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

耕海 김종길
耕海 김종길

이 글은 지난 10월 16일 고려대학교 해상법연구센터 김인현 교수가 주관한 ‘바다, 저자전문가와의 대화’ 강의를 보완한 것이다. 강의 당일 150여 명이 참여하여 60분 강의와 120분 질의응답과 토론이 진지하게 진행됐다.<저자 주>

1. 대한민국 해운 선각자들

일제가 1910년 조선을 강제합방하고 조선해운 말살정책을 펼쳤다. 군소 해운회사를 통폐합하여 1912년에 조선우선을 설립, 조선사람의 해운 접근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하여 해방 당시 우리 해운은 황무지였다. 삼국시대 중원을 경쟁적으로 나들면서 조공무역이 발달하였고 그 결과 통일신라 시대에는 장보고가 동아시아 바다를 장악하고 중동까지 진출하였던 해운국이었다.

조상들의 DNA가 남아있었음인지 일제 지배하에서 상선학교에 진학하여 해기사 면허를 획득하고 승선하여 해운전문지식을 습득했다. 이 선각자들이 유일한 자산이었다. 이들이 황무지를 개간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이 세계 7대 해운국, 그리고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수출제일주의 경제정책으로 국가가 눈부시게 발전되었다. 수출과 해운이 동전의 앞뒤란 것을 이해하지 못해 해운에 대한 국민사상이 저변으로 확대되지 못했다.

해운 선각자들이 많지만 몇 분을 소개한다면 아래와 같다.

① 유학렬 : 동경고등상선학교를 최초로 입학하였고,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도선사가 되어 해방 당시 미국 원조물자 수송선박을 도선하였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에 공헌하여 누란의 위기에 처한 조국에 공헌했다. 아들 세 분도 모두 해운에 투신하여 4부자가 한국의 해운명문가를 이룩했다.

② 황부길 : 초대 해운국장으로 선박확보, 항로개척, 선원양성, 표지시설정비 등 해운정책을 올바르게 펼쳐 해운발전 초석이 됐다.

③ 남궁련 : 해운공사와 조선공사 사장을 역임하였고, 극동해운을 설립했다. 침몰 선박을 인양 수리하여 고려호라 명명하고 태평양을 최초로 횡단했다.

④ 이시형 : 진해고등해원양성소를 해양대학으로 발전시켜 대한민국 해운 동량들을 양성했다.

⑤ 박옥규 : 해군 창설에 참여하여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하였고 로이드보험이 한국 최고의 선장으로 인정하여 현역장성 신분으로 고려호 선장이 되어 최초로 태평양을 횡단했다.

⑥ 신성모 : 대영제국의 슈퍼마스터 자격증을 획득했다. 귀국하여 내무장관과 국방장관과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했다. 대통령 해운정책을 자문하였고 마지막으로 해양대학장에 취임하였음.

2. 대통령의 신성모에 대한 신뢰

故신성모 학장
故신성모 학장

이승만 대통령이 민성일(民聲日)에 노동자, 농민, 서민층의 민원을 청취했다. 한 노파가 대통령께 요청했다. “내 아들 찾아주시오.”, “아들이 누구시오?”, “신성모요”, “오 캡틴 신!”, “곧 돌아올 겁니다”

이승만은 신성모 명성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신성모가 1948년 10월 3일에 인천항으로 귀국했다. 첫 임무는 대한청년단장으로 임명되어 제주 4·3사태 진상조사와 구호대책을 대통령께 보고했다.

신성모가 국방장관 재임 중에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 양민살해사건이 발생하였다. 야당은 신성모의 책임으로 몰아세웠다.

대통령은 신성모를 주일한국대표부 공사임명은 재신임이었다. 귀국하여 해사위원장으로 임명하여 평화선 선포, 해무청 설치, 해경창설 등 정책자문을 했다. 1956년 제8대 해양대학장의 임명은 대통령의 변함없는 신뢰이었다.

4·19혁명 이후 한국언론을 쥐락펴락하던 신상초가 작정을 하고서 신성모를 부관참시(剖棺斬屍)하는 글을 『광장』이란 잡지에 2회에 걸쳐 게재하여 정치적으로 매장시켰다. 『해양한국』에서도 이 글을 옮겨실어 해운계에서도 기피 인물이 되었다.

3. 해양대학장 신성모

미국 원조로 부산 영도에 학교건물은 신축하였으나 내실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신성모가 충분한 예산을 확보하여 학생들의 배고픔을 해결했다. 운동장 건설과 도서관 신축 등 학교 시설과 환경을 정비했다.

그때까지 교과서가 없었다. 미국 해양대학 교과서를 가져와 해군인쇄처에서 복사한 교과서로 학생들이 공부했다.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를 조성했고 교수자질향상을 위해 손태현은 연세대학, 이준수는 경희대학, 허동식은 서울대학으로 유학시켰다. 해운공사 금천호를 인수하여 반도호로 명명하고 실습선으로 취역했다. 그 무엇보다도 큰 공적은 해군예비원령을 제정하여 학생들의 병력문제를 해결했다.

