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와의 대화

-김문호(한일상선 前회장,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해양문학 연구위원장)

김문호 사장
김문호 사장

김 :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이 봄에도 아프리카에서 지중해를 건너오는 남풍 노투수가 감청 바다를 덜 익은 가시내의 가슴처럼 부풀리면서 올리브나무와 포도넝쿨의 새순을 틔우겠지요. 이내 5월로 들어서면 세루비어, 천리향 향기가 온 섬을 점령하면서 여인네의 보디스 앞섶을 더듬겠고요.

카 : 그렇긴 하오만 어인 노릇이오? 허깨비처럼 날리는 영상에 사람의 음성 같지 않은 소리로 불러대니 말이오.

김 : 소위 원격 비대면 만남이란 시대의 괴상(怪狀)입니다. 용서하십시오. 미증유의 코로난가 뭐라는 전염성 괴질 탓입니다. 지구교통이 전면 차단되면서 아테네까지 날아오던 항공로는 물론 본토 남단의 피라에우스 항구에서 섬으로 연락부절하던 뱃길마저 두절되다시피 했습니다.

카 : 심심찮게 찾아오던 발길이 끊어지는 걸로 짐작은 했지만, 그만한 줄은 몰랐네요. 그러나 코로나가 처음 있는 괴질은 아닙니다. 광관(光冠) 형태의 바이러스로 전염된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 붙여진 그것은 이전에도 있었지요. 다만 규모나 독성이 대단하지 않아서 쉽게 퇴치되면서 인체를 닮은 포유류의 유전자나 극지방 어름더미에 묻혀 있다가 알맞은 환경이 조성되자, 되살아나서 그야말로 창궐하는 겁니다.

김 : 정녕 그런 것 같습니다. 이번 코로나가 중국 내륙지방의 동물 식자재에서 발생했다는 말이 있거든요.

카 : 전 유럽 인구의 30퍼센트를 쓰러뜨린 흑사병 또한 그 발원지가 중국이었소. 그곳에서 타슈켄트, 흑해와 크림반도를 거쳐 이탈리아로 이어지는 전염경로였지요, 그러나 중국인들의 불결한 생활양식이나 괴팍한 식도락이 코로나의 근원이라는 진단은 지엽적인 것이오. 그것보다는 중국이라는 거대 인간집단이 문제의 본질인 거요. 사막과 산악지대를 빼고 나면 얼마 되지도 않는 땅에 전 유럽 인구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붙어살면서 유한한 지구의 자정능력을 깔아뭉갠단 말이오.

지구환경 파괴의 주범은 바로 인간 자신들인 것이오. 나그네로 잠시 들렀다 떠나는 주제를 주인인 양 착각하면서 무한 소유욕의 마구잡이 소비를 생각 없이 자행하거든요. 플라스틱의 편의 하나만으로도 지구의 온도를 훌쩍 올려놓았잖소. 요만한 지구 균형의 일탈만으로도 코로나 같은 괴질이며 폭우, 폭설, 폭서 등, 이상 기후의 온상이 되는 거요. 지구의 내일이 걱정이오. 어쩌면 이미 절망적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소. 그런대 참, 이만한 와중에 이곳까지는 어인 일이시오?

김 : 그간 형기도 없는 수형생활이었습니다. 한 달, 두 달 세면서 설마를 되풀이하다가 3년이 넘자, 저마다의 인내력이 바닥을 드러낸 것이지요. 중국에서는 수백만 인구의 거대 도시를 대문에 대못질하기도 했다니까요. 믿을 수 없도록 얄팍한 인류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는 참담이었지요. 그러면서 문득 선생님이 떠올랐습니다. 선생님의 명저 ‘그리스인 조르바(Zorba the Greek)’에서 “인간이라니 도대체 그게 뭐요?” “그건 바로 자유란 말이오.”라는 구절과 함께 말입니다.

카 : 선생, 자유니 뭐라는 말은 나도 잘 모르오. 그쪽 세상에서 생각 없이 갈긴 구절들을 그냥 두고 온 것이 지금껏 후회막급일 따름이오. 이제 겨우 밤잠이나마 제대로 챙길 만하니 제발 방해하지 마시오.

