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 경영학 박사(한국물류포럼 대표, 전 KMI 기획조정실장)

박태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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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M의 전신인 현대상선은 현대중공업이 만든 선박이 인도되지 못하자, 현대그룹이 1976년에 설립한 아세아상선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아세아상선은 1차 오일쇼크의 여파로 발주처에서 인수를 거부한 초대형유조선 3척으로 시작했다. 1983년에 현대상선으로 이름을 바꾸고 신한해운과 합병했다. 그 이후에도 여러 해운회사를 인수·합병하면서 몸집을 키웠다. 1990년대 외환위기에는 우리나라 기업 중에서 유일하게 호황을 누리며 세계 10위권 선사로 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와 해운업 불황으로 인하여 현대상선은 긴 적자의 수렁에 빠졌다. 그 당시 머스크와 MSC를 중심으로 글로벌 선사들은 선박의 크기를 대형화했다. 바야흐로 원가를 절감하고 운임을 낮추는 ‘치킨게임’이 지속되었다. 파산하거나 인수당하는 선사가 속출했다. 유동성 위기에 시달리던 현대상선도 고강도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자동차운반선과 LNG선, 전용선 사업부가 차례로 매각되었다.

현대상선은 2002년에 자동차선 사업 부문을 스웨덴 선사인 왈레니우스에게 매각했다. 연 매출 1조 2천억원으로 전체 매출의 3분의 1에 가까운 핵심 사업 부문이 외국 선사로 넘어갔다. 알토란 같은 자동차선 사업 부문이 해외로 매각되었다. 그 당시 왈레니우스는 15억 달러의 인수대금 중에서 3억 달러만 지급했다. 나머지 12억 달러는 국내 은행권의 대출로 충당했다.

현대상선이 휘청일 때 자동차선 사업 부문을 인수한 스웨덴의 왈레니우스는 노르웨이의 윌헴슨과 한국의 현대차와 함께 합작회사, 유코카캐리어스를 설립했다. 왈레니우스가 40%, 웰헴슨이 40%, 현대차가 20%의 지분을 각각 투자했다. 유코카는 2002년에 출범과 함께 매출액 2조 5천억원, 당기순이익 2천억원을 기록했다. 현대차 그룹의 현대글로비스가 해운업계에 뛰어들면서 유코카의 운송 물량은 감소했지만, 지금도 해외 물량의 40%를 운송하고 있다.

HMM은 지난 3월에 열린 이사회에서 자동차선 신조에 관한 신규시설 투자 안건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중국 광저우조선과 8600ceu급 자동차운반선 3척을 건조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들 선박은 2025년부터 2026년까지 순차적으로 HMM에 인도될 예정이다. HMM이 다시 자동차운반선을 발주한 것은 현대상선 시절인 2002년에 자동차선 사업 부문을 매각한 지 21년 만이다.

최근 극동아시아의 자동차 수출 물량이 증가하면서 자동차운반선의 부족 현상이 심각하다. 완성차 업계는 물류비 상승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작년 말 기준으로 자동차운반선의 용선료는 코로나 이전인 2019년보다 3배 가량 높아졌다. 급기야 지난 3월 말에 해양수산부와 산업통상자원부가 나섰다. 한국해운협회와 한국자동차산업협회가 ‘자동차 물류 원활화 및 자동차·해운 산업의 동반 성장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해운업계는 완성차 업계에 최대한의 적재 공간을 제공하고, 완성차 업계는 해운업계에 안정적인 화물 운송 기반을 제공하기로 했다.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 당시 자동차운반선 사업 부문에서 세계 3위를 꿈꿨던 현대상선의 위상이 떠오른다. 만약 정부 관료와 금융권의 무리한 구조조정과 자구 노력 강요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서 수익이 보장된 알짜 사업 부문의 해외 매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해운산업에 대한 정책 당국의 무지와 무능이 빚은 참담한 결과가 안타깝기 그지없다.

지난달부터 현대LNG해운의 해외 매각을 둘러싸고 해운업계가 들썩이고 있다. 현대LNG해운은 2014년에 현대상선이 사모펀드 IMM 컨소시엄에 매각한 LNG 사업 부문으로 설립된 국내 최대의 LNG 운송 선사이다. 지난 3월 초에 IMM 측이 현대LNG해운의 해외 매각을 위한 예비 입찰을 단행했다. 그리고 미국·영국·그리스·덴마크 등 해외 기업 5곳을 적격 인수 후보로 압축했다. 본입찰은 이르면 이번 4월 중에 실시될 예정이다. ​

현대LNG해운의 해외 매각을 반대하는 여론이 팽배하자, 해양수산부는 뒤늦게 해외 매각에 대비한 시나리오별 대응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산업은행 등 정책금융기관을 통해 HMM 등 국내 기업이 현대LNG해운을 인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정부가 이처럼 현대LNG해운 매각에 따른 대응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은, 국내 유일의 LNG 운송 전문 선사인 현대LNG해운이 해외에 매각되면 에너지 공급망이 취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 각국은 앞다투어 자국의 주요 산업을 지원하는 산업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과거 자유무역 체제하에서는 WTO가 엄격하게 산업 보조금을 규제했고 각국도 특정 산업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의 산업정책을 자제했다. 하지만 2022년부터 미국이 자국 반도체나 배터리 산업을 육성하는 노골적인 산업정책을 들고나왔다. 이에 자극받은 EU도 지난 3월 16일 탄소중립산업법안(NZIA)을 발표했다. 환경 산업에 대한 규제 완화와 기술개발 지원 강화로 EU 역내 생산능력의 확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에 뒤질세라 중국도 일본도 저마다 자국의 핵심 산업을 지원하는데 안간힘을 쏟고 있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무역수지는 13개월 연속으로 적자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 반도체 회사들이 향후 중국에서 사업 확장을 기약하기 어렵게 되었고, 우리 전기차가 미국 시장에서 불리한 경쟁 환경에 처한다는 걱정도 크다. 이제 우리도 선제적인 산업정책으로 기업들을 지원해야 한다. 국익을 우선하는 혁신적인 산업정책이 필요하다. 해운산업에 대한 정책도 더욱 진화해야 한다. 더 이상 뒷북만 쳐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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