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서간집 발간을 포기하다니! 참 아쉽구나

耕海 김종길
耕海 김종길

2016년부터 지금까지 5년간 너희들이 보낸 이메일은 지우지 않고 컴퓨터에 담아두었다. 500편이 넘었다. 답장들을 합치면 무려 1,000편이 훨씬 넘었다. 그것들을 읽는데 꼬박 열흘이 더 걸렸다.

2016년 전엔, 메일들을 프린트해서 파일로 보관했다. 표지에 <영국통신>이라 기재된 것이 5권, 뒤를 이어 <미국통신>이 3권이었다.

내가 노르웨이에서 공부하다가 1975년 겨울방학 때 영국에 처음 갔다. 고생 창연한 대영제국박물관과 윈저궁, 옥스퍼드대학과 지하철 등을 둘러보고 유니언잭이 지구의 하늘에 해가 질 날이 없이 휘날렸었던 대영제국의 위용에 감탄했다.

그런 영국으로 유학을 간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대학원과 군복무까지 마쳤는데도 어린아이를 물가에 내보낸 듯 걱정되었다. 밥은 제대로 먹는지, 잠자리는 편한지, 공부는 잘하는지를 궁금해 사흘이 멀다고 이메일을 했다. 그것도 모자라 런던에 있는 후배들에게 부탁까지 했다.

그러다가 너희들이 결혼하고선 신부인 네가 1999년 1월 7일 첫 메일을 보내왔다. 신접살림에 전념하며 신랑이 학교에 간 후엔 청소와 빨래를 하고 시장을 보는 일 등을 소상하게 이메일에 담았다. 낯 설은 외국에서 외로움을 타지 않고 가난한 유학생의 아내로서 현실에 잘 적응하며 희망찬 신혼생활을 하는 네가 고맙고 미더웠다.

만삭의 몸으로 한국으로 돌아와 내 첫 손녀 다슬이를 해산했다. 세상엔 손녀가 내밖에는 없는 듯 동네방네 자랑했다. 듣기가 역겨웠던지 “자랑하려면 돈 내고 하세요”란 핀잔을 들었다. 그러나 말거나 계속 자랑했다.

백일을 지내고서 제 아비 곁으로 돌아갔다. 다슬이가 눈에 밟혀 참고 견디다가 첫돌에 영국엘 갔다. 돌잔치를 하고서 며느리가 고생한 보상으로 이탈리아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

내 부부와 아들 내외가 다투어가며 다슬이를 품에 껴안고 피렌체와 베네치아, 나폴리와 로마를 관광했다. 로마제국의 역사와 르네상스의 찬란한 문화를 주마간산으로 보았다.

뜻밖에도 베드로 광장에서 요한바오로2세가 집전하는 성인 시성식에 참석했다. 천상의 장엄한 잔치에 참석은 우리 가정의 행운이었다.

아비가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3년을 머물다가 둘째 다해가 갓 돌을 지나고서 미국으로 떠났다. 며느리와 이메일은 다시 계속됐다. 미국에서 셋째 손녀 다함이가 태어났다.

딸 셋을 양육하는 고달픔과 남편과 아슬아슬한 갈등을 친정어머니께나 투정하듯 시아버지인 나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나는 딸아이의 응석인 양 다독거렸다.

아들 가족을 보내놓고서 손녀들이 보고 싶었으나 3년을 참다가 미국엘 갔다. 한국에서 초등학교 4개월을 다니다가 가서 영어를 알아듣지도 못했는데 어미가 열심히 가르쳐 최고우등상을 받은 다슬이 초등학교를 방문했다.

여름방학이라 교문이 닫혀있는데 작업복을 입은 분이 교문을 열어주었다. 인부인 줄 알았는데 교장선생님이셨다. 당직을 겸해 공사감독을 하시는 교장선생님이 존경스러웠다. 학교를 안내해 주시고는 마지막으로 확장공사를 하는 컴퓨터실을 보여주시며 다음 학기엔 전교생이 컴퓨터를 할 수 있다고 하셨다.

교장선생님이 다슬이에게 “할아버지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컴퓨터를 사주실 것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컴퓨터가 교육에 지장이 있을까 봐 망설였는데 교장선생님 한 마디에 당장 컴퓨터를 사주고서 2010년 6월 28일 한 집에서 한 컴퓨터로 첫 이메일을 시작했다.

『다슬아! 네가 보고파서 필라델피아까지 왔다. 교장선생님이 네가 최우등생이라고 칭찬하시더라』

『할아버지! 고마워. 교장선생님을 만나주셔서 나 자신이 너무 자랑스러워. 할아버지 사랑해』 이렇게 이메일이 계속되었다.

함께 야구시합을 구경하고, 손을 잡고 바닷가를 거닐고, 성당에서 복사하는 다슬이가 천사인 양 아름다웠다. 나는 제대 아래에서 “하느님! 우리 다슬이를 보호해 주소서”라고 기도했다.

4주를 함께 지내다가 나는 귀국했다. 할아버지를 자기 곁으로 돌아오라고 애달프게 울면서 이메일을 보내왔다. 나도 다슬이가 그리워 가슴이 저렸다. 이렇게 다슬이와 주고받은 이메일 파일이 6권이었다.

2016년부턴 둘째와 셋째 손녀로 이어졌다. 아비가 1세대, 어미가 2세대, 손녀들 셋이 3세대 4세대 5세대로 이메일 바통이 이어갔다. 할아버지를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손녀 셋은 내 삶의 힘이고 보람이었다.

나는 『시아버지와 며느리와의 편지』와 『할아버지와 손녀들과의 이메일』을 서간집으로 발간하려고 계획했다. 소재가 희귀하여 우리 국문학사에 남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일 14권과 컴퓨터에 담아둔 천 편 이상의 이메일을 정리하여 서간집으로 발간하기엔 내 나이가 너무 늦었다. 정신력과 체력이 소진되어 불가능하다. 하여 서간집 무늬만이라고 남겨두고자 어미 너에게 이 글을 썼다.

세월이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갔구나!

고생하는 너와 귀여운 손녀들을 남겨두고 떠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절여온다. 인명은 재천이라 했는데 내들 어찌하랴!

어미 네가 힘이 부쳐서 헤쳐갈 수 없을 때 하느님께 “왜 저를 이토록 버려두시나이까”라고 불평불만을 틀어놓아라.

하느님께서 너를 도와주실 것이다.

2021년 6월 29일

아버지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