김 : 미노아 문명의 본거지인 크레타에서 태어나서 아테네대학과 파리의 두 대학에서 법률과 철학을 전공하시고 그리스의 야당 당수와 장관을 지내면서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여러 번 오르셨던 선생님의 겸사라니 가납키 어렵습니다. 지금 이쪽 세상은 코로나의 와중에 전쟁까지 겪고 있습니다. 최대의 밀 수출국과 원유 생산 국가가 성능 좋은 무기로 살육전을 벌이는 통에 곡물과 에너지의 가격이 폭등하면서, 이미 피폐해진 삶들이 궁핍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서생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카 : 듣고 보니 딱하긴 하오. 내가 말려드는 것 같지만 기왕지사 좋소. 나도 조금은 무료하던 참에 잠은 이미 달아나버렸으니 말이오. 도대체 나를 어떻게 아시오?

1946년 발간된 '그리스인 조르바' 초판 표지
1946년 발간된 '그리스인 조르바' 초판 표지

김 : 선생님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처음 만난 것은 항해를 하던 젊은 시절이었습니다. 땅 위의 안일 보다는 대양의 모험이라는 나름의 기백에도 놀라운 충격이었지요. 거기에 ‘나는 가진 것이 없다. 따라서 두려움도 없다. 나는 자유.’라는 선생님의 묘비명은 칠흑 야간 항해의 등댓불 같은 섬광으로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카 : 듣기는 좋소만 이제 그 낯간지러운 언사는 삼가시오. 그런 건 내가 가장 싫어하는 짓거리로서 오늘의 만남을 공허하게 만들 뿐이오.

김 : 과연 짐작한 대로 호방하십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소설을 영화로 찍으면서 주인공을 맡았던 미국 배우 안소니 퀸도 인생을 많이 배웠다고 했더군요.

카 : 자유가 곧 질서라는 생각입니다. 하늘에서 땅을 떼어내고 땅에서 물을 갈라낸 다음 무지근한 대지에서 맑은 하늘을 분리하면서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진행하는, 자연 아니면 신의 작용이겠지요. 각기 다른 위치와 방향에서 곱게 조화하는 코스모스 여덟 꽃잎의 사통팔달 같은 것 말이오. 그러므로 사람들은 누구나 자유롭게 살 권리와 의무를 타고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막상 그렇게 살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소. 세상이라는 생존여건 속에는 수많은 장애요인들이 산재하거든요. 그건 아마 아담과 이브가 에덴을 쫓겨나면서부터 부과된 원죄 아니면 업보 같은 건지도 모르겠소.

김 : 조르바가 적국 불가리아에서 그곳의 악질반동 신부를 죽인 이야기 같은 것이겠지요. “그 얼마 후에 다시 그 마을에 잠입했다가 열 살에서 갓난아이로 보이는 다섯 남매의 맨발 거지행렬을 만났지요. 어느 집 아이들이냐고 물었더니, 우리는 신부님 댁 애들인데 아버지가 마구간에서 목이 잘려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바로 그 순간 지구가 연자 맷돌처럼 뱅뱅 돌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지갑은 물론 겉옷까지 벗어주고 마을을 빠져나와 목에 걸린 성 소피아성당 장식을 떼어내어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도망쳤지요. 지금도 계속 도망치고 있습니다.”라는 구절 말입니다.

그 전에도 불가리아에 잠입했던 일이 있었지요. 지붕을 건너뛰며 쫓기다가 밑으로 뛰어내렸는데 불가리아 여자 하나가 침대 위에서 자고 있었고, 그녀의 침대 속에서 남편 행세를 하면서 추격자들을 따돌릴 수 있었지요. 그는 밤새 과부와 체온을 나누었고 새벽에는 그녀가 내어주는 옛 남편의 옷으로 갈아입고 도망쳤지요. 그때 여자는 그의 무릎을 잡으면서 다시 돌아오라고 애원했고요.

