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현 교수(선장,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김인현 교수
김인현 교수

선박은 등록국을 중심으로 국적선과 외국적 선박으로 나눌 수 있다. 한국의 항구에 선박의 등록을 한 선박은 한국국적 선박이고 외국의 항구에 등록을 한 선박은 외국적  선박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박을 등록한 국가는 파나마이다. 한편, 실제소유자를 중심으로 우리 선주들이 지배관리하는 선박이 있고 외국선주들이 지배관리하는 선박이 있다. 후자를 외국선박이라고 부른다. 

1945년부터 해운불모지인 신생 대한민국에서 미래의 해운산업을 위하여 선각자들이 해기사라는 장래 고급선원을 교육시키고 배출했다. 한국해양대학이 그 모태였다. 1년에 100명 정도의 고급해기사들이 배출되었지만, 이들이 근무할 선박은 없었다. 이에 서병기 해양대 교수와 같은 선각자들이 일본으로 날아가서 일본선주들의 선박에 우리 선원들을 태울 방안을 찾았다. 한국선원들의 성실성과 근면성이 점차 인정을 받으면서 1970년대부터 해외송출이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 일본의 산코기센(통칭, 산코라인)에 선원을 공급하는 천경해운이 대표적인 송출선사였다. 

이들 송출선사는 한국에서 선원들을 모집하여 선주에게 공급하고 그 대가인 봉급을 선원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산코기센의 선원관리를 하는 자회사인 이스턴쉽핑과 고용계약을 한국선원들이 체결하고, 천경해운은 그 대리점 역할을 한 것이다. 1985년 해외송출선원의 숫자는 5만명에 이르렀다. 한해 해외송출 선원들이 벌어오는 임금수입은 5000억원에 이르렀을 정도로 상당했다. 현재 송출선원 숫자는 3000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니 격세지감이다. 

나는 1978년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한국해양대학에 입학했다. 1982년 졸업을 하면서 어떤 회사에 가야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국적선을 택할 것인가 외국 송출선을 택할 것인가였다. 당시 국적선대는 보잘 것 없었다. 대한해운공사의 뒤를 이은 대한선주, 그리고 팬오션과 아세아상선이 빅3였지만 선대는 규모가 작았다. 국적선을 키우기 위하여 우수한 학생들을 국적선에 우선배치하는 정책을 해양대학이 폈다. 송출선을 가면 봉급은 많지만 진급이 느리다고 했다. 그리고 송출은 우리나라 회사가 아니니까 나중에 친정이 없어서 좀 쓸쓸하다고 했다. 

1등 항해사 시절 필자
1등 항해사 시절 필자

나는 봉급이 많고 외국선장과 같이 근무하여 영어를 익힐 수 있는 MOC를 지원했다. 1982년 2월 중순 어느날 우연히 한국해양대의 선원배사 담당 부서를 지나면서 평소에 안면이 있는 직원 아저씨에게 배사결과를 물으니 아세아상선이라고 했다. 나는 해외송출을 나가고 싶다고 했다. 어쩐 일인지 배사당일 발표에 아세아 상선에도 이름이 없고 MOC에도 없었다. 마지막에 산코기센에 배당이 되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곧 최고의 선사에 잘 배정이 되었음을 알았다.

천경해운 부산사무소에 갔더니 성 상무님께서 우리 동기들 6명에게 “제군들 참 잘 왔다, 초급 항해사시절 잘 배워야하는데, 산코에서 가장 잘 배울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대명비도 주면서 부산에 설치된 산코기센 연수원에서 교육을 받아야한다고 했다. 약 2주간 교육을 받고 첫배인 Penelepe of York호에 승선했다. 

