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빈 도서출판 귀거래사 대표(前주일한국대사관 해양수산관‧국토교통관)

김연빈 대표
김연빈 대표

1.

지난 15일 저녁 김인현 교수로부터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막 출간되어 아직 시중에 유통되기 전인『김인현 교수의 해운산업 깊이읽기』(법문사). 김인현 교수가 작년 9월부터 6개월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学)에서 보낸 안식학기 중에 기고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김 교수는 이번 일본에서 보낸 연구 활동을 통해 일본에서는 업계 사람이나 실무자들이 자기 분야의 전문지식이나 관심 있는 사항들을 연구하고 정리해서 얇은 단행본으로 발간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보고 이를 도입하고 실천하는 의미에서 이 책을 발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것에서 일본의 집단지성의 힘을 느꼈다고 한다.

세 시간 정도면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현혹되고 일부는 그 동안 페이스북 등을 통해서 소개된 글이기도 해서 이튿날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세 시간보다는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다. 김 교수에게 불평을 했더니 법률분야가 나와서일 것이라고 했지만 아마 나의 독서력이 많이 부족해서일 것이다.

‘깊이읽기’라는 책 제목과는 달리 책의 분량이 작고, 작아 보이는 책의 분량에 비해서는 다루고 있는 내용이 무게가 있다. 일본 해상법(海商法. 상법 해상편) 개정내용을 소개하는 부분은 새롭고, 한국 해운 선진화를 위한 제안에는 저자의 일생의 연구 성과가 녹아 있다. 저자는 우리 해운분야의 몇 가지 고정관념을 열거하고 이것을 뛰어넘어야 하는 이유와 그 대책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 저자가 열거하는 고정관념은 8가지나 되는데 대표적인 것은 “해운은 위험한 산업이다”는 것이고 “2000년대 호황 시 불황 대비책 부족에 대한 백서”를 발간하고 “함부로 고가의 선박에 투자하지 말도록” 하여 위험요소를 하나씩 하나씩 줄여나가자고 한다. 일본은 선박을 소유하는 선주사(owner)와 선박을 운항하는 운항사(operator)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 속에서 한진해운 파산의 실마리를 보여준다. 정기선해운 등 우리 운송기업이 종합물류기업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지적은 지당하고 시급하다.

주장하는 내용 하나하나에 이를 뒷받침하는 해상법 판례와 사례를 적절하고 친절하게 제시하고 있어 서술에 설득력이 있다. 부피는 작지만 내용은 충실하여 ‘해운산업 깊이읽기’라는 제목에 수긍이 간다. 덕분에 2019년 일본 해상법이 제정 100여년 만에 처음으로 개정‧시행되어 이제는 우리 해상법보다 앞서가게 되었으니 우리도 빨리 일본 해상법 개편내용을 반영하여 우리 해상법을 손질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하게 되었다.

2.

한 때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건설한 영국에서 선장(captain)은 최고의 존경을 받는다. 김인현 교수는 한국해양대학을 나온 외항선 선장 출신의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해상법 교수다. 학계에서는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지만, 어쩌면 해상법 교수로서는 가장 적합하고 특화된 자질을 갖추었는지도 모르겠다. 선장으로서 쌓은 다양한 국제항해 경험과 세계 물류 현장에서 체득한 실체적 지식이 한국 최고 수준의 고려대 로스쿨에서 그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지 않나 싶다. 이런 교수 아래서 해상법을 배우는 학생들은 행복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우리나라는 섬나라다. 국가경제가 수출입에 의존하고 있고 수출입 물량의 99.7%가 해상, 즉 선박을 통해 수송된다. 한일 간에는 많은 무역거래가 일어나기 때문에 일본의 해상법 개정은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저자가 우리 해상법이 일본의 해상법 개정 내용을 충분히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그 많은 무역거래와 해상운송 과정에서 크고 작은 사건사고와 분쟁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사건사고와 분쟁 속에서 이를 조율하여 당사자의 이익을 최대화하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활동하는 전문가들이 해사 전문 변호사라고 할 수 있다. 2007년 12월 태안 앞바다에서 발생한 허베이스피리트호 유류오염사고 피해보상 과정에서 최대 관점 중의 하나는 선주측의 책임제한 인정 여부였다고 생각한다. 선주측의 책임제한이 인정되느냐 인정되지 않느냐에 따라 피해보상(또는 손해배상) 범위가 작게는 약 50억 원에서 크게는 수천억 원으로 달라진다. 2008~2009년 당시 허베이스피리트호 대책반(TF)에 근무하면서 피해자인 어민측과 가해자인 선주측의 법리 공방이 치열했던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김인현 교수가 말하는 우리나라 해사 관련 법률시장의 현실은 그렇게 활발하지는 않는 것 같다. 싱가포르에는 해상법 전문 변호사가 200여명에 달하고 이웃 일본에서도 50여명 이상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40명에서 정체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해사 관련 법률시장이 좁으니 해사 관련 변호사가 적고, 해사 관련 변호사가 적으니 로스쿨에서 해상법을 가르치는 곳이 적고, 해상법을 가르치거나 전공하는 학생들이 적으니 변호사 시험과목에도 해상법이 없고, 변호사 시험과목에 해상법이 없으니 또 해상법을 가르치지 않고, 또는 역으로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 오래 전부터 거론되어 오던 해사법원 설치 문제도 부산, 인천 두 항만도시의 유치 경쟁 속에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독립된 해사법원이 없지만 중국은 이미 11개소의 해사법원을 갖추고 있다. 21대 국회도 개원하였으니 묵혀 있는 과제를 조속히 매듭짓기를 바란다.

3.

