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병 경영학 박사(한국국제상학회 이사,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팀장)

이기병 박사
이기병 박사

부산에 가면 ‘수미르’ 공원이 있다. 물 수(水)자와 용(龍)을 뜻하는 우리말 미르의 합성어다. 용이 노는 물가 공원을 상징하고 부산항 발전을 기원한단다. 수미르공원에서 2011년 8월 24일부터 우키시마호 폭침으로 비명횡사(非命橫死) 하신 분들의 명복을 비는 위령제 행사가 개최됐었다. 공원 바닷가 한쪽에는 우키시마호를 본 뜬 위령비가 있다. 높이 170㎝, 너비 160㎝의 석재 조형물이다. 한국인 징용자들을 태운 우키시마호는 별다른 이유 없이 폭침됐다. 한국인 524명, 일본군 25명 등 549명이 사망하고 많은 이들이 실종됐다.

부산은 바쁘다. 낙후된 도심 재생과 국제 해양거점 확보를 위해 북항 재개발 사업이 한창 중이다. 수미르공원도 부두 공사를 한다. 막막하지만 위령제와 위령비도 이젠 다른 곳으로 번거로운 짐을 싸야 한다.

여객선 사고 중 가장 큰 참사는 많은 이들이 타이타닉호를 떠올리지만 사실 필리핀 선박 도나파즈호 침몰사고다. 도나파츠호가 유조선과 충돌해 4341명이 죽고 겨우 26명이 생존했다. 두 번째는 중국 키앙야호 사고로 3920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일본군이 설치해 놓은 기뢰에 부딪혀 많은 인명 피해를 낳았다.

우리는 어떤가? 푸른 물결 위에 299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가 있다. 세월호의 과거 평행이론인 ‘서해훼리호’ 참사를 통해서도 292명 생명의 불꽃들이 사그라들었다. 두 사고 공통점 중 하나는 과적과 관리·운항 규정을 지키지 않은 ‘전형적인 인재’다.

해양선박 사고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사전 예방할 수 있음에 불구하고 대형 피해가 발생한다. 둘째, 사고 사례를 보면 결국 사람으로 인한 인적 오류가 대부분이다. 셋째, 사고 진행 과정에서 초기에 대처할 수 있었는데 결국 대형사고로 이어진다. 넷째, ‘될 대로 돼라’, ‘케세라 세라(Que Sera Sera)’다. 다섯째, 침몰과 전복이 발생할 경우 사망자가 많다. 특히, 침몰은 사망률이 높다. 침몰은 사고 진행 속도도 빠르고 구조도 힘들다. 세월호도 서해훼리호도 그랬다.

흔히들 ‘하인리히의 법칙(Heinrich's law)’이라 부른다. 큰 사고가 발생하기 전 수십 차례 가벼운 사고와 수백 번의 징조들이 반드시 나타난다는 것이다. 평소엔 이를 외면, 착각, 아니면 될 대로 돼라고 여긴다.

여기 이미 헤어진 연인이 있다. 어느 한쪽은 지금의 ‘이별 상태를 아직도 사랑 중’이라 생각한다. ‘착각도 유분수다’. 이런 착각이 선박에서 발생하면 엄청난 비극을 낳는다. 사고에서 우연은 없다. 케세라 세라의 속뜻은 “일어날 일은 언제든 일어난다”였다.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지상의 낙원’이라 불리는 섬나라가 있다. 관광과 어업이 주요 산업인 인도양의 ‘모리셔스 공화국(Republic of Mauritius)’이다. 멀쩡한 이 나라에 느닷없이 “와이파이를 잡기 위해서”라는 희한한 이유로 연안에 접근, 암초 충돌로 배가 좌초됐다.

일본 선박 ‘와카시오호’다. 온 나라가 대규모 기름 유출 사고로 해안가가 시커멓게 물들었다. 검은 기름띠가 생겨 이를 걷어내기 위해 국민들 머리카락까지 수집 중이다. 일본 정부는 6명의 전문가를 파견했다.