무릇 모든 일에서 처음이라는 것은 강력한 인상을 남긴다. 여러 측면에서 1982년 3월에 승선한 Peneolpe of York호 3등항해사 시절은 잊을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우선 승선시부터 쉽지가 않았다. 김포공항에서 출발한 우리는 UAE의 두바이로 가기위하여 5시간 정도를 동경에서 기다려야 했다. 지겨운 기다리기였다. 저렴한 항공편을 구하려다 보니 동경에서 오래 대기해야했을 것이다. 네덜란드의 비행기를 탔는데, 처음으로 만나는 금발의 스튜어디스들에게 눈길이 자꾸 갔다. 덩치가 얼마나 큰지 놀랐다. 현지에 도착하여서도 3일간 기다려야 했다. 코랄파칸이라는 곳에 승선할 배가 닻을 놓으면 우리가 작은 통선을 타고 합류한다는 것이었다. 조그만 모텔에 3일간 머무는데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두바이가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는 아직 미개척지였다. 무거운 짐을 들고 통선을 타고 컴컴한 배에 올라갔다. 인사를 했더니 학교 선배 2등 항해사가 “신임 김인현 3항사 환영한다”고 하면서 근무복으로 갈아입고 부식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해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부식창고에 갔는데, 그 어마어마한 크기에 놀랐다. 돼지 머리가 있길래 이게 뭐냐고 했더니, 적도제에 사용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출항을 하고 첫 도착한 곳이 라스타누라였다. 여기서 기름을 싣고 아라비아 반도 남부를 돌아서 서부인 홍해의 얀부(Yanbu)라는 곳에 위치한 기름 저장소에 이송한다는 것이었다. 페르시안 걸프가 전쟁으로 막힐 때를 대비해서 미국이 원유를 안전한 사우디 서부에 옮겨서 저장해둔다는 전략이었다.

우리 산코기센의 유조선이 사우디와 미국의 합작회사인 JORC사에 용선되어 이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일주일에 한번씩 매번 동일한 일을 반복했다. 이를 피스톤 항해(piston voyage)라고 한다. 선원들은 긴 항해가 있는 선박이 좋다. 항해를 할 때면 하루 8시간 당직 말고는 일이 없어서 편하기 때문이다. 입출항을 하게 되면 일이 많아서 몸이 피곤하다. 그런데, 본선은 일주일에 한번씩 매번 입출항을 하게 되니 점차 이 배가 힘든 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선원들은 이 배를 배이름에서 유래해서 “피보고 욕보는” 배라고 별칭을 붙일 정도였다.

그래도 즐거움은 있었다. 얀부의 항구에는 우리 선박을 부두에 접안시키기 위하여 예인선이 필요했다. 2척의 예인선에 모두 한국인 선원들이 타고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들은 금지된 소주도 가지고 있었다. 그 선박의 선원들이 KBS에서 방송하는 “파도를 넘어”라는 프로그램을 알려주어서 다음부터 즐겨 한국어 방송을 들으면서 고향 그리움을 달랠 수 있었다.

이슬람 국가라서 주류는 마시지 못하고 알콜없는 맥주가 있었다. 맹물맛이라서 싫었다. 라스타누라 부두에 일주일에 한번씩 들어가니까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다. 파키스탄 출신의 감독이 나에게 친근하게 접근했다. 신문도 주고 오렌지쥬스도 주곤했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번은 우리 배에 건너와서 나의 방으로 가자고 했다. 나의 방에는 한국의 모 탤런트의 수영복 포스터가 걸려있었다. 이 감독이 나의 옆에 앉더니 혁띠가 좋다고 하면서 만지는 것이었다. 나는 아차, 큰일나겠다 싶어서, 밖으로 나가자고 하고 데리고 나갔다. 다시는 그를 보지 않았다. 선배에게 이런 경험을 말했더니, 사우디에서는 돈있는 남자들은 4명까지 부인을 데릴 수 있기 때문에 결혼하지 못한 남자들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성적으로 이상한 짓을 하려는 친구들이 있다고 하면서 피식 웃었다. 나는 그 때 곱상한 얼굴에 머리도 많이 길러서 마치 여자처럼 예쁘게 보일 때였고, 그 감독이 나를 여성으로 착각했나보다. ㅎ 

당시는 20명 전원이 우리 한국선원이었다. 단일 민족이므로 언어와 식사 그리고 오락에서 전혀 이견이 없었다. 일사분란했다. 아침은 흰 쌀밥에 미소 된장국으로 간단히 먹었다. 된장찌개와 불고기, 소금구이, 비빔밥 등이 준비되었다. 운동으로는 탁구를 했다. 당직을 마치고 12시부터 2시까지 두시간 동안 탁구를 쳤다. 어느 선박이나 탁구장은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10년 동안의 승선시기 내내 탁구를 쳤다. 이때 탄탄해진 하체가 나의 건강을 지금까지 지탱한다고 본다. 전원일기와 같은 TV연속극 드라마를 비데오 테이프에 담아와서 선원들이 모여서 같이 보았다. 현지 선식이 올려주는 비데오 테이프도 선원들의 육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는 좋은 수단이었다. 

