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한국선주협회장이 된 후배 경영인

▲ 박종규 회장

“저희 회사는 작아서 앞으로 더 키워야 합니다. 회사에 전력투구하기 위해서는 단체장 같은 것을 맡아서는 안 됩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내가 본 ‘오사카 상인’이라는 책 얘기를 꺼냈다. 오사카 상인들은 상공회의소 소장과 같은 자기들의 대표를 뽑을 때는 감투욕이 세거나 제일 못난 사람을 뽑는다는 것이다. 상인은 장사만 잘 하면 되지, 굳이 감투 같은 것을 쓰는 것은 바보스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얘기였다. 말하자면 진짜 오사카상인은 모두 실속파라는 것이다.

이 같은 설명을 들은 이맹기 회장은 “나 보고 하는 얘기구먼…”하고 말했다. 내가 회장을 안 하겠다는 이유를 댄 것이 이맹기 회장이 한국선주협회 회장을 오랫동안 한 사실을 모욕한 것처럼 비쳐진 것이다. 그 때 내가 얼마나 무안하고 당황스러웠는지 모른다. 나는 이 오사카 상인 얘기를 이맹기 회장에게 한 것을 그 후로 두고두고 후회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92년 1월 한국선주협회 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임된 사람은 당시 조상욱 두양상선 사장이다. 나는 사실 처음부터 회장을 할 생각이 없었는데, 주변에서 회장 후보로 천거를 하는 바람에 조상욱 회장과 경쟁을 했던 것으로 오인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정말로 한국선주협회 회장 출마 의사는 없었고, 그래서 정기총회를 며칠 앞두고 나는 조상욱 회장측에 선주협회 회장 출마 의사가 전혀 없음을 밝히기까지 했다.

사실 내가 한국선주협회 회장을 하지 않으려고 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른경제동인회까지 만들어 경영풍토 개선에 앞장서야 하는 입장에서 비자금을 만들어 로비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주협회 회장 자리는 대정부, 대국회 로비를 해야 하는데, 나와 같이 로비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 회장이 되면 해운업계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니까 나의 철학과는 아주 틀리기 때문에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후임 경영자인 KSS해운 장두찬 사장은 나중에 한국선주협회 회장에 선임됐다. 그 때는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나의 후임 경영자, 그리고 나와 함께 한솥밥을 먹던 사람이 선주협회 회장이 되니, 그것도 최초의 전문경영인 출신이 회장이 되니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장두찬 사장이 선주협회 회장이 됐을 때 처음에는 걱정이 많았다. 회장이 되면 비자금을 만들어야 할 텐데, 우리 회사에서는 비자금 만드는 것은 절대로 허용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두찬 회장은 아주 훌륭하게 선주협회 회장직을 수행했다. 우리 회사에서 하던 그대로, 소신대로 하니까 오히려 문제없이 이끌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전임 현영원 회장이 몸이 아파서 일찍부터 수석부회장이었던 장두찬 사장이 사실상 회장 역할을 상당기간 대신했던 것이 도움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선주협회는 당시에 큰 회사에서 회비를 내지 않으면 직원들 월급도 못 줄 정도로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런데도 정부당국이나 국회 등에 지원해야 할 사안들은 많았다. 하지만 장두찬 회장은 공사 구분을 확실히 해 공식적인 일에만 지원을 하는 체제를 만들었다. 사적인 지원이나 명분 없는 지원은 모두 커트해냈다. 자금을 철저히 컨트롤 하다보니 2~3년 지나는 사이에 선주협회에는 자금이 쌓이게 됐다고 한다. 직원들 월급 주기에도 바빴던 선주협회가 장 회장이 물러날 때쯤에는 거의 20억원 정도의 자금이 모였다고 한다. 사실 이때가 선주협회가 가장 튼튼한 시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톤세제를 도입해 국적선사들의 법인세를 대폭 낮추도록 한 것도 장두찬 회장의 공로이다. 사실 톤세제도는 노무현 대통령이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부터 도입하려고 하던 제도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노무현 장관이 재경부에 아무리 얘기를 해봐도 씨알도 안 먹혔던 것이다. 그러던 노무현 장관이 대통령이 돼 버렸으니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마침 선주협회 회장이 된 장두찬 회장이 곧바로 청와대에 들어가 보고를 하고 대통령이 관계부처에 “이것은 해줘라”하고 명령하니 톤세제도가 곧바로 시행이 된 것이다.

선주협회와 관련해서는 한국해사재단 얘기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사실 해사재단 설립의 아이디어는 내가 낸 것이다. 한국해사재단은 한국예선업협동조합과 한국도선사협회, 두 단체가 내놓은 돈으로 설립됐다. 이 두 단체는 선사들로부터 서비스료를 받을 때 외국선사와 우리 국적선사를 차등해 요율을 받아서는 안 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외국선사와 국적선사에 대해 요금을 똑같이 올리게 되면 국내항 이용이 많은 국적선사들에게 오히려 불이익이 돌아가게 되는 셈이 된다. 따라서 요금은 외국선박과 국적선박을 똑같이 올리고, 대신에 국적선사에게는 올린 요금(수수료)만큼을 해사재단에 기부하도록 한 것이다.

이 한국해사재단은 일본의 해사재단을 벤치마킹 한 것이다. 일본해사재단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내가 쫓아가서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 경위와 운영방식 등을 샅샅이 조사했던 것이다. 조사를 마치고 귀국할 때 일본의 해사재단 규정을 하나 얻어가지고 와서 해사재단의 설립 방향을 정하고 예선업협동조합과 도선사협회로부터 기부를 받는 식으로 재단을 창립하게 된 것이다.

결국 한국해사재단 설립은 성공했다. 내가 재단 이사장을 그만둘 당시에는 자산이 100억원이 안 될 때였지만 그 후에 100억원이 넘는 자산 규모를 유지했다. 이 돈은 후에 한국선주협회가 자기건물을 매입하는데도 보탬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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