2007년 서해안 태안 기름유출 사고도 최악의 해양오염 사고였다. 검은 타르 덩어리로 뒤덮인 성난 바다는 전국에서 모여든 123만 명의 봉사자 손길이 달래주었다. 지금 서해안 만리포해수욕장은 '만리포니아'로 불리며 많은 서퍼들이 찾고 있고 자원봉사자들을 기념하는 상징탑도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뜻하는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은 이젠 필수 조건이다. 사회가 있어 기업이 존재한다. 흔히들 사회적 책임이라 하면 일차적으로 기부, 자선, 환경보호 등 사회공헌 활동을 떠올리지만, 그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기업 본연의 역할에 충실함이다.

해운·물류는 산업 그 자체가 국제 경제의 혈관 역할을 한다. 원유·천연가스를 비롯한 우리 사회 각종 필요한 물자를 안전하게 수송하는 게 사회적 책임의 실천이다. 만약 이를 제대로 운송하지 못하면 국가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해운·물류 산업 자체가 중요한 인프라이고 특히, 한국은 선박을 통한 수출입 물량이 커서 안전하고 적기에 운송하는 그 자체가 사회적 책임의 참다운 실현이다.

조선업 역시 조선소란 공간을 통해 인력·장비가 집중돼 있어 지역사회와 상생하는 게 중요한 사회 공헌 활동이다. 하지만 더 근원적인 것은 책임감을 느끼고 안전한 배를 만드는 것이다. 비근한 예로 중국에서 건조한 LNG선 ‘글래드스톤호’가 2018년 호주 앞바다에서 고장으로 멈춰 섰다. 막대한 천연가스 구매력을 앞세워 선박 발주를 수주했지만, 바다 위에 둥둥 뜬 미아가 됐다. 역시 싸고 좋은 것은 없단 말인가? 글래드스톤호는 고장 원인도 파악 못 해 미치고 환장한 마음에 제대로 수리도 못하고 결국 폐선됐다.

가까운 일본은 어떤가? 글래드스톤호 보다 한술 더 떠 세계 조선업에 길이길이 남을 선박은 ‘컴포트호’다. 2013년 6월 17일 싱가포르에서 사우디로 가던 선박이 선체 중앙부에 균열이 발생해 곧바로 두 동강이 나 침몰했다. 선체의 종강도가 부족하여 컨테이너 무게를 견디지 못한 것이 주요 원인이다.

어찌 됐든 “돈 벌면 장땡!”이란 생각은 ‘장사꾼 전략’이다. ‘스마트 시대’에 이윤 추구를 위해 본업에 충실하지 않고 기업의 목적과 본질을 저버리는 회사는 오늘은 살지 몰라도 내일은 장담할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조직이 꿈꾸는 지속 가능한 경영은 적어도 목적의식이 충만해야 그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해양사고를 줄이기 위해선 작업자 태도 변화와 안전의식 함양이 필요하다. 동시에 근로조건 개선과 전문지식 축적, 그리고 혁신이 요구된다. 기업의 성공이 혁신적인 제품 출시나 첨단 기술 개발로도 이뤄지지만 사람 관리를 통해서도 창출할 수 있다.

그래서 의사 결정 구조, 조직구성과 문화, 인재 양성을 통해 조직에 창의성을 불어넣는 ‘관리적 혁신’이 필요하다. 사장님 말씀 열심히 수첩에 잘 받아적고 이쁜 보고서 작성하는데 야근하고 PT 발표 잘하는 게 일 잘하고 좋은 성과를 만드는 관리시스템이 아니다.

아마존, 페이스북, 애플, 넷플릭스 등 돈 잘 버는 글로벌 기업들은 그래서 이런 시스템을 버렸다. ‘제로 PPT(Zero PowerPoint)’를 펼치고 효율적인 ‘권한위임(Empowerment)’을 중요시하고 있다.