선원교대가 가장 기다려지는 낙이었다. 최소 10개월이 되어 자신이 휴가를 가는 선원교대행사가 가장 큰 즐거움이고 기다림이었다. 다른 선원들이 하선하고 승선하는 행사도 기다려졌다. 새로운 사람들이 온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대 선원들이 들고 오는 고향으로부터의 편지, 책자, 월간지가 큰 낙이었다. 해양한국, 월간조선, 월간동아가 읽을 거리로서 1980년대 큰 인기였다. 고향 여자후배로부터 편지가 기다려졌던 때가 있었다. 나는 승선기간 중 미국인 부부와 일본인 전문직 여성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헤어짐의 아쉬움, 기다린다는 희망, 누군가를 다시 만나는 기쁨을 피부로 느꼈다. 사무치는 그리움의 끝에 가족 등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좋았다. 또 헤어짐이 있고 반복되는 만남이 있었다.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그리움이 형성되었다. 외국 송출선을 타면서 사람을 무조건 더욱 좋아하게 된 것은 장차 나의 인생에 큰 자산이 되었다.   

이제는 외국선원들과 함께 우리 한국선원들이 근무하므로 환경이 나빠졌다고 할 수 있다. 의사소통의 문제, 다른 식성을 가진 선원들을 만족시켜야 하는 식사의 문제가 선상생활을 긴장하게 한다.

외국선박의 선원으로 살아가는 가장 큰 특징은 한번 출국하면 한국에 입항할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계약기간인 10개월에서 12개월을 승선한 다음에 비행기로 외국의 어느 항구에서 귀국하는 것이 유일한 고국방문이 된다는 점이다. 한국선박에 승선하면 항로가 한국의 항구로 배정되므로 1개월, 2개월 혹은 3개월에 한번씩은 한국의 항구에 꼭꼭 기항하게 된다. 외국선박의 선원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고국, 친구, 사랑하는 가족, 애인에 그리움이 항상 가슴에 가득하다.

그렇지만, 외국선박에 승선하는 선원들 특히 해기사들은 그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했다. 한국에 자주 기항하지 못하는 점을 접어두고 그 바다가 우리에게 주는 천금같은 시간을 선용한 것이다. 사람마다 다양한 방법을 택했다. 어떤 선장은 조개 모으기를 했다. 어떤 선장은 화초 가꾸기에 힘썼다. 나는 미국의 소리(VOA)방송을 즐겨들으면서 영어공부를 했다. 그리고 미국에 기항 시 중고서적에 들러 10권정도의 읽기 쉬운 원서를 사서 배에서 읽었다. 지금도 나의 서재에는 배에서 읽었던 70여권의 원서가 가득하다. “제3의 물결”, “팁오닐 미국하원의장 자서전”, “캐네디 대통령 자서전”, “곡물 메이저”등 이 때 읽었던 영어책은 나중에 고려대 대학원 석사입학시험과 학사편입시험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힘으로 지금도 로스쿨에서 영어로 “해상운송법”을 강의하고, 영어로 된 해상법 교재도 발간하게 된 것이다. VOA 방송의 내용과 영어책 읽기를 통해서 미국사회를 지탱하는 지도자들의 헌신(contribution, devotion)과 희생(sacrifice)의 의미가 무언지 알게되었다. 나의 인생관을 결정짓는 큰 공부를 바다에서 한 것이다.  

가장 큰 보람은 내가 바다에서 번 돈이 집으로 가서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 준다는 점이었다. 1980년대 우리나라는 아직 어려울 때였다. 가정형편이 나빠서 자식들이 대학에 다니지 못할 때였다. 대부분의 선원들은 집안의 가난을 벗어나기 위하여 그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국비로 대학을 다닐 수 있으니까 한국해양대학을 택한 것이다. 아들이 배를 타서 가난에서 벗어날 희망을 보았기 때문에 부모는 자식에게 이 학교를 권했다. 그리고 자식의 학비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번 돈으로 동생들이 대학을 다녔다. 얼마나 큰 보람인가? 형으로서 오빠로서 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국비대학을 택했지만, 동생들은 돈 걱정 없이 원하는 대학에 다닐 수 있기를 나는 바랐다. 이런 마음은 그 당시 선원들이면 누구나 가졌던 마음가짐이었다. 약 10년간 외국선박에 송출선원으로 근무했다. 1982년 당시 집으로 보내지는 70만원의 봉급, 1991년 선장 월급 250만원은 큰 돈이었다. 집에서 부모님들이 가정에 사용하시고도 1982년부터 평균 연간 1000만원씩은 모았다.