카 : 그가 돌아가긴 했지요. 바로 다음날 밤에요. 파라핀 한 통을 동네에 뿌리고 불을 질렀지요.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되는 비밀요원의 수칙이었거든요. 물론 그 과부도 타죽었겠지요. 그러면서도 그는 의기양양 태연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그는 열렬한 애국자였고 그의 행위는 모범적 군인의 탁월한 수완이었으니까요. 국가는 그런 전과(?)를 훈장으로 포상합니다. 그러면서 결국 한 인간의 자유를 깔아뭉개는 거요. 자유의 기본 덕목이 양심인데 국가는 그것마저 법률의 이름으로 징발하거든요.

김 : 국가라는 조직과 개인의 자유가 병존하기 어렵다는 말씀으로 알아듣겠습니다. 한 예가 될지 몰라도, 우리 해동국의 옛 왕조 신라에 진흥이라는 시호의 임금이 있었습니다. 국토를 가장 많이 넓힌 왕으로서, 선대에 들어온 불교를 국교로 숭상하고 황룡사를 창건하는 외에 화랑도를 양성하면서 삼국통일의 기반을 구축한 불세출의 지도자였지요. 그런 그가 국토의 외연을 답사하면서 자신이 다녀갔다는 표석 몇 개를 세우고는 아들에게 양위한 뒤, 감물 누비옷으로 갈아입고 산상토굴에서 여생을 지냈답니다. 그것도 전쟁으로 수많은 장정들을 죽이면서 넓은 땅을 빼앗았던 이웃 나라에서 말입니다. 죽고서야 넘기는 왕위를 스스로 벗어던진 혈혈단신으로 자신을 원수로 벼르는 적국의 심장부를 찾아들 만큼 자유란 대단한 것인지요.

카 : 놀랍습니다. 왕자의 지위를 짚나라미처럼 내던지고 설산으로 들어간 싯다르타에 비견할 만합니다. 그러나 그런 어른들의 경지야 감히 짚을 길이 없고, 우리네 생활인의 자유란 그 첫째가 누구든 신체와 정신을 구속 받지 않는 겁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능력과 취향을 맘껏 가꾸는 자유, 마지막 세 번째는 자신이 터득한 이치와 역량을 세상에 펼치는 적극적 자유인 거요. 이를 정리한 중국의 고전이 있지요. ‘논어’의 시작이자 총론이라 할 학이(學而)편의 첫 세 구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혼자서 자족하는 기쁨(學而時習之悅), 토론하며 터득하는 즐거움(有朋自遠方來之樂), 그리고 세상(人)에 뜻을 펼치는 보람이지요. 이 중 세 번째가 문제여서 세상은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서로 의견이 다른 정파가 다투면 정쟁, 나라끼리 붙으면 전쟁이지요. 이를 예견한 공자는 그 대비책을 마련해 뒀는데도 말입니다. 군자라면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다투지 말아야 한다(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는 셋째 구절이지요. 그러나 세인들이 유학의 이상형 인간인 군자에 이르지 못하는 탓에 유사 이래 세상은 파쟁으로 소란합니다.

김 : 동서와 고금을 꿰뚫는 혜안이십니다. 그러나 결론은 조르바가 “미친 개 같은 내 조국”이라고 했던, 국가가 인간의 자유를 작살낸다는 말씀이네요. 그래서 선생님께선 젊은 시절의 공산주의, 민족주의에의 경도를 거쳐 비 공산 좌파정당을 창당하고 당수까지 지냈던 것인지요.

