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 경영학 박사(한국물류포럼 대표, 전 KMI 기획조정실장)

박태원 박사
박태원 박사

필자는 대학을 졸업하고 동진선박에 입사했다. 지금으로부터 46년 전이다. 동진선박은 선박을 보유하지 않고 외국 해운회사들의 대리점을 영위하는 회사였다. 그 당시 미국에는 시랜드(Sea-Land)와 APL 등 세계 굴지의 해운회사들이 있었다. 동진선박이 대리점을 맡고 있던 워터맨(Waterman)과 시웨이 익스프레스(Seaway Express)도 미국 해운회사였다. 워터맨은 미국의 남동부 주요 항만을, 시웨이 익스프레스는 미국의 서부 항만을 기항했다.

미국은 1964년에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미국 본토에서 엄청난 전쟁 물자가 베트남으로 보내졌다. 하지만 전투 현장에는 늘 물자가 부족했다. 물류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트남에는 1,100킬로미터의 해안선이 있지만, 미군 수송선이 들어올 수 있는 수심이 깊은 항만은 사이공(호찌민) 하나밖에 없었다.​​ 부두 노동자들이 일일이 수작업으로 물품을 배에서 내려야 했기에 배 한 척을 비우는데도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 미국에서 수송선이 사이공에 도착해도 물품을 배에서 내리려면 한 달씩 대기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배에서 화물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전투가 벌어지는 다낭은 사이공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군수 물자가 현장까지 가려면 다시 차량으로 900킬로 정도를 운송해야 했다. ​당연히 물류 공급망은 차질이 불가피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군 공병대가 해법을 찾았다. “모든 선박의 화물을 통일된 포장 방식으로 보내라”가 그것이었다. 통일된 포장 방식인 컨테이너로 물자를 운송하자는 아이디어가 채택되면서, 본격적인 컨테이너 시대의 막이 올랐다.

1956년에 컨테이너를 처음으로 개발한 미국의 말콤 맥린이 설립한 민간 해운회사가 베트남 전쟁 물자 운송에 참여했다. 크레인으로 컨테이너를 내릴 수 있는 전용 항만이 필요했다. 미군은 베트남에서 컨테이너 전용 항만의 여건을 갖추고 있는 깜라인만을 개발했다. 깜라인만은 동남아시아에서 수심이 가장 깊은 곳으로 항공모함까지 정박이 가능한 항만이었다. 사이공보다 전투 현장에도 훨씬 가깝다 보니 군수품의 공급이 원활해졌다.

컨테이너선의 역사에는 맥린과 시랜드가 있다. 맥린은 가난한 트럭 기사였다. 트럭 한 대로 운송사업을 시작했고, 트럭 운송의 합리화를 위해 컨테이너 용기도 개발했다. 그리고 미국의 대표적인 선사였던 시랜드를 설립했다. 시랜드는 한동안 대만의 에버그린과 함께 세계 1, 2위 글로벌 해운회사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맥린의 투혼이 담긴 시랜드는 경쟁력을 잃으면서 미국을 떠났다. 23년 전의 일이다.

세계 2위 해운회사였던 시랜드는 인수합병을 거쳐 1999년에 덴마크의 머스크 품에 안겼다. 머스크는 2005년과 2016년에 네덜란드의 P&O네들로이드와 독일의 함부르크수드를 차례로 인수했다. 그리고는 글로벌 해운 공룡의 자리를 꿰찼다. 시랜드에 이어 미국의 APL도 2004년에 싱가포르 해운회사인 NOL로 넘어갔다. NOL은 또다시 프랑스의 CMA-CGM에 합병되었다. 물론 필자가 몸담았던 미국의 해운회사 워터맨과 시웨이 익스프레스도 자취를 감춘 지 까마득하다.

​ 미국의 해운회사들이 사라진 글로벌 해운시장은 유럽 해운회사들과 아시아 해운회사들이 장악했다. 유럽 해운회사들은 주로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확대와 인수합병을 통해서 성장했다. 이에 비해 아시아 해운회사들은 국가 재건을 위한 경제성장과 맞물려 몸집을 키웠다. 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유럽 국가들은 겉으로는 자국 화물을 자국 해운회사에 선적해야 한다는 정책을 표방하지 않는다. 하지만 EU의 강한 결속력으로 유럽의 화물을 아시아권 해운회사에 넘겨주는 데 인색하다.

미국에는 자국 국적의 글로벌 해운회사가 없다. 세계 최대의 무역국인 미국에 왜 글로벌 해운회사가 없을까? 미국은 세계 최대의 재화 수입국이다. 수출 규모도 세계 3위이다. 미국은 거대한 해운 수요를 바탕으로 시장지배적인 위치에 있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물동량을 무기로 글로벌 해운시장을 좌지우지한다. 글로벌 해운의 최대 수요자로서 공급자인 외국의 해운회사들을 통제하고 관리한다. 그래서 자국에 글로벌 해운회사와 같은 국적선사가 없어도 문제가 없다.

컨테이너 정기선 서비스를 제공하는 글로벌 해운회사들은 북미 항로와 유럽 항로를 주축으로 운항한다. 특히 북미 항로를 빼놓고 영업할 수가 없다. 아시아와 북미 항로의 물동량이 아시아에서 유럽 전체로 향하는 물동량보다 많기 때문이다. 글로벌 해운회사들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막강한 바게이닝 파워를 앞세워 미국의 화주들은 외국 해운회사들이 제공하는 합리적인 운임과 고품질 서비스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미국에는 연방해사위원회(FMC)가 있다. 해운에 관한 규제와 감독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외국 해운회사들의 운임담합 등 불공정 거래행위를 감시하면서 제재를 가한다. 미국의 수출입 업자들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다. 게다가 지난 6월 16일에 바이든 정부는 「해운개혁법 2022」를 공표했다. 해운회사에 대한 FMC의 규제 권한이 더욱 강화되었다.

만약에 바이든 정부가 갑자기 미국의 해운산업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정책 기조를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미국에 글로벌 해운회사가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해운 강국을 꿈꾸는 우리로서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섬뜩하고 무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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