잊지 못할 일화가 있다. UNCTAD 자금으로 해양대학을 신축하고 고문관으로 파견된 캡틴 스미스가 “학장은 무슨 해기면허장을 가졌어요?”라고 물었다. “I have the Extra Master License of the British Empire”라 대답하자 스미스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Yes, Sir!”라며 거수경례를 했다. 2차대전 후 미국이 세계를 주도했지만, 1588년 엘리자베스Ⅰ세가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350년간 5대양6대주를 장악하였던 대영제국을 경외했는데 나라 잃은 신성모가 대영제국의 엑스트라 마스터인 줄 꿈엔들 상상하였으랴!

학장은 전교생을 대상으로 특강을 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출신들이 2차대전에 참전하여 1/3이 돌아오지 못하고 전사하였던 영국국민과 영국선원들의 희생정신을 강의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장택상, 이은상, 홍진기 등 명사들을 초청하여 특강을 했다. 장택상은 허스키 목소리로 “바다를 제패한 자 세계를 지배한다”란 Sea Power 강의는 60년이 지냈는데도 잊히지 않는다. 이은상은 충무공 애국충정의 난중일기를 잔잔하게 강의했다. 홍진기를 해사행정을 일원화시킨 탁월한 행정가라고 소개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특강은 학생들의 애국심을 북돋아 조국의 미래를 개척하라는 학장의 애국애족의 간절한 염원이었으리라.

4. 신성모의 진면목

신성모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이 상반되었다. 진면목을 알아보려고 의령군청과 문화원을 비롯하여 알만한 곳에 문의했으나 모두 모른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정치적으로 매장되면 모두가 외면하는 것이 세상인심임을 깨달았다.

백산 안희재의 장손 안경하가 신성모 유족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질문서 100개와 녹음기를 준비하고서 따님 신내원과 손녀 신한덕을 상대로 대면기록을 했다.

신성모는 1891년 5월 26일 경남 의령에서 신재록의 독자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하여 백산 안희재의 도움으로 마산 창신학교를 거쳐 보성전문 재학 중에 한일합병이 되어 연해주로 망명했다. 백산의 독립자금을 전달하려다 안동에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풀려나 중국 남경항해학교에 재학 중 일본인으로 오인되어 퇴교당할뻔했는데 김익환의 신원보증으로 구제되었다.

김익환은 대한제국 외국어학당을 졸업하고 청국대사의 자녀 영어가정교사가 되었다. 일제강점으로 청국대사관이 폐쇄되어 김익환은 대사를 따라 북경으로 갔다. 신원보증이 인연이 되어 신성모가 김익환의 딸 김복희와 결혼하여 아들 명구와 딸 내원이 북경에서 태어났다.

5. 김복희 고난의 행진

신성모는 영국으로 망명하여 부두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다 런던항해학교에 입학했으나 김복희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부모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였기 때문에 친정에서 더부살이를 할 수 없어 두 자녀를 데리고 만리타향 남편의 고향 의령으로 갔다. 가난한 시가에 머물 수 없었다.

의령의 부호 이우식의 도움으로 오사카로 이주했다. 이때 신성모는 영국상선의 견습 사관으로 4개월마다 고베항에 입항하여 가족들과 만날 수 있었다. 개성의 기업가 공진학의 도움으로 도쿄로 옮겨갔다가 2차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에 머무를 수 없어 만주로 돌아갔다. 공진학의 만몽농장에서 일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장질부사가 만연되어 동포를 간호하다 감염되어 안타깝게도 사망했다.

6. 신성모의 사망과 명예 회복

4·19혁명으로 대통령이 하야한 1960년 5월 25일 뇌일혈로 동대문 이화여대 병원에 입원했다. 대통령이 하와이로 망명하던 5월 29일 “훗날 역사가 말해 줄 것이다”란 한 마디 유언을 남기고 운명했다. 이승만과 신성모는 공동운명체였을까? 해양대학 학교장으로 고향 의령에서 초라하게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스미스 고문관이 헌납한 『韓國海洋大學長 小滄 申性模之墓』란 묘비가 영결식에서 유일하게 빛났다. 유족들이 지금도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1990년 12월 26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어 현재 대전 국립현충원에 영면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신원(伸冤)되었다. 2009년 3월 6일 <해기사 명예의 전당>에 제1호로 헌정되었다. 해운계에서도 명예가 회복되었다.

최근 연세대학 이승만 연구원에서 신성모 국방장관의 6·25전쟁 전황에 관한 육필보고서가 발견되어 월간조선 2020년 8월호에 게재되었다. 1950년 7월 1일부터 12일까지 전황을 9차례 대통령께 직보한 내용이다. 6·25 전쟁사와 신성모의 역할이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했다.

『되돌아본 海運界 史實들』, 『영예로운 海運人들』, 『선박행정의 변천사』 등을 간행하면서 해운계를 두루 살펴보건대 신성모가 대한민국 해운의 대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로 추대되어도 하등의 하자가 없을 것으로 확신했다.

광복 80년이 다가온다. 80년간 우리 해운은 엄청난 변화를 거듭했다. 『대한민국 해운80년사』가 발간되길 기대한다. 그동안 해운사가 몇 번 발간되었으나 정부의 통계나 자료를 베껴 쓴 관변역사였다.

역사기록은 그렇게 쓰면 안 된다. 전문가들이 선발되어 방대한 자료를 수집 정리해야 한다. 4년밖에 남지 않았다. 준비 기간만 2~3년 소요된다. 집필은 1~2년이면 족하다. 대한민국 해운의 대부인 신성모 평전도 함께 발간되어 『대한민국 해운80년사』에 실제적 사실(史實)이 담겨지기를 기대한다.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