

보통 한번 승선하면 1주일간을 선원들과 먹고 자면서 많은 대화를 했다. 이런 대화를 통해 회사의 경영 방침을 자연스럽게 선원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고, 어떤 때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선원들의 애로사항을 파악하기도 했다.

이런 승선 방문은 1년만에 그 효과가 나기 시작했다. 선원들의 이직률이 현격하게 감소했고, 해난사고도 4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사고 피해금액이 150만달러정도 줄어들었으니 한해에 150만달러를 벌어들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보험료가 함께 낮아지면서 많은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사고를 방지한 대가로 대형선 한 두 척을 운항해 벌어들인 소득과 같은 성과를 올렸으니 대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수확은 선원들의 고민과 불만을 속속들이 알게 돼 이를 회사 정책에 반영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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