신라 이야기를 조금 더 할까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진흥왕의 3대 뒤가 선덕이라는 여자 왕이었습니다. 성골 신분의 남자가 없었기에 처음으로 추대된 여왕이었지만 어느 남자 왕보다 지혜롭고 영민했습니다. 거기에 빛나는 미모였지요. 바로 이 여왕을 사모하는 거렁뱅이 사내가 있었는데 눈만 뜨면 간곡한 눈길로 여왕의 행차를 따라다녔답니다. 그러자니 여왕도 사내의 눈빛을 알아차렸겠지요. 여왕이 어느 절에서 법회를 마치고 내려오는데 사내가 섬돌 옆에 잠들어 있었고, 여왕은 자신의 순금 팔찌 한 짝을 사내의 품에 안겨주고 떠났답니다. 잠을 깨면서 여왕의 팔찌를 발견한 사내는 온 세상을 품에 안은 듯 행복했겠지요. 그러면서도 여전히 애인(?)의 행차를 수행하던 어느 날이었지요. 시뻘건 장작불 옆에서 여왕이 기우제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연방 절을 하며 빌어도 하늘은 뙤약볕만 쨍쨍할 뿐, 비를 내릴 기색이 아니었습니다. 땀에 젖은 혼신으로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애인의 모습을 더는 지켜볼 수 없었던 사내가 장작불 속으로 뛰어들었지요. 그러자 하늘에서 장대 같은 소나기가 쏟아졌답니다.

카 : 대단합니다. 조금은 각색된 이야기라 하더라도, 미모의 여왕과 온전치 못한 사내의 사랑이란 설정 자체가 예사 아닙니다. 그건 바로 국가라는 테두리에도 자유가 건재 한다는 방증인 동시에 인류가 지향해야 할 이상향의 표상이거든요.

김 : 여왕이 임종을 앞두고 자신은 도리천(忉利天)으로 가고 싶다고 유언했습니다. 신하들이 못 알아듣자, 여왕은 궁궐 남쪽의 낭산(狼山) 꼭대기가 바로 그곳이라고 말하고는 눈을 감았고요. 신하들이 긴가민가하면서 그대로 장사지낸 얼마 뒤에 사천왕사라는 절이 바로 그 낭산 중턱에 섰습니다. 그제야 신하들이 무릎을 쳤답니다.

카 : 놀라운 일이오. 욕계(欲界) 여섯 하늘 중 두 번째인 도리천은 수미산 꼭대기에 있고 사천왕 네 신장(神將)이 사방에서 불법을 옹호하는 사왕천(四王天)이 바로 그 아래 수미산 중턱이거든요. 따라서 그곳 낭산이 곧 수미산이면서 신라는 가릉빈가 새가 울고 우담바라 꽃이 핀다는 부처의 나라, 즉 서방정토였던 것이지요. 유럽, 러시아에 이어 중국과 일본을 여행하면서도 귀국을 건너뛴 것이 새삼 후회스럽습니다. 일찍이 인도의 시성 타골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노래한 적이 있었는데도 말이오. 싯다르타가 열반에 든 지 천 년도 더 되는 신라에 그만한 불국토가 피어 있었다니 진정 놀라운 일이오.

김 : 너무 튀기시니 어리둥절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우리 해동국은 천축국의 동방이지 서방이 아니었거든요.

카 : 선생, 항해까지 했다면서 그러시오. 동쪽과 서쪽이라는 구분이 어디에 있소? 대항해 시절에 동쪽으로 돛대를 세웠던 포르투갈의 항해사들과 서쪽 항해의 닻을 올린 스페인의 바다사내들이 만난 곳은 서태평양 셀레베스 인근의 작은 섬, 몰루카라는 향신료 집산지가 아니었던가요?

김 : 선생님의 가없는 지혜지식의 바다에 한갓 나뭇잎의 부유가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그때 유빙과 눈, 파도뿐인 북태평양 대권항로에서 조르바를 처음 만나면서부터 크레타와 선생님의 유택 순례가 내 버킷 리스트 1호로 들어앉은 것은 사실입니다.

카 : 이번에는 내가 전차에 부딪친 듯 어리둥절하오. 낯간지럽게는 하지 마시오.

김 : 그곳 미노아, 혹은 미노스 문명이 미케네와 로마를 거쳐 오늘의 서구문명으로 피어난 것은 사실(史實)이지요. 바로 그 문명의 요체가 자유라는 생각입니다. 알렉산더의 4만 군단이 다리우스의 20만 대군을 깨뜨리며 승승장구한 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유인과 노예인의 집단이라는 차이밖에 없거든요. 그만한 원동력이 아니고서야 4천 년도 더 전의 크레타 원류가 오늘까지 연연하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요.

