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 耕海 김종길

효도비

시인 친구의 시비 제막식이 있어 오래간만에 고향을 찾았다.

학교 다니느라 일찍 고향을 떠났지만, 연전까지만 해도 매년 가을이면 고향을 찾았다. 집안이 몰락해 부모 형제가 다 떠나버린 고향 버스터미널을 밟는 순간 가슴에 찬바람이 스쳤다. 그래도 고향을 또 찾아갔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라서.

선산에 잠들어 계시는 증조부모님과 조부모님, 그 외 조상님들을 성묘했다. 그리곤 어른들을 찾아뵈었다. 내 어깨를 다독거리며 “자네는 성공할기다. 자네 할매와 어무니가 어떤 어른이라고! 그 음덕이 자네에게로 돌아올기다. 암 그렇고 말고, 하모 하모”란 하동 사투리 격려가 정겨웠다.
 
할머니께서 독립운동을 하던 지인을 도우다 폭약이 폭발되어 만신창이가 되셨다. 진주 도립병원에서 3년간 입원치료를 받았으나 두 손목이 잘린 채 집으로 돌아오셨다. 가산은 탕진되고, 할머니는 일제에 두 손을 빼앗기고 한 많은 세월 29년을 사시다 1946년 2월 24일 세상을 떠나셨다.

할머니께서 시장에서 얻어먹는 여인이 아이를 낳으면 집에서 쌀과 간장을 챙겨 시장에서 미역을 사 움막으로 들어가셨다. “나에게 아이 좀 안겨주게나”하고서 몽당팔로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애 잘 키우시게”라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할머니와 이인삼각二人三脚이 되어 29년을 하루처럼 할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모셔 효부상孝婦賞을 받으셨다. 아버지는 할머니를 어머니께 맡겨두고 외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함에도 자기가 가야 할 길을 말 없이 걸어가는 어머니를 사람들은 요조숙녀窈窕淑女라 불렀다.

구도로와 신작로가 갈라지는 그 가운데 위치한 100평의 채소밭이 있었다. 어머니는 고추와 가지, 상추와 시금치 등 온갖 채소를 가꾸며 시름을 달랬다.

그곳에 집 짓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목수들의 점심과 새참을 나르셨다. 그런데 이 집이 아버지 소실의 집이란 사실이 드러났다. 어머니는 얼마나 분하고 절망하셨을까. 집이 준공됐다. 집 둘레를 담장을 치고 요정을 했다.

담장 밖에 남은 20평의 3각형 자투리땅에 여전히 채소를 가꾸시던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하셨을까! 말없이 삭이시던 분노가 가슴앓이 병이 되었다. 발병하면 통증이 치솟아 방바닥을 헤매셨다. 나는 차마 볼 수 없어 “하느님! 어머니의 고통을 저가 대신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어머니는 시부모 삼년상을 치르고는 며느리에게 살림을 맡기고 고향을 떠나셨다. 세월이 한참 흘렀다. 소실이 탕약을 갖고 어머니를 찾아왔다. 내키지 않지만 반갑게 맞이했다. 소실이 돌아갈 때 어머니의 “또 오시게”란 말씀에 “젊었을 적에 애를 태워드린 이 년이 무엇이 예쁘다고 또 오라고 하시오”란 소실의 답변에 “이제는 증오도 원한도 다 사라지고 내 가슴은 휑 비어있네”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몇 년을 지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이번 귀향 때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어릴 적 뛰놀던 이 골목 저 골목을 돌아보았다. 동네는 옛 그대론데 옛사람들은 찾아볼 수 없다. 세월은 흘러 그때 그 어르신들은 세상을 모두 떠나신 지 오래됐다. 내 친구들마저 거의 세상을 떠났다. 겨우 예닐곱만 남아있으나 거동이 불편해 만나기조차 어렵다. ‘내 어이하다 세월을 붙잡아두지 못했던가!’라고 탄식이 절로다.

어머니의 삼각형 자투리땅 꼭짓점에 뜻밖에도 효도 비석이 서 있다. 이럴 수가! 깜짝 놀랐다. 이곳에 효도비가 서다니! 어머니의 한恨이 서려 있는 장소다. 효도비가 이곳에 세워진 것이 우연일까. 아니다. 원한에 사무친 어머니의 넋이 이곳에 찾아오신 것 아닐까.

내가 태어난 곳은 구도로 북녘 하동읍내동 381번지이고 효도비가 서 있는 위치는 맞은편 구도로와 신작로 분기점 334번지이다. 지금은 지번이 변경되었는지 모르지만.

부용동 이장을 찾아 효도비를 건립한 연유를 물어봤다. 효가 모든 행위의 근본이라는 명심보감을 인용해 부용동 마을이 효도 마을이 되기를 기원해 마을 초입에 건립했다고 했다.
 
나는 효도비를 어루만지며 “하느님! 이승에서 가슴앓이하셨던 어머니께 하늘나라에서는 영원한 안식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부용마을

孝百行之本

서기 2015년 12월 22일 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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