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 경영학 박사(한국물류포럼 대표, 전 KMI 기획조정실장)

박태원 박사
박태원 박사

“세계화는 거의 끝났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지난해 12월, 모리스 창 TSMC 창업자의 말이다. 대만의 TSMC가 미국 애리조나 공장에서 2024년에 4나노, 2026년에 3나노 공정의 반도체를 만들기로 했다. 그동안 대만에서만 초미세 공정을 적용하던 TSMC가 미국의 압박에 백기를 든 형국이다. 이번 결정은 수십 년을 이어온 반도체산업의 글로벌 분업화가 사실상 막을 내렸음을 의미한다.

미국은 1990년에 세계 반도체 생산의 37%를 차지했지만, 2020년에는 12%까지 내려앉았다. 부가가치가 높은 시스템 반도체를 중심으로 설계에 집중하고, 생산은 대만과 한국 등 아시아 국가에 아웃소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로나19로 반도체 공급난을 겪은 데다, 중국이 반도체 굴기를 선언하자 미국은 전략을 바꾸었다. ‘메이드 인 USA’를 외치며 반도체를 안보 자산으로 패권 경쟁에 나섰다. 미국의 정책 변화로 인해 반도체를 둘러싼 합종연횡을 두고 각국이 서로 눈치 보기에 여념이 없다.

미국이 중국을 배제하고 자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을 선언하자 EU와 일본도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EU 집행위원회는 430억 유로를 투자하여 2030년까지 유럽 내 반도체 생산 비중을 20%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에 초점을 맞춰온 일본도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1조엔 규모의 반도체산업 지원기금을 조성하기로 했다. 이에 뒤질세라 중국은 반도체산업에 1조 위안 이상의 지원책을 마련하면서 맞불을 놓았다.

지난해 삼성전자는 업황 악화로 인하여 반도체 사업에서 겨우 적자를 면했다. 어닝쇼크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는 “인위적 감산은 없다”며 정면 돌파를 선언했다. SK하이닉스도 최악의 경영실적을 내놓았다. 지난해 4분기에 1조 7천억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의 영업이익 4조 2천억 원과 비교하면 믿어지지 않는 실적이다. 이러한 가운데 일본과 네덜란드가 미국과 함께 중국을 견제하는 반도체 동맹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과 중국을 둘러싼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이 점입가경이다.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된 재벌가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있다. “새우가 고래 싸움에 등 터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돼?”라고 묻는다. 그러자 “몸집을 키워야 한다”고 대답한다. GDP 규모가 우리보다 13배가 큰 미국, 9배가 큰 중국 그리고 일본과 대만이 앞다투어 우리보다 훨씬 더 기민하고, 일사불란하게 반도체산업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한국은 지금 자칫하면 반도체 패권 경쟁에서 낙오될 위기에 직면했다.

필자는 지난해 3월에 「글로벌 해운 공룡들의 경영전략, 무엇이 다를까?」의 칼럼에서, 스위스 선사인 MSC와 덴마크 선사인 머스크의 경영전략의 차이점을 언급했다. 2M이라는 해운동맹을 맺고 한 지붕 두 가족을 이루고 있는 거대 해운기업들의 경영전략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었다. MSC는 선박량의 확충에 집중하고 머스크는 종합물류사업의 확충에 주력해 왔다. 그러나 MSC가 추구하는 규모의 경제와 머스크가 추구하는 범위의 경제는 지향하는 목표가 같다. 사업역량 강화를 위한 포트폴리오의 우선순위에 차이일 뿐, 글로벌 물류 공급망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기 위해서다.

지난 1월 말에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글로벌 해운시장을 호령하고 있는 세계 1, 2위의 해운 공룡, MSC와 머스크가 갑자기 결별을 선언했다. 2M 체제가 2025년 1월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2M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선박 과잉으로 인한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2015년에 도입되었다. 그동안 MSC는 2021년에 머스크를 제치고 세계 최대의 해운기업이 되었다. MSC는 선박량 확충을 계속하면서 세계 최대의 선사로 우뚝 섰다. 이에 반해 머스크는 일관되게 종합물류 전략을 추구해 왔다.

컨설팅 회사, 드루어리는 세계 최대의 해운동맹인 2M의 해체는 나머지 두 해운동맹인 오션 얼라리언스와 더 얼라이언스에게도 영향을 미쳐, 글로벌 해운시장의 급격한 재편을 가져올 것으로 내다봤다. 약육강식의 치열한 경쟁을 우려하고 있다. 또 다른 컨설팅 회사, 베스푸치 마리타임은 “향후 1∼2년 동안 무너질 많은 동맹 도미노 중에 첫 번째”라며 글로벌 해운시장의 파란을 예고했다. 전문가들의 전망을 종합해 볼 때 MSC는 독자노선을, 머스크는 새로운 동맹을 선택할 것으로 예상된다. 동맹 해체 시점인 2025년 1월까지 글로벌 해운시장의 지각 변동은 불가피해 보인다.

얼마 전에 산업은행은 우리 국적선사인 HMM의 매각 방침을 발표했다. 올해 7월 안에 주식매매계약 체결을 목표로 연내 실사 등을 거쳐 매각 절차를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산업은행은 HMM이 자생력을 가진 정상기업이 되었기 때문에 매각이 기본 원칙이라고 했다. 그리고 해운업은 전체적인 그림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어 관련 정부 부처와의 협의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금 글로벌 해운시장은 다시 불황의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세계적인 경기 침체로 인하여 해상물동량은 감소하고 있는 반면에 선박량은 오히려 증가했기 때문이다. 향후 글로벌 해운시장은 2M 결별의 후폭풍과 맞물려 해운기업들의 생존경쟁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해질 것이다. 반도체 패권 경쟁의 기시감이 든다. 우리의 최대 국적선사인 HMM은 글로벌 거대 해운기업들과 경쟁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몸집을 더 키워야 한다. 늘려야 하는 선박 포트폴리오와 엮어야 하는 글로벌 물류망도 까마득하다. HMM의 매각은 아직 이르다. 해양수산부의 발 빠른 대응을 기대해 본다.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