잘생긴 황소를 보고 침을 흘리던 미노스왕비가 나무로 만든 암소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의 씨를 받았지요. 그렇게 두우신인(頭牛身人)의 아들(?)이 태어나자, 왕은 아들을 미로 속에 가두고 약소국 아테네로 하여금 매년 12명의 선남선녀를 괴물 아들의 먹이로 바치게 했고요. 그러던 중 아테네의 무사가 바로 그 괴물을 없애기 위해 크레타로 오자, 그에게 반한 공주가 아마 실타래로 그를 도우면서 아버지를 거역했지요. 그러나 왕은 왕비와 공주 모녀를 처벌하지 않았어요. 음란한 왕비의 추잡한 치정과 공주의 배신까지도 자유라는 이름으로 용인된 것 아니겠습니까.

카 : 그런 것은 신화에나 있는 일이잖아요.

김 : 신화라고 해서 사뭇 황당하지는 않다는 생각입니다. 몇몇 편린들이 미심쩍다 하더라도 원류를 관통하는 맥락은 정연하거든요. 우리 해동에도 쑥과 마늘을 먹고 여자로 변한 곰이 최초의 어머니였다는 건국신화가 있지요. 더구나 귀국 그리스의 고대사는 신화와 사실의 범벅이라고 할 만하고요. 파리스의 사과는 신화에서 따오면서 그로 인한 트로이 전쟁은 역사로 기록하는 식 말입니다.

카 : 어느 나라든 오랜 역사에는 다 그렇소. 맨 처음 누구 한 사람이 그렇다고 말하면 그렇게 되는 거요. 쿡 선장 일행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이상한 짐승을 보고 뭐냐고 묻자, 원주민이 캥거루라고 대답했지요. 캥거루란 말은 ‘나는 당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 한다’는 뜻이었다는데 말이오. 다소 황당하긴 해도 허위나 날조는 아니잖소. 그래서 신화와 역사는 서로 우호적으로 넘나들면서 생동감을 더하기도 하는 거요. 선생이 지적한 트로이 전쟁도 그렇소. 그것의 본질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가 젊고 잘생긴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눈이 맞아서 벌인 사랑의 도피 행각이었소. 허울뿐인 왕비 대신 사랑을 택한 헬레네의 자유 선언이었지요. 바로 이것이 골자인 거요. 전쟁은 동생의 복수심을 활용한 형 아가멤논의 정략이었고요. 당시 트로이의 막강 해상세력은 미케네 세계의 눈엣가시였거든요. 시인 호메로스가 그것을 신화까지 끌어들이면서 일리아드란 대서사시로 각색해 놓은 거요. 중국 어느 황제와 양씨 귀비의, 별것도 못되는 사랑 이야기를 ‘장한가’란 절창으로 미화해 놓은 백 뭐라는 시인처럼 말이오.

김 : 그렇다면 ‘인형의 집’의 노라가 서구 최초로 여성의 자유와 권리를 주창했다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카 : 그럼요. 우리 그리스를 그들 프랭코와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아니지요. 저들은 역사가 일천해서 누가 캥거루라면 그냥 그렇게 믿는 거요. 예수 하나면 만사가 형통인 거지요. 그러나 그리스는 그들처럼 단순하지 않아요. 저들의 종갓집이라 할, 길고 찬란한 문명의 역사에 씻기면서 살아온 때문이오. 그리스 정교는 저들의 카톨릭과 차이가 있지요. 조르바가 목을 땄던 불가리아의 신부는 국가기관의 비밀요원이면서 다섯 남매의 아버지였잖아요. 종교라 해도 신의 독점은 아니라는 거지요.

김 : 독일, 아니 스위스의 헬만 헤세도 알에서 깨어난 새는 아프락사스를 향해 날아간다고 했더군요. 그것은 신성과 인성을 함께 지닌 그리스의 신이라면서 말입니다.