나의 사랑스런 가족들이 현재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5억짜리 고양시 화정동의 아파트를 위한 그 종잣돈이 이 때 마련된 것이었다. 30대 중반 다시 법학공부를 시작하면서 나는 우리나라 최고의 인재들이 모여있다는 김&장법률사무소와 고려대 법대에서 치열하게 나와 싸워야 했다. 내가 전셋돈을 얻는 등 정신을 다른 곳에 쓰지 않고 오직 공부와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집한칸의 힘은 이렇게 컸다. 송출선을 타면서 마련된 당시 1억원은 정말 소중하고 고귀한 것이었다.

내가 배를 타면서 번 돈으로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동생은 서울대를 나와 변리사로 활동중이다. 여동생은 도서관학을 전공하여 지금까지 도서관 사서로서 철밥통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다. 덕분에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어선에 페인트 칠을 하는 육체노동을 더 이상 하시지 않아도 되셨다. 자식으로 최소한의 효도를 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산코기센이라는 외국선박 송출선 덕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외국선박의 선원으로 살아간 젊은 20대와 30대 초반의 나날들은 나에게는 플러스만 있었지 전혀 마이너스는 없는 값진 시절이었다. 오늘날 나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명문 사학의 교수자리에 있다. 선장출신으로는 처음있는 일이다. 이 모든 기초는 산코기센에서 송출선원을 하면서 길러진 것이다. 이 기간중 나는 해운실무와 영어를 익혔고, 어려웠던 집안을 일으켜 세웠고, 내가 가정을 이룰 수 있는 집 한칸을 장만할 경제적인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송출선원시절은 나에게 내가 수필가로서 성장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을 하게 했고 이것이 풍부한 수필의 소재가 되어준다.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인정이 무언지 알게 해주었다. 거친 뱃사람을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선장이라는 타이틀을 달아준 곳이기도 하다. 

다시 한번 태어나도 나는 선원으로서의 길을 걸을 것이다. 특히, 송출선원으로서 외국선박을 타는 그 길을 선호할 것이다. 그 기간은 국적선에 비하여 더 많은 기회를 나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기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집중해서 나의 미래를 위한 기초체력을 튼튼히 할 수 있었다. 동년배들이 20대에 육지에서 이런 저런 일로 시간을 낭비할 때 나는 오롯이 바다에서의 남는 시간을 선용하여 독서와 방송듣기 그리고 체력단련을 했다. 이때 길러진 튼튼한 기초는 선배라고는 아무도 없었던 김&장 법률사무소 및 고려대 법대라는 황야에 들어선 나를 포기하지 않고 지켜주었고, 또 주위 사람들로부터 괜찮은 선장출신 해상법교수로 인정받게 하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보니 외국선박에서 근무했던 10년의 세월은 나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젊은 날이었다. 바다는 우리가 어떻게 접근하고 활용하는가에 따라 엄청난 기회와 가치를 주는 것이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된다. 바다는 나에게 엄청난 기회를 주었고 나는 다행히 그 기회를 잘 잡은 행운아이다.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사랑하여 좋은 기회를 나와 같이 잡기를 희망하며.. (2022.12.13.)

(추가; 1980년대와 40년이 지난 현재의 해상근무환경과 젊은이들의 마음가짐이 우리와 같지 않음을 잘 안다. 그렇지만, 승선시간중에 8시간 당직이외에 남는 10시간이 오롯이 있어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은 젊은 20대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고 다른 직종의 동년배가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3년 근무에 2억원 정도를 모을 수 있다는 것도 대단히 큰 장점이다. 이 두 가지가 승선중인 해기사들의 장점인 점은 시간의 흐름과 무관한 것이라고 본다. 

기꺼이 선원이 되어 배를 타려는 젊은이들을 점차 보기가 어려워진다. 이 때문에 해운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 해운의 장래를 걱정한다. 수출 위주인 한국경제의 수송을 위해서 우리 상선대가 있어야 하고, 상선대는 운항할 선원들이 있어야 한다. 외국선원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우리 선원은 꼭 있어야 한다. 장차 인구절벽 시대에 모든 업종은 인력쟁탈전을 벌일 것이다. 내가 제시하는 위 두가지 장점으로는 젊은이들을 바다에 잡아둘 수 없다는 것도 잘안다. 이보다 더 획기적인 조치가 취해져야만 한다. 유럽과 같이 4개월 승선에 4개월 유급휴가제도의 도입으로 삶과 노동의 불균형을 해소해줄 것, 승선중에도 석사박사과정을 이수할 수 있는 사이버대학의 활용등 선원들을 위한 획기적인 제도의 개선이 시급하다.

휴가를 떠나는 선원들과 함께
휴가를 떠나는 선원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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