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병 경영학 박사(한국국제상학회 이사,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팀장)

이기병 박사
이기병 박사

팔자 좋게 휴가차 다녀오진 못했다. 업무차 북마리아 제도 사이판을 다녀왔다. 1년 내내 평균 기온 27도를 유지해 세계에서 온도 변화가 가장 적은 지역으로 기네스북에 올라간 섬.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코로나 19시대에 우리와는 첫 Travel Bubble(여행안전권역) 협약을 체결한 섬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인이 사이판 전체 방문객의 76%를 차지하고 있다. 신혼부부부터 워크숍에 참석하는 직장인들까지 곳곳에‘물반 한국인반’이다. 이런 한국인 덕분에 아시아태평양관광협회가 사이판을‘최고의 회복 탄력성 여행지’로 선정했다.

각자의 세월 속에 따라 사이판은 다채로운 모습으로 비친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시청 세대는 미군을 도와 태평양전쟁에서 사이판을 함락시키는데 이바지하는 장하림(박상원)을 기억한다.

누군가에게는 1974년에 도입된 섬유 쿼터제로 싼 인건비와 관세가 없어 미국으로 수출하는 의류 생산기지 공장 역할을 했던 사이판을 떠올린다. 사이판 최고 중심가‘가라판(Garapan)’에는 K-컬쳐가 주인공 자리를 꿰차고 있다.

BTS의 노래가 제주도의 6%밖에 안되는 사이판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결코 가수를 상상할 수 없는 음치의 한국인들이 부른 윤수일의 ‘아파트’와 조용필의 ‘모나리자’도 앵콜송을 주문받는 등 한류열풍이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오늘이 기억하는 사이판이다.

대중교통과 버스가 없는 사이판에서 택시는 우리가 알고 있는 TAXI 이상이다. 헥셔-오린 이론(Heckscher-Ohlin Theorem)은 “나라별 무역 발생의 원인과 결정요인은 각국의 생산요소, 지질학적 자원과 생산량 차이로 결정한다”라고 했다. 사이판이 그랬다.

인력수출이 저임금에서 고임금 국가로 이동하는 것을 증명하듯 사이판 택시의 많은 운전기사는 중국 연변지역 사람들이었다. 코로나19 전에는 연변지역이 한국, 북한, 사이판, 리비아, 일본 순으로 가장 많은 인력수출을 했다. 인력 주도형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중국 연변 교포들의 일터를 사이판에서 목격했다.

로마, 스페인, 영국, 일본 등 한때 세계 역사를 움직였던 나라들은 해양 국가였다. 우리도 고려시대까지 세계를 향한 해양국이었으나 조선시대 이후 바다도 대륙도 잃어버린 슬픈 반도 국가가 됐다.

최근 들어 “지정학(Geopolitics)”이 부활하고 있다. 핵심은 이렇다. 냉전이 끝나고 여러 국가가 갈등을 자제하고 국제법 준수 등을 통해 평화로운 국제정치를 만들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순진했다.

중국은 팽창정책을 펼치고 미국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중국 주변 국가들을 동맹과 안보 협력 관계로 엮어서 중국을 포위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특히 아시아 국가들은 바다가 중요하다.

대륙 국가라는‘의식’과 슬픈 반도의 ‘현실’속에 사는 우리는 한반도의 안보 딜레마도 고민하면서 산업의 역량을 해양 지향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정부 정책·조직도 해운, 항만, 조선, 수산, 해양환경·과학 등을 아우를 수 있도록 확대 개편하고 바다와 친숙한 레포츠, 프로그램을 국민에게 제공하는 등 다양한 인프라를 조성해야 한다.

단순히 지리적 요인에 그치지 않고 해양 문화, 해양 민족이라는 정신적 요인까지 가미시켜 국민·정부·산업이 이해와 관심을 진정한 해양국으로 발돋움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우리 주위에는 섬들이 많다. 그중에 냉전의 섬들이 있다. 4.3의 아픔을 간직한‘제주도’, 한반도를 긴장하게 만든‘백령도’, 미국의 강력한 해외 기지‘오키나와’, 중국과 얽힌‘금문도’, 태평양 전쟁의 격전지‘사이판’이 있다.

사이판을 처음 발견한 이는 마젤란이었다. 그 후 스페인이 식민지배한 후 독일에 팔았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는 일본이 점령했다. 1944년 태평양 전쟁 때 미국이 이 섬을 빼앗은 후 2009년부터는 미연방에 정식 편입했다.

얼마 전 사이판 지역에서 돌아가신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분들의 자녀를 모시고 강제동원지, 제2차 세계대전 격전지를 방문하면서 추모제를 개최했다. 자살절벽, 조선인을 노무 동원한 설탕 농장, 일본으로 향한 원자폭탄 출발지 등 많은 현장을 유족분들을 모시고 순례했다.

이번 추도순례에 참여한 유족들의 아버지들은 군인·군속으로 모두 1944년 6~7월 사이에 희생되셨다. 추도순례를 통해 치열했던 사이판 전투, 영혼의 모습들이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유족들은 유복자와 갓난아기 때라 대부분 알 수 없는 그리운 아버지 얼굴을 갖고 있다.

사이판 우거진 풀잎에 맺힌 먹먹함이 유족의 눈동자에 거미줄처럼 떠다니며 추모제는 시작했다. 그나마 헛헛한 마음을 유족·재단 부이사장님외 사이판 한인회 회장님과 많은 교민, 외교부 주하갓냐 출장소장님이 참석해주셔서 위로와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추도순례 참가 유족을 대표하여 평생의 기억을 추모사를 통해 기록으로 남겨주신 글이 아직도 생생하다.

“저의 어머니는 저를 부둥켜안고 노래를 자주 불러주셨어요. 아버지를 평생 그리워하다 75세의 일기로 하늘나라로 가셨죠.”

“용한 점쟁이가 아버지가 살아있다고 했지만 애절한 노래가락 속에 떠나간 아버지를 늘 무심하게 그리워하시면서 노래를 부르셨어요.”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 요만은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러주나 휘파람 소리~.”

집에 가는 비행기에서 보는 사이판은 아름다웠다. 천국의 아름다움 속에 전쟁의 슬픈 영혼의 조각들을 간직한 냉전의 섬.누군가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였으리...

lgb1461@naver.com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