카 : 인간의 대표적 욕구가 식욕, 성욕, 명예욕이라면 그것 모두가 자유라는 겁니다. 여자 동성애자를 말하는 레즈비언, 그 반대의 소도미스트 같은 말도 다 그리스 태생이지요. 그러면서 미청년을 따라서 가출했던 헬레네, 레스보스 출신이라고 해서 자신의 여비서와 함께 레즈비언의 효시가 되었던 여류시인 사포, 선생이 말했던 최초의 왕비 미노스왕비까지도 변함없는 사랑과 존경의 대상인 거요. 음탕한(포르네), 엉덩이가 예쁜(칼리퓌게스), 등의 수식어가 이름 앞에 붙으면서 남자 신들의 찬탄 겸 놀림의 대상이었던 아프로디테 역시 그리스의 3대 여신에 속하면서, 주신 제우스의 아내 해라,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네와 파리스의 사과를 다투어 쟁취할 만큼 쟁쟁했거든요. 바로 이것이 그리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서쪽 지중해 연안의 착하고 단순한 유럽인들을 프랭코라고 비하해서 부른답니다.

김 : ‘8조의 금법’만으로도 충분히 평화롭던 우리의 고대에도 레즈비를 뜻하는 밴대질, 소위 그리스 사랑(Greek love)의 비역질이란 고유어가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성의 자유, 여성지위의 건재를 뜻하는 것이지요. 조르바도 말했더군요. 세상에서 기쁨을 주는 것은 과일, 여자, 이상이라면서, 여자를 만나면 향기로운 과일을 앞에 두고 그러듯, 당신을 갖고 싶다고 말하면서 기쁨을 주는 것이 남자의 도리라고 말이오.

카 :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페(Europe)가 해변을 산책하는 모습에 동한 제우스가 황소로 변하여 그녀를 유혹한 다음 등에다 태우고는 에게 해 건너 크레타로 헤엄쳐가서 미노스 왕을 낳았고 그 후예가 오늘의 유럽인 거요.

김 : 선생님, 잠시 말씀을 자르겠습니다. 우리 해동국의 신화에서도 제우스와 같은 하느님의 아들이 예의 곰 여자를 건드려서 첫 임금을 낳았거든요. 그런 우리의 첫 임금과 미노스 왕의 연대가 비슷한 것 같아서 놀랍습니다.

카 : 지금은 피폐했지만, 그래도 종갓집으로서의 족보와 찬연한 역사의 유적을 지닌 내 조국 그리스를 사랑하려고 노력했소. 그래서 정당을 만들고 천하를 주유하기도 했던 거요. 그러나 맘대로 되지 않았소. 국가라는 것은 깊고 어두운 바다 속을 헤엄치는 고래와 같아서 언제 어디로 튀고 내달릴지 모르는 생물이었소. 바로 그 생물이 가끔은 곱고 때로는 미웠소.

김 : 소설 속 화자에겐 외국유학을 함께한 두 사람의 절친이 있었지요. “그리스, 우리 조국, 의무 같은 게 다 뭐야? 진실은 여기 있는데.” 라는 화자의 지적에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도 우리는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어야 해.”라면서 코카서스애서 볼세비키와 쿠르드에 당하고 있는 50만 동포의 구출에 일생을 건 친구였지요. 그리고는 그리스와 유럽이 싫어서 아프리카의 산간벽지에서 원주민 여자와 살고 있는, 젊은 시절에 신학교사 겸 신부였던 친구 말이오. 그도 묘비명을 작성해 뒀더군요. ‘여기 그리스와 그리스인을 증오하는 그리스인이 잠들다’라고요. 조르바도 한 마디 보탰고요. “두목, 오늘 탄광에서 인부들에게 얘기한 것 그게 뭡니까? 함께 일하고 같이 누리는 사회주의라고요? 참 개 코 같은 소리, 당신 목사요, 자본주요, 아니면 하느님이요?”라고 말이지요. 이런 것들이야말로 선생님의 삶이자 그리스 사랑인 동시에 십계명 이전의 원형질 자유를 타고나고 대물림하는 그리스인들의 꼴통 핏줄이 아닐 런지요. 진정 나를 매료시킨 것도 사실은 조르바의 꼴통이었거든요. ‘그의 가슴은 살아 있었고, 큰 입으로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면서 위대한 야성을 지닌, 아직 어머니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내’ 말이지요.

