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인현 

김인현 정책자문위원장
김인현 교수

한국해운과 해법에 지대한 공헌을 한 배병태 박사께서 지난 2월 영면하셨습니다. 1932년 태어난 박사님은 호남의 명문인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하시고 1950년 한국해양대에 7기로 입학하여 졸업 후 해운업계에 천착하셨습니다. 박사님께서는 한국해양대학교 교수, 해운산업연구원(현 KMI) 원장, 해난심판원 심판관, 한바다해운 사장, 한국해법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 해운과 해법의 기틀을 마련하셨습니다. 영면소식이 늦게 서야 알려져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했습니다. 

저는 배박사님과 한국해법학회를 통하여 인연을 맺고 활동을 같이 했습니다. 한국해법학회 회장직에 계실 때 저의 지도교수이신 채이식 교수께서 상무이사를 하셨습니다.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1996년경 지도교수님을 도와주는 가운데 배박사님을 처음으로 뵙게 되어 반갑게 인사를 드렸습니다. 

2000년에 해사문제연구소에서 해운물류 큰 사전을 편찬하는 작업을 진행하였었습니다. 배박사님께서 법률분야에 합류하라고 저를 부르셔서 배박사님과 제가 사수와 조수의 관계로 5년 정도 편찬작업 일을 했습니다. 이 작업은 해운, 항해, 법학 등으로 약 10명이 참여했습니다. 이준수 학장님, 민성규 교수님, 허일 교수님등도 참여하였고, 당시 제가 40대 초반으로 최연소였습니다. 아직 초학자였던 저는 배박사님으로 부터 많은 공부를 배웠습니다. 여름과 겨울에 강원도 평창 등에서 1주일 정도 합숙을 하며서 작업을 했는데 배박사님을 포함한 대선배님들로부터 학문적인 지도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 후 저의 학문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박사님은 모르셨겠지만, 저는 이미 한국해양대학교 1학년 때부터 박사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한국해양대 학생들이 KOMASA라는 공부모임을 만들었습니다. 한국해사문제연구소의 설치에 자극을 받은 학생들이 해운과 해상법 두 개 분야를 두고서 학생 해사문제연구소를 운영한 것입니다. 저는 법률분과에서 활동을 했는데, 법률분야 지도교수님이 배박사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배박사님의 연구실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책으로 가득했던 배박사님 연구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 이듬해에 배박사님이 한국해양대학교 교수직을 그만두게 되어서 교내에서 배박사님을 더 이상 뵙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진작 수업은 듣지를 못하여 무척 아쉬었습니다. 그 당시 배박사님은 연세대 법학박사이시면서 학사편입까지 해서 정통해상법을 공부한 분으로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4학년이 되자 해상법과 국제해상운송법 강의가 개설되었는데, 마침 1977년에 발행된 배박사님의 주석 해상법을 가지고 공부를 하게 된 인연이 있다. 

회장을 그만두시고도 명예회장으로서 한국해법학회를 잘 이끌어오셨습니다. 한국해상법의 발전을 위하여 표준서식이 있어야한다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이의 실현을 위하여 상사중재원을 움직여 한국해사표준계약서 편찬을 주도하셨습니다. 

배박사님은 세가지 점에서 한국해법에 큰 족적을 남기셨습니다. 

첫째는 한국해법학회를 창립하신 일입니다. 1978년 서돈각, 손주찬 교수 등 상법교수님들과 박현규 등 실무자들을 규합하여 한바다호에서 창립총회를 마쳤고 그 해법학회가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둘째는 1991년 상법개정작업을 주도적으로 했다는 점입니다. 회의록을 읽어보면 서울대의 송상현 교수와 대립각을 세우면서 실무의 입장을 반영하려는 노력이 구구절절입니다. 

세 번째는 “주석 해상법”이라는 해상법의 바이블과 같은 저서를 1977년에 편찬하신 점입니다. 이 책은 1980년, 1990년대 해상변호사들이 해상 일을 처음 시작할 때 지침서로서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 뒤에 여러 책의 해상법 단행본이 나왔지만, 배박사님의 책만큼 공이 많이 들고 외국의 법례까지 조사하여 종합적으로 기술한 책은 아직 없다고 판단됩니다. 

해법학회 3대 회장(1992-2000)을 그만두시고서는 신년교례회 등에 참석하시어 후배들을 지도해주시었습니다. 최근 몇 년간 몸이 편찮으시다는 말씀은 듣고도 병문안을 하지못한 채로 이렇게 갑자기 영면소식을 듣고 나니 죄송스런 마음이 가득합니다. 직접 문상도 하지 못하여 더욱 송구합니다. 

미국에서 교수이신 두 번째 따님과 통화가 되었습니다. 박사님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물리학 박사로서 서울대 교수임용이 결정되었던 큰 따님이 2000년대 초반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일이 있었습니다. 둘째 따님의 말씀으로는 따님이 세상을 떠나신 몇일 내에 위에서 말씀드린 해운물류 큰 사전의 편찬작업을 강원도에서 하였는데, 여러 훌륭한 사람들이 단체로 작업을 하기 때문에 가정일로 불참을 하면 안된다고 하시면서 박사님께서 합숙을 위하여 집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사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이 상당히 섭섭해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를 통하여 배박사님이 한국해법이나 한국해운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2002-2003년 경일 것으로 판단됩니다. 당시 저희들은 그런 내용을 몰라서 위로의 말씀도 드리지 못한 것이 부끄럽습니다. 따님께서도 해상법과 해운을 위한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게 하는 일화라고 하면서 저에게 소개를 해주셨습니다.

해상법학자는 일반법대 출신과 해기사출신들로 구분이 됩니다. 배박사님은 실무를 체험한 해상법학자로서 해상법이 상아탑에 머물지 않고 현실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해운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게 노력하셨습니다, 이제 박사님께서 유지로 남기신 한국해법의 발전은 이제 저를 포함한 해상법 제3세들의 몫입니다. 최근 로스쿨 제도가 생기면서 해기사들이 20명이상 법조인으로 진출하였고, 해사법원의 설치도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로스쿨 제도하에서 해상법 교수의 숫자가 오히려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는 등 풀어야할 숙제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박사님께서 언제나 그러하셨듯이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면서 가일층 노력하여 한국해법이 세계 속에 우뚝 서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디 영면하시기 바랍니다. 

2021년 3월 12일 

교수 김인현(전 한국해법학회 회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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