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게만 느껴지는 통일 “다시오마 금강산아”天仙臺 올라 모두들 絶景에 넋나간 듯 탄성 삼일포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 더 들춰내야 할 것 같다. 삼일포에서는 눈에 띄는 여성관리원이 한사람 있었다. 대부분 여성 안내원들이 검은 색, 혹은 쑥색의 낡은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반해 울긋불긋한 외제 잠바를 입은 좀 작은 키의 여성이었다. 전해 들은 바로는 ‘한혜옥’이라는 이 여성동무는 뭔가 좀 다른 신분인 듯 했다. 아마도 고급 간부의 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여성동무가 서 있는 뒤쪽으로 ‘뽀트 리용 규칙’이라고 쓴 낡은 액자가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구명대 분실시 100원 변상”순간적으로 뭔가 참고가 되겠다 싶어 이용규칙이라는 것을 취재수첩에 받아적었다.(1) 뽀트는 3명까지 앉아서 탈 수 있다. (2) 술마신 손님은 뽀트를 탈 수 없다. (3) 초당 8m이상의 바람이 불 때는 뽀트를 탈 수 없다. ------ (9) 보트 놀이는 봉래대-와우섬-몽천 구역선을 벗어날 수 없다. (10) 시간초과시 10분당 2원씩 내야한다 (11) 기재를 분실한 경우는 노대 1개 50원, 구명대 1개 100원을 변상해야 한다. 북한돈 1원이면 현재 우리나라 돈 약 6.5원 정도이니까 6,500원에 해당하는 돈이지만 북한 일반 노동자들의 월급이 100원 정도라고 하니 구명대 하나를 변상하는 값이 굉장히 비싼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북한에서는 물자가 부족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뽀트 이용규칙이라는 것을 적고 있는 것을 한혜옥 동무가 유심히 보더니 뭐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보트에 관심이 많고 통일이 되면 삼일포에서 ‘뽀트’ 장사나 해야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럴려면 그 이전에 여기에다 돈을 많이 투자하시라우요” 하고는 크게 웃었다.11월 21일 관광 4일째는 만물상관광을 하는 날이었다. 버스를 타고 온정리를 지나 금강산 관광 첫째 날 지나던 코스 보다 오른쪽으로 접어들자 금강산 호텔이 다가왔다. 이 호텔은 이번 여행을 안내하는 가이드들(한국인성교육협회 컨설팅에서 파견된 인원들)이 답사하기 위해 왔을 때 묶었던 호텔이었다고 한다. 우리 조의 가이드 김백철씨는 그 당시 호텔 식당에서 밥을 더 먹으려고 더 달라고 하자 없다고 해서 죽만 많이 먹었었다고 말했다. 또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동문인 줄 알고 기다리고 있는데 닫히지 않자 북한사람이 문을 닫아주면서 ‘남조선에는 엘리베이터도 없습니까?’ 했다는 얘기도 들려주었다. 압도하는 絶景 절로 탄성이버스는 금강산 호텔과 금강산 온천을 지나 관음폭포까지 갔다. 여기서 다시 육화암을 지나자 속리산을 올라가는 길 처럼 꼬불꼬불한 길이 나왔다. 12대의 버스가 엇갈리면서 이 꼬불꼬불한 길을 올라가는 풍경은 정말 장관이었다. 이윽고 주차장에 다다르자 모두들 간식거리만 배낭에 넣어 짊어지고 등반길에 나섰다. 등반을 시작하자마자 만상정이 나오고 조금 더 올라가니까 이내 삼선암과 귀면암이 나왔다. 우리조인 ‘가-12조’는 정상까지 갔다가 내려오면서 관광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선은 계속 앞만 보고 올라가야 했다. 주위의 풍경에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관광가이드의 리드에 의해 상관하지 않고 계속 산을 올라갔다. 산 중턱을 도끼로 찍어 움푹 들어갔다는 절부암 근처에 다가가자 머리 위로 귀암괴석들이 병풍처럼 펼쳐지는 게 보였다. 하늘은 너무너무 푸르고 봄 같은 날씨에 바위들이 뾰족한 키를 자랑하느라 몰려 서 있는 것 같은 만물상은 그야말로 한폭의 그림 이었다. 파란 하늘과 흰빛의 뾰족 바위들, 그리고 군데군데의 녹색 소나무들이 너무나 멋있게 조화되어 시선을 압도해 왔다. 일행들 사이에 여기저기서 아이들과 같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절부암에서 조금 미끄럽고 가파른 철계단을 올라 만물상 관광코스의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 천선대까지 한달음에 올라갔다. 하늘에 사는 선녀들이 내려와 화장을 했다는 천선대는 10여명이 겨우 둘러설 수 있는 작은 공간으로 이 좁은 천선대에 사람들이 발디딜 틈 조차 없이 들어차 있었다. 모두들 주위의 경관에 넋이 나간 듯 환호성을 올리고 일부는 야호 야호-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한켠에서는 비좁은 공간에서 철주를 잡고 기념사진을 찍느라고 정신들이 없었다. 왜 그렇게 천하 절경 금강산이라고 했는지 조금 이해가 갈듯도 했다. 