우리는 2016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글로벌 해운선사 한진해운이 파산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국가경제가 수출입에 의존하는 우리나라에서 한진해운의 파산은 엄청난 국가적 손실이다. 파산은 쉽지만 그만한 국제적 물류네트워크를 다시 갖추기는 쉽지 않다. 현대상선(2020년 3월 HMM으로 상호 변경)이 존망의 위기에서 살아남아 근근이 버텨주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해운산업 깊이읽기』에서 김인현 교수는 한진해운이 화물을 안전하게 정시에 화주의 손에 배달해주는 것에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운송인은 안전하게 목적항에 도착하여야 하는 기본적인 의무에 더하여 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화물이 화주에게 배달되도록 해주어야 한다면서, 해상법은 여기에 기여하도록 만들어지고 운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거 일본 국토교통성에서 연수할 때(1994.11~1995.4) 방문했던 도쿄 아오미(靑海)부두의 한진해운터미널은 대한민국의 자긍심이었다. 한진해운터미널은 도쿄항에서 가장 크고 가장 우수한 설비를 갖춘 컨테이너터미널이었다. 그 후 요코하마에서 공부하고 주일대사관에서 근무할 때도 아오미 한진해운터미널을 때때로 방문했다. 아오미 한진해운터미널은 도쿄를 방문하는 해운항만 물류관련 공무원들이나 업계 관계자들이 견학하는 필수 코스 중의 하나였다. 이것이 이제 남의 손에 넘어갔으니 그 아쉬움을 무엇으로 달래야 한단 말인가. 이런 아쉬움보다 더 큰 것은 대한민국 최고, 세계 최고급 국제해상운송 브랜드의 상실이다.

2019년 8월 『한진해운 파산백서』 (한국해운물류학회, 고려대학교 해상법연구센터)가 김인현 교수와 성결대학교 한종길 교수를 중심으로 해서 발간되었다. 2001년 국내 정기선사의 선봉이었던 조양상선의 파산에서 한국 해운업계와 정책당국은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도 김인현 교수의 이 작은 책자는 우리 해운산업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장기간에 걸쳐 500쪽이 넘는 대작을 만들려고 애쓰지 말고 일본처럼 학자나 연구자들이 습득한 지식이나 경험을 얇은 소책자로 발행하여 즉시즉시 공유함으로써 우리의 집단지성을 우리 해운산업 발전에 활용했으면 하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4.

1867년 5월 26일, 도쿠가와 막부 말기의 지사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6-1867) 등 해원대(海援隊)가 탄 ‘이로하마루’(160톤)가 세토내해(瀬戸内海)를 항행 중 기슈번(紀州藩) 군함 ‘메이코마루(明光丸)’(887톤)와 충돌해서 침몰했다. 다행히 이로하마루의 승조원은 메이코마루에 구조되어 무사하였으나 여러 번에 팔기 위해 싣고 있던 대량의 물자는 배와 함께 물고기 밥이 되고 말았다. 사카모토 료마는 당시 일본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 국제 룰인 ‘만국공법(萬國公法)’을 꺼내어 기슈번과 손해배상 담판을 벌여 83,526량(兩)(현재 가치로는 164억 엔, 약 1,800억 원 상당)이란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받아내게 되었다. 이것은 일본에서 기선끼리 발생한 최초의 해난사고이고 일본 해난심판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양측은 10월 19일 7만량의 배상금으로 화해하고, 배상금은 11월 7일 나가사키에서 지불되었는데, 8일 후인 11월 15일 료마는 교토에서 암살당했다. 메이지 유신 후 이 배상금 중 쓰고 남은 잔액이 해원대 경리담당이자 미쓰비시(三菱)그룹 창업자인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弥太郎)에 의해 미쓰비시상회(三菱商会) 설립자금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다.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의 소설 『료마가 간다(竜馬がゆく)』(한글 번역판은 『제국의 아침』, 박문수 옮김)에 나오는 이야기다. 미쓰비시상회는 일본 최대 선사 NYK의 전신이다. 오늘날 NYK는 미쓰비시그룹의 원류로 인식되고 있다. 사카모토 료마에 대한 사항은 홍승용의 『해양책략 2』(효민디앤피, 2019.12)를 참고하기 바란다. 충실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이로하마루의 배상금이 일본 3대 재벌 미쓰비시그룹의 창립자금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배상금은 사카모토 료마가 만국공법을 근거로 주장해서 받아낸 것이다. 그런데 최근 밝혀진 사실로는 이로하마루 충돌사고의 잘못은 오히려 이로하마루에 있었고, 1988년 발견된 이로하마루의 선체를 조사한 결과(2005년) 사카모토 료마가 이로하마루에 싣고 있었다고 주장한 총기류 400정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이로하마루 사건은 만국공법을 바탕으로 해결되었고 그 과정에서 만국공법에 해박한 사카모토 료마가 협상의 우이(牛耳)를 잡았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무역대국 대한민국의 무역거래 현장에서 발생하는 각종 사건사고와 분쟁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지위에 서기 위해서는 해상법에 정통해야 하고 해상법에 정통한 유능한 해상법 전문 법률가들이 많이 양성되고 활약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내의 열악한 해상법 교육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김인현 교수가 귀중한 안식학기를 관계도 좋지 않은 호랑이굴 일본에 들어가 거둔 성과를 집단지성의 한 방법으로 표출한 이 작은 책자가 해운산업 현장에서 활약하는 사업 관계자와 해상법에 관심을 갖고 있는 젊은 법률가 여러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되었으면 하는 뜻에서, 그리고 앞으로 젊은 법률가들이나 법률가 지망생들이 해상법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뜻에서 익숙하지 않은 독후감을 쓴다.

우리 대한민국에도 세계의 선사와 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는 견고한 글로벌 해운선사가 양성되기를 바란다.

202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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