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병 경영학 박사(한국관세학회 이사,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팀장)

이기병 박사
이기병 박사

한곳에 모여 있는 많은 산. 군산(群山)을 다녀왔다.

군도의 섬들을 품고 있는 군산은 평화의 시기에는 무역항구로 번영했지만, 왜구가 쳐들어올 땐 주요 공격 대상이었다. 갈대밭만 무성하게 자랐던 군산항은 1899년 개항 이후 항구도시로, 물류 기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호남평야와 충청남도에서 생산한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내려고 외국인이 왕래하고 무역 활동을 할 수 있는 ‘개항장(開港場)’으로 지정했다. 말이 좋아 개항장이지 우리 민족의 오랜 친구인 질 좋은 쌀을 수탈해 간 ‘적출항(嫡出港)’이었다.

군산항은 1979년 ‘군산임해공단’ 건설에 맞춰 1부두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총 7부두까지 확장했다. 모래·역무선 등 부두 기능을 다각화했고 2008년 군산-중국 스다오(石島, 석도) 국제 카페리항로 개설로 국제항으로의 면모를 갖췄다. 이 항로는 한중항로중 최단 거리며 전라도의 유일한 국제카페리항로로 충청·경상권을 아우르며 양국 간 인적·물적·문화적 교류의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군산시는 전국 기초자치단체 최초로 2006년 화물 유치 지원 조례를 제정해서 군산항을 이용해 컨테이너 화물을 수출입하는 선사, 화주, 물류기업, 포워더에게 재정 지원을 했다. 뒤를 이어 항만이 있는 속초, 인천, 부산, 평택당진항 등에서 항만시설 사용료와 하역료 감면, 선사 인센티브 지급 등의 재정투자를 했다.

지금 군산항 인근에는 2026년 개장을 목표로 김제시가 앞장서 ‘동북아 물류 중심 항만’을 목표로 ‘새만금 신항’을 조성하고 있다. 항만개발은 국가의 정치·경제 상황과 성숙도, 국토의 균형발전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해운·항만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이런 것을 잘했던 런던, 뉴욕, 홍콩, LA, 도쿄, 싱가포르는 항만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경제 성장에 중요한 기반 시설이자 산업의 파급효과가 커 선진국들은 국가 주도로 항만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중앙정부 중심의 관료화된 운영 체계는 글로벌 항만환경에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에 항만 관리 분산 배치 정책으로 세계적인 흐름이 바뀌었다. 무역으로 먹고살아야 하는 우리나라는 작은 국토 면적에 무역항으로 지정된 항만의 수가 많다. 전국 각지에 30여 개가 넘는 무역항이 있고 기능은 노후화·유휴화돼가고 있다. 지역은 낙후되고 덩달아 재정자립도는 떨어져 중소 무역항의 기능은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항만개발은 사회적 비용의 최소화와 경제 효과, 새로운 환경을 조성하는 공익적 성격이 강해 정부의 재정투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대외 무역에 이바지하는 항만은 부산, 울산, 인천, 광양, 평택당진항에 집중되어 있다 보니 중소 무역항 이용실적은 저조하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지원 정책은 엇비슷하고 ‘묻지마식 투자’와 운영이 이뤄지다 보니 사회간접자본 중복 투자와 재정 낭비의 염려와 비판이 나오고 있다. "글로벌, 동북아, 대동맥, 백두산, 환황해, 북극, 물류의 허브·플랫폼·전진기지" 등 이런 명칭 갖다 붙이는 항만의 공통점은 얼핏 보면 그럴듯하지만 추상적이고 담론적인 말의 성찬일 뿐이다.

더 가만히 보면 이런 항만들은 개발과 운영방식에 특화된 차별화 전략이 부족하고 국제물류 기능도 미흡하다. 지역 실정에 맞는 지역별, 규모별 무역항의 비교 우위가 세밀하지 못한 상태에서 항만개발과 운영이 이뤄지니 정기적으로 다니는 해운사와 수출입 화주가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네트워크 확충도 안 된다.