본사 중심의 통제가 강하고 수직적인 한국의 기업문화가 빨라진 경영환경 속에 보다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일례로 어떤 가게에선 매장의 자리가 많이 남아도 반드시 사람 수에 맞게 음료를 주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분위기상 나가야 하는데 오늘의 한국엔 아직도 이런 카페들이 있다. 사장이 종업원에게 그렇게 지시하며 자리를 비우고 일하는 사람은 이를 충실히 이행한다. 현장을 배제한 ‘만기친람(萬機親覽)’식 의사 결정은 ‘정관정요(貞觀政要)’에 나오는 당나라 때면 족하다.

선박도 선장 중심으로 신뢰를 바탕으로 공식적인 권한위임이 이뤄져야 한다. 이런 사항들이 적절히 구성되지 못하면 세월호 사고처럼 무늬만 선장이 있고 본사 공무팀 지시에 충실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실세 기관장이 생기게 된다.

‘사람이 화가 나면 눈에 뵈는 게 없다.’, ‘터널 비전(Tunnel Vision)이다.’ “터널만 보이고 주변은 제대로 못 보는 현상”을 말한다. 본디 배는 육상 운송수단과 달리 위험성과 고립성이란 해상의 특수성을 갖고 있다. 선박이란 고립된 공간 속에 업무 재량권, 상사와의 인간관계, 업무갈등이 커지면 비합리적인 몰입강화가 커진다. 결국, 상식은 멀어지고 사고는 가까워진다.

특히 요즘 같은 코로나19로 인해 선원 교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정신적·육체적 갈등이 더 증폭되고 있다. 차질 없는 선박 운용도 중요하지만, 해양사고 예방은 선원 관리와 직결된다. 사업 성공의 핵심요소로 인식해 더욱 세밀한 인사관리가 필요한 시기다.

절단된 컴포트호를 만든 조선사는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이었다. 군수산업의 대명사로 세계 최대 전함 ‘무사시호’와 가미카제 자살 공격과 진주만 폭격 때 사용한 ‘제로센’ 전투기를 만든 기업이다. 지금은 해상자위대 이지스 구축함도 만들고 “악몽의 떠다니는 코로나 바이러스 배양접시”란 오명을 얻었던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크루즈선도 제작했다. 부가가치 높은 크루즈선 만들겠다고 덤벼들어 2조원이 넘는 엄청난 손실을 봐 일본 조선업계를 위축시키게 했다.

우리에겐 여러 가지로 익숙한 기업이다. 조선인 강제동원을 가장 많이 한 기업으로 약속한 임금도 제일 많이 주지 않은 체납 사업주다. 최근엔 우리 법원의 배상책임을 외면해 한국내 미쓰비시 중공업 자산들의 압류절차가 진행 중이다. 해당 기업으로 묵묵부답 침묵의 마스크를 쓰고 있다.

한국 조선업의 홍보 대행 기업이기도 하다. 괴상한 배를 만들어 바닷 속에 두 동강이내 침몰시켜 한국 조선업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간접적으로 널리 알렸다. 게다가 설계 역량 부족, 기자재 적기조달, 최신 유행의 인테리어 반영 등 우리가 풀어야 할 크루즈선 건조 숙제를 직접 실천해서 보여 준 ‘반면교사(反面敎師)’ 이기도 하다.

사회의 혜택을 받는 기업은 법적, 경제적 책임외 우리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한다. 결과적으로 ‘선행추구’는 이미지와 평판 개선에 도움이 돼 기업 성과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무엇보다 본업에 충실하고 단순 이벤트성이 아닌 진정성과 좋은 목적을 갖는다면 그 자체가 전략적으로 괜찮은 사회적 책임의 실현이 된다.