카 : 더 이상은 마음이 몸을 억누르면서 맘대로 지껄이거나 써 갈기지 않기로 했소. 영혼이 곧 육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내 몸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야수처럼 기뻐 날뛰게도 내버려 뒀지요. 그러면서 가끔은 무아의 경지에서 내 내부와 외부를 살피면서 육체와 영혼이 다르지 않다는 생명의 신비에 감탄하기도 했고요.

김 : 그건 바로 소설 속의 화자가 무화과 집 과부와 첫 경험을 하면서 터득하는 자유에의 개안이기도 했지요. 거기에도 조르바가 보탠 구절이 있었지요. 그럼 당신이 책을 한 번 써 보라는 화자의 말에 “못할 것도 없지요, 그러나 쓰지 않아요. 나도 당신이 느끼는 바로 그 신비를 몸과 마음으로 느끼느라 시간이 없거든요. 전쟁, 계집, 술, 산투리(전통 현악기)만으로도 눈코를 따로 뜰 새가 없다니까요. 그리고 한 번 웃고 날릴 이야기를 써서 남기면 뭐해요?”라고 말이지요. 그래도 그리스 작가협회는 선생님을 아홉 번이나 노벨상 후보로 추천했더군요. 마지막 표결에서 한 표 차이로 이긴 알베르 카뮈는 선생님이야말로 자신보다 몇 배나 합당한 수상자라고 말했고요. 그때 노벨상이 카뮈에게 돌아간 것은 하느님이 과부 마리아를 건드려서 예수를 낳았다는 조르바의 그 큰 입 때문이었을 겁니다. 거기에 가슴만 움켜잡으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치맛단을 풀어 내리는 착하고 귀여운 여자를 무조건 사랑해야 한다는 등의 구절들이 하느님과 마누라만으로 길들여진 프랭코 쪽 심사위원들을 돌려세웠을 것이고요.

카 : 그런 것은 잠시 걸쳤다 벗어던지는 옷가지와 같아서 이제 내겐 아무런 의미도 없소. 지금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섬에서 편한 잠을 자고 있으니 그걸로 그만이오.

김 : 조르바가 “저기 저 건너편의 파란 색깔, 가슴이 뭉클거리는 그 기적은 뭔가요? 바다라고 하나요? 초록빛 꽃으로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저건요? 대지라고 부릅니까? 이걸 만든 예술가는 도대체 누굽니까?”라며 흥분하던 크레타 말이지요.

카 : 그렇소. 유럽과 소아시아, 이집트로 만들어지는 삼각형의 세 꼭짓점을 등거리로 잇는 중심에서 무명(無明)의 지구를 문명으로 열었던 크레타요. 미케네의 번창과 트로이 전쟁, 그의 산물인 일리아드, 동시대인 이집트 제20왕조 람세스의 빛나는 치세와 그에서 눈뜬 모세의 자유선언 같은 고대 르네상스(?)도 알고 보면 700여년 이전의 미노아가 그 기원인 거요. 그러나 지금은 피폐한 종갓집으로서 역사와 흥망성쇠의 허무를 증언하는 외로운 섬이오. 그래도 자연은 여전히 신비로워서 내가 심심하지는 않소. 그렇지만 또 한편, 날아가는 구름이 크레타인지, 바다와 맞붙은 하늘이 그것인지, 나는 또 어디에 있는지 아리송할 때가 많소. 아시겠지만 중국의 현장이라는 스님이 인도를 유학하고 돌아와서 저술했다는 경전의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두 구절만이 무변의 진리인 것 같소.