양이 모여야 질이 피어난다. 화주·물류 기업이 어떤 항만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공급 사슬 경쟁력이 직결되는 세상인데 항만에서 뛸 선수라는 ‘양’이 없다 보니 신규 물동량 창출과 ‘질’ 좋은 서비스 제공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우리나라에 무역항이 많은 이유를 좀 더 들여다보면 중앙정부 재원을 받아 지역경제 발전을 이루려는 지방자치단체, 항만 운영단체들의 할 수 있다는 목표가 있었다.

모든 조직은 저마다의 목표가 있다. 목표는 생존의 명분이자 생존전략이다. 그러나 너무 높고 적확하지 못한 목표는 독(毒)이다. 시나리오별로 달리하는 운용의 묘를 발휘하여 도전적이되 가능한 목표를 잡아야 한다. 국내 중소 무역항들은 거시적 담론과 행정의 경직성에 치우쳐 비효율적인 사회간접자본 예산 집행, 항만의 고유한 특성을 분석하지 못하다 보니 무역항의 가치를 높이지 못했다.

‘하면 된다’라는 자신감은 필요하지만 ‘하면 된다’는 ‘무대포 정신’은 참혹한 패배를 낳기도 한다. 세상엔 굳이 하지 않아도, 해내지 않아도 되는 일도 있다.

오늘의 군산항은 중국-한국-일본을 잇는 ‘한중일 랜드브릿지(Land Bridge)’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해상과 육상 운송을 결합하여 운항 시간 단축과 경비를 절감해 중국-일본간 컨테이너 직항로보다 기간이 짧은 ‘핫 딜리버리 서비스(Hot Delivery Service)’다.

내일의 군산항은 새만금 신항이 조성되어 두 항만은 군산과 김제시의 두 집 살림으로 운영되면서 한쪽은 물동량 유치를 위해 경쟁하고 또 한쪽은 물동량 이탈을 막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

물류의 기능적 활동은 상충관계(Trade-Off)가 있기에 기능 간 조화를 이룬 통합화가 필요하다. 군산항과 새만금 신항도 그래야 한다. 두 항만이 협업과 분업, 연계와 통합으로 일하고 달성 가능성 있는 전략적인 목표를 세워야 한다. 지역 특성에 맞는 맞춤형 항만 정책 수립과 지리적 입지를 활용해 틈새 무역 네트워크 확충에 힘쓰고 적극적으로 화주를 발굴하고 유치해야 한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경제학자 조엘 월드포겔(Joel Waldfogel)은 소비를 그만두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전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한다고 했다. 그는 선물의 가치는 선물을 살 때 들어간 비용보다 낮다고 평가했다. 이를 비효율의 사회적 손실로 빗대어 ‘스쿠르지 경제’라 불렀다.

무역항만의 자원 배분 문제를 독점으로 인해 시장 실패와 연계되는 우리 경제의 사중손실(deadweight loss) 관점에서 살펴봐야 한다. 그러자면 이제는 지나치게 많은 무역항의 현실을 재검토해야 한다. ‘동북아 물류 허브’라는 애매하고 뜬구름 잡는 논리와 현란한 PPT, 사업계획에 국민의 혈세를 낭비해선 안 될 것이다.

세계스카우트 잼버리 사태도 겪어봤지만, 세상이 가끔 엉망인 것은 벌려는 놓고 책임질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군산에는 중국 직항로가 있고 전자상거래를 취급하는 해상화물 통관장도 조성하고 일본의 주요 항과 연결되는 간선항로가 있다.

이런 군산에 일본 오사카·시모노세키, 중국 스다오의 카페리를 통해 전라북도까지 연계하는 종합적인 관광이 실현되면 어떨까? 그래서 항일유적, 수탈 현장의 군산의 과거도 우리의 역사임을 더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다. 아픈 과거도 공동의 역사로 기억되고 정립하여 군산 거리에서 미래를 향해 한·중·일 젊은이들이 짬뽕 국물을 벗 삼아 교류의 술잔이 부딪쳤으면 좋겠다. 빈 잔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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