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소품 유화

耕海 김종길
耕海 김종길

내 집 식당 벽에 4호짜리 소품 유화가 걸려있다. 네모 식탁의 내 자리 맞은편에 있는 유화를 밥 먹을 때마다 바라보면 지난날들이 회상되어 참회한다.

유화는 소박한 농촌 전원마을의 정경情景이다. 중앙에 농로가 있고 양쪽으로 말뚝들이 꽂혀있다. 농로 이쪽엔 키큰 고목이 우뚝 서 있다. 농로 저쪽엔 농가가 있고 그 옆에 농기구창고인 듯한 작은 건물이 한 채 있다. 건물 뒤로는 숲이 우거져있는 가을 풍경이다. 꾸밈없이 간결하다.

이 유화는 소품이지만 유래가 깊다. 1990년 5월에 오스트레일리아 서부 항구 퍼스에서 개최된 국제항만협회(IAPH)에 참가했다. 회의를 마치고 시드니로 돌아와 그곳에 주재하는 한국 해운 관계자들과 오찬을 했다. 가보고 싶은 곳이 있느냐고 묻기에 멜버른이라 답했다. 노르웨이에서 만났던 캐럴이란 미인이 자기 고향이 멜버른이라고 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던 생각이 떠올라서였다.

호주가 대륙이란 것을 잊고 시드니에서 멜버른까지의 거리가 서울에서 대전쯤으로 착각했다. 끝없이 고속도를 다렸다. 해가 뉘였 뉘였 저물었다. 안 되겠다고 생각되어 승용차를 되돌렸다. 휴게소 카페에 들였는데 그림을 전시했다. 가져오기 편리한 소품을 하나 골랐다. 그것이 바로 내 집 식당에 걸려있는 유화다.

나는 노르웨이해운아카데미의 해운전문과정에서 공부던 1976년 11월 14일에 선주협회 파티에 초대를 받았다. 당시 보유 선박이 한국보다 13배 많은 2천6백만 톤이었다. 인구는 400만에 불과한데 세계 3위의 해운국이었다. 선주협회의 육중한 고층건물이 세계해운을 향해 날 보라는 듯 위풍당당했다. 참 부러웠다. 우리나라는 언제쯤 저렇게 될 수 있을까 하고.

선주협회 임직원 150명이 무역전망과 국제해운 경기전망을 분석해 해운기업들에게 제공했다. 해운아카데미도 설립해 종사자들에게 다양한 교육훈련을 반복적으로 실시하여 전문가로 양성했다. 국제협력의 일환으로 개발도상국의 해운 관계자들에게도 교육훈련을 실시했다.

해운정보 기록영화를 관람하고서 만찬에 들어갔다. 출퇴근할 때 진 바지에다 간소하게 차려입던 여자들이 정장과 장식품으로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식사가 끝나고서 남녀가 각각 6열 종대로 손을 맞잡고 음악에 맞추어 넓은 무도장으로 입장했다.

향도를 뒤따라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어가며 돌다 보면 최종에는 남녀 각각 1열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돌았다. 밴드가 멈추는 순간 걸음을 멈추면 마주 보는 상대가 파트너가 되었다. 할머니와 청년, 꽃다운 여인과 할아버지, 날씬한 여자와 짜리몽땅한 남자 등등이 파트너가 되어 춤을 췄다. 마음에 들지는 않을지라도 복불복인데 어찌하랴!

나는 운수 좋게도 동양적 기품이 깃든 미인 캐럴이 내 짝이 되었다. 내가 춤을 못 춘다고 양해를 구했으나 염려 말라고 했다. 실수하지 않게 조심했는데 리드를 잘 해주어 한 스테이지가 탈 없이 끝났다.

스탠드 빠에서 마르티니 칵테일 두 잔을 들고 캐럴에게로 갔다. 옆에 건장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녀의 남편이라고 조지를 소개했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니까 10년 전에 부산항에 들린 적이 있다며 반가워했다. 그는 오슬로해양대학을 나온 선장 출신이었다. 유럽/호주 정기항로에 근무하면서 캐럴과 사귀어 결혼했다.

주말이면 가끔 기숙사로 나를 그들의 집으로 데려갔다. 2층 목조건물이었다. 외벽은 깨끗하게 단장되었고 넓은 정원은 잘 정돈되어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갔다. 겨울에 눈보라 치고 추워서인지 2중 유리창에다 2중 창문이었다. 1층엔 거실과 부엌 겸 식당이고 2층엔 침실과 욕실과 화장실이 있었다. 깨끗하고 상쾌한 분위기였다.

식탁에는 스카치와 코냑 등 각종 음료수가 놓여있었다. 식사 전에 누가 나를 기숙사로 데려다줄 것인가를 상의하더니 조지가 맡기로 했다. 캐럴과 나는 술을 마시는데 조지는 옆에서 콜라를 홀짝홀짝 마시는 모습이 민망스러웠다.

남녀평등을 넘어 여성상위 분위기이었다. 한국 여인들은 아직도 남편들에게 인종의 삶을 살고 있는데 입센의 <인형의 집>의 로라가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서 집을 뛰쳐나간 혁명이 이렇게 세상을 바꾸어 놓았단 말인가!

서북 방향으로 관광을 하기로 했다. 세 사람이 승용차로 떠났다. 설원에 띄엄띄엄 있는 집들이 눈에 파묻혀 졸고 있는 동화 속의 그림이었다. 도로 밖으로 미끄러져 나간 자동차를 운전자가 혼자서 끄집어내느라 애쓰고 있었다. 조지가 정차하고서 트렁크에서 삽을 꺼내서 도왔다. 못 본 척하고 지나가도 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남을 도와주는 조지가 존경스러웠다.

나는 귀국하고서 조지 부부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보내지 않고 지냈다. 나의 소식을 얼마나 기다렸을까. 기다리다 기다리다 실망했을 것이다. 실망보다 예의 없는 인간이라고 욕했을 것이다. 내 개인을 넘어 한국인들을 싸잡아 폄훼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모르고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러다 호주에 갔을 때 캐럴에 대한 고마움의 잠재의식으로 떠올랐을 것이다. 그녀 고향에라도 한번 가보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집안이 몰락해서 가난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조부모님과 부모님, 그리고 형 누나들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 그러함에도 그 은혜에 보답하지 못했다. 동생이 없는 막내둥이였으므로 조카들을 챙겨야 했는데 그것도 못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선생님들의 가르침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성장하여 오늘날의 내가 되었다. 그걸 모르고 내가 잘라서 오늘의 내가 있다고 교만하게 살아왔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이 있었음인지 내가 은퇴 직후 친척과 친지들 120명을 초청하여 보은報恩의 밤을 가졌다. 그것으로 보은을 했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애 같은 철부지였다.

식탁에 앉을 때마다 소품 유화를 바라보며 인생 80을 살아온 지난날들을 회고한다. 조지 부부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을지 모른다. 그들에게 영원한 빛을, 영원한 안식을 주십사고 기도한다. 그 외 은혜를 베풀어주신 많은 분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드린다.

소품의 유화가 나에게 참회하는 기회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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