김 : 선생님의 유명한 묘비명에도 그쪽 냄새가 짙습니다. 바로 그 한문 불경의 ‘마음에 거리낌이 없으니(心無가碍), 두려울 것 없고(無有恐怖), 마침내 자유(究竟涅槃)’라는 구절 말입니다. 그러면서 불교는 물론 동양의 역사와 철학에 대한 선생님의 내공이 대단하다는 것도 절감했습니다. ‘나는 언제 내 육신이 병이며, 죄악이며, 늙음이며, 죽음이란 확신으로 두려움 없이 숲에 은거할 수 있을까.’ 라던가 ‘나 역시 부처에 대한 원고를 열었고 내 갱도를 파고들었다.’라는 구절들이었지요.

그런 인연인지 몰라도 우리의 스님 한 분이 선생님의 유택을 참배한 뒤 ‘무소유’라는 책을 썼지요. 그러자, 명망 높은 추기경 한 분이 화룡점정의 축사를 했더군요. 스님께서는 무소유, 무소유 하시지만 스님의 무소유 한 권만은 꼭 소유하고 싶다고요.

카 : 진정 대단하오. 소위 유불선이 합일하는 귀국이야말로 진정 동방의 등불이오. 머잖아 우람한 꽃으로 피어날 거요. 그때면 나도 이쪽에서 박수를 치겠소.

김 : 선생님의 유택이 황량해서 안타까웠습니다. 의지가지없는 벌판에서 비바람에 젖고 쓸리는 나무 십자가 말입니다. 인본주의가 짙다는 그리스 정교의 교회 묘지가, 그래도 기독교인으로 살고 싶다고 고백했던 선생님의 운구를 문전박대했다는 사실이 의아했습니다. 그러나 장시간 선생님을 뵙고 나니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입니다. 해와 별, 풀벌레가 제한 없이 넘나드는 이곳이야말로 선생님만의 명당입니다. 그들 교회꾼들의 정형화된 유택이었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바람과 이슬을 맞으면서도 훤칠한 십자가처럼 우뚝한 선생님의 자유가 멋있고 부럽습니다. ‘나는 부처, 하느님, 조국, 이상, 이 모든 허깨비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바다, 여자, 술, 그리고 고된 노동에 자신을 바치고 하나님과 악마를 겁내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젊음이란 것이다’라던 구절처럼 말입니다.

바닷가 모래밭에서 잠든 조르바를 보고 감탄하신 적이 있었지요. ‘나는 달빛에 젖은 조르바를 바라보면서 주위 세계와 일치된 그 소박하고 단순한 모습, 모든 것-여자, 술, 빵, 물, 고기, 잠-이 유쾌하게 합쳐져서 그를 이루고 있음에 탄복했다. 우주와 인간이 그처럼 정답게 결합된 모습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라고 말입니다. 바로 그것이 지금 선생님의 모습입니다. 큰 바위 얼굴을 간곡히 기다리던 농부가 바로 큰 바위 얼굴이었던 미국의 어느 소설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에겐 ‘크레타의 들꽃 천리향’이란 별칭을 붙여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참 선생님, 우리 인간들은 어쩌다가 길든 짧든, 잠든 다음에야 자유요 평화가 되는 운명을 타고난 것일까요?

너무 많이 지껄였습니다. 어느새 일어설 때가 됐습니다. 코로나 연금이 풀리면 꼭 한 번 푸근한 시간을 잡고 와서 크레타블루 빛깔의 바다와 초록 섬, 크레타오린지 색깔로 익어가는 과일들과 들꽃 천리향의 향기에 젖으면서 수령 3천 년의 최고령 올리브나무를 만나보고 싶습니다. 책 속의 ‘우리 아가씨 무화과나무’도요.

선생님, 안녕히 계십시오. 아니, 그새 우주와의 결합에 드신 겁니까? 선생님의 자유를 훼방하지 않겠습니다. 더욱 곤하고 맛깔나게 명복을 누리소서. 끝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년 2월 18일 ~ 1957년 10월 26일)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년 2월 18일 ~ 1957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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