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병 경영학 박사(한국국제상학회 이사,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팀장)

이기병 박사
이기병 박사

람보(RAMBO) 4,더 레이디(The Lady), 콰이강의 다리(The Bridge on the River Kwai)의 공통점은? 미얀마(Myanmar)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람보는 미얀마에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민간인을 학살하는 군부를 상대로 싸워 외국 봉사단원들의 구출 작전을 펼친다. 더 레이디는 미얀마의 지도자 아웅산 수치 여사의 삶을 프랑스의 뤽베송 감독이 만들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콰이강의 다리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버마 철도 건설을 주제로 하였다. 이 영화는 "문화, 역사, 미학적으로 중대한" 평가를 받아 미국 국립영화 등기부에 보존되기도 하였다.

미얀마의 예전 국가명은 버마(Burma)였다. 미얀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버마족의 이름이었으나 영국 식민지의 잔재이며 다른 소수 민족을 아우르지 못한다면서 미얀마로 국호를 변경했다.

필자는 미얀마를 방문했었다. 그중 몇 가지 기억나는게 미얀마의 랜드마크이자 불교도들의 정신적 지주인 쉐다곤(SHNEDAGON PAGODA)이다. 쉐는 황금, 다곤은 언덕이란 뜻인데 반드시 맨발로 입장해야 하며 물가 대비 꽤 비싼 입장료를 지불했는데 그마저도 몇몇 명승지 외에는 미얀마는 국토 대부분을 외국인에게 개방하지 않는다.

미얀마의 금융도 인상적이었다. 저축자에 대한 보호제도가 마련돼 있지 않아 은행 파산 시 보호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예금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은행 대출은 일종의 특혜적인 측면에서 소수만적용받고 예금 금리는 10% 이상의 고금리였다.

그러나 은행 투자 방법은 현지 친인척 명의를 이용하거나 미얀마 국민의 명의를 사서 거래한다. 그 당시 필자의 가이드는 한국인이었는데 그의 아내는 현지인이라 이자 재테크 수입이 쏠쏠하고 환율변동과 환전으로 가이드 수입도 괜찮다고 자랑했었다.

그러면서 미얀마에서 군부의 위상을 말해주었는데“치안 관련 국방·내무·국경경비 부처의 관할권을 군부에 부여해 정부를 견제하고 있다. 또한, 상·하원 의석 25%를 군부에 할당하도록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면서 미얀마 사회 근간은 불교와 군부라는 그의 말에 절로 고개를 끄떡거렸던 기억이 난다.

‘Logistics’은 군대 물류를 의미하는 병참이란 어원에서 유래되었다. “온·오프라인 물류 전쟁”, “물류를 잡는 자 고객의 마음을 잡는다”라는 다양한 물류 관련 표어들이 요즘 들어 새삼 어색하지도 않다. 물류 애로는 경제의 동맥경화와 같고 그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다. 기업과 군대, 국가의 경쟁력 측면에서 물류의 비교우위는 번영과 생존의 관건이 되는 시대다.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은 능력 있고 똑똑한 군인들은 전투부대로 보냈지만, 미군은 군수 물자 보급부서로 배치했다. 미군은 병참이 전쟁의 승리를 결정한다고 중요시했고 이를 신봉하여 보급 차질이 없도록 했었다.

나폴레옹이 말했다. “군대란 배가 불러야 움직인다.” 미군은 확실히 알았고 일본은 제대로 몰랐다. 일본이 1942년 1월부터 버마에 파견한 육·해·군 병력은 23만 8천명으로 이 중 16만 7천명, 약 79%가 전사했다. 임팔전투(Battle of Imphal)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임팔전투는 그 옛날 징키스칸의 전략인 ‘약탈 보급’ 방식을 취했다.

"보급이란 원래 적에게서 취하는 법이다”는 징키스칸 방식은 더 통하지 않았다. "보급을 적에게서 탈취한 것으로만 충당하려고 하면 망한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가 임팔전투였다. “일본인은 원래부터 초식동물이다. 이렇게나 푸른 산에 둘러싸여 있으니, 식량이 부족하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식량은 자동차 대신 소나 말에 싣고 가다가 포탄을 다 쓰면 필요 없어진 소나 말을 먹으면 된다.” 보급과 병참을 깡그리 무시한 일본군은 임팔 지역에는 단 1명도 도착하지 못했고 3만 명의 병사가 죽고 4만 명이 부상하는 일본군 최악의 처절한 패배를 당한다.

패전을 거듭하는 일본군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한인 병사들은 강제동원되어 파견되었다. 많은 한인은 영국군과의 전투, 풍토병, 굶주림에 의해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옛날 명품 드라마였던 MBC 여명의 눈동자를 보면 주인공 최재성이 일본군에 징집당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전투가 임팔전투였다. 당시 일본군이 먹을 게 없어 뱀을 먹고 인육을 먹는 장면이 화제였는데 이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조선에서 3800km나 떨어진 버마 전선에서도 조선인 군인, 군속, 위안부들이 희생을 당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미얀마 양곤(Yangon)시 코리아센터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추모 위령탑의 높이는 5m. 기도하는 두 손 모은 형상에 나비를 붙여 편안한 승천을 기원하였다. 좌우 너비 10m의 벽면에는 초가집을 배경으로 혜초 스님의‘망향가’와 노천명 시인의 ‘망향’을 새겨놓았다. 필자는 이 추모비 건립 때문에 몇 해 전 미얀마를 방문했었다.

버마지역에 강제동원된 한인 병사는 약 5천 명으로 고국으로 귀환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생환율이 낮은 이유는 병참과 보급을 무시한 무모한 침공을 한 일본군의 작전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전투보다 풍토병과 기아로 인한 희생이 컸었다.

버마를 점령한 일본군의 모욕과 학대가 날로 심해지면서 강제노동이 횡행했고 쌀 생산이 줄면서 민생은 어려워졌다. 연합군의 반격과 미얀마인들의 일본에 대한 민심이 떠나면서 결국 일본군은 항복하고 말았다.

전쟁과 강제동원의 피해, 민주주의 위기에 처한 미얀마를 보며 우리와의 동병상련에 애잔함이 묻어난다. 달랠 길 없는 한인들의 망향의 한과 최근 미얀마 사태로 인한 무고한 시민들의 원통과 슬픔의 아픈 마음 때를 코리아센터 내 추모비가 많이 묻어냈으면 좋겠다.

‘방금 판 우물에서는 깨끗한 물을 기대하지 말라.’ 미얀마 속담이다. 시간이 얼마큼 걸릴지는 모르나 지금의 고통이 뒷날 민주주의로 가는 뼈아픈 진통이었다고 기록되길 소망한다. 반드시 언젠가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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