덧붙여서 지역사회 요구와 비즈니스 기회가 연계되면 ‘공유가치 창출 CSR(Creating Shared Value)'이 된다. ‘아이 낳고 싶은 대한민국’ 만들기나 해양 생태계 보호를 위한 ‘바다 가꾸기’ 등이 그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법적 책임도 팔짱 끼고 있는 전범 기업에 사회적 책임을 운운하는 것은 순진한 이야기 일수 있다. 다만, 이 지면을 통해 그들이 뭉개고 있는 역사적 사실에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고 단 한 사람이라도 몰랐던 현실을 이해하고 공감해 준다면 필자는 나름의 위안이 된다.

헤어진 연인은 통상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별을 인정하여 착각에 빠지지 않고 헤어짐의 인과 관계를 냉정히 분석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어느 역사학자가 말했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 역사의 목표가 “과거 사건·현상과 현재의 인과 관계 파악을 통해 배울 점과 경계할 점을 찾고, 미래의 길을 탐색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요즘 마스크를 쓰면서 새로운 침묵 방법을 배웠고 역사를 통해 과거를 알고 다가올 미래를 가늠할 수 있다. 2017년 일본과 한국의 세전 이익 대비 사회 공헌 지출비율은 한국 2.2%, 일본 0.9%다. 2018년 GDP 대비 연구개발 비중은 한국 4.81%, 일본 3.21%다. 적어도 이 2가지 비율은 한·일 간 간격이 계속 커지길 바라고 일본은 사회적 책임 비율은 낮더라도 모리셔스 문제엔 적극적으로 나서길 바란다. 온 나라가 지금 기름유출 때문에 ‘총리 퇴진’ 운동을 벌이고 야단법석인데 참으로 많이 보낸 전문가 6명은 얼마만큼 역할을 해 줄지 궁금하다. 적어도 내가 본 용변과 내가 버린 쓰레기는 내가 줍고 뒤처리하는 게 세상사 이치고 이런 건 우리 집 아이들도 잘한다.

아베 총리가 물러났다. 역사 왜곡, 강제동원, 수출규제 등 다방면에서 몽니를 부렸다. 그러나 한국소재·부품·장비산업 체질 개선에 촉진제 역할을 해 준 점은 우리 경제의 엑스맨(X-Man)이었다. 미쓰비시 중공업도 지금보다 더 한국 조선업의 홍보대행사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 주길 부탁한다. 우리 역시 이 기회에 일본에 의존했던 산업들이 자립심을 키우고 `역사학적 사고 근육`을 살찌우는 계기로 활용되면 괜찮을 법 싶다.

해양 대참사는 전시와 평시로 구분된다. 1937년 진수된 우키시마호는 원래 정기 여객선이었으나 1941년 일본 해군에 수송선으로 징발됐다. 8·15 광복 후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경 폭발됐고 이 시기는 평시 체제에 속한다. 귀국선 제1호인 우키시마호를 타기 위해 조선인들은 희망의 꿈을 안고 구름처럼 모여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국내 생존자들 일부는 그래서 1만 2천 명 승선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일본 정부는 미군이 설치한 기뢰에 접촉해 우연히 발생한 사고라고 주장한다.

1954년 배의 선체를 건져 올렸다. 한국 전쟁 때 필요한 철강을 수출하기 위해서였고 그 이후 선체는 사라졌는데 배 안 밑바닥 쪽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단다.

우키시마호 폭침 희생자 위령제는 필자가 몸담고 있는 재단에서 운영하는 부산에 있는 ‘국립 일제 강제동원 역사관’에 짐을 풀었다. 정부의 코로나19 방역 시책에 따라 초청 인사 없이 내부행사로 조촐하게 작은 위령제를 봉행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좁디좁은 배 안 세상에 아무런 이별도 없이 덜커덕 홀로 떠나기가 힘드셨나 보다. 못내 아쉽듯 한 비다. 오늘 내린 빗물은 하늘 끝에서 흘린 눈물인지 싶다.

2020년 8월 24일 오후 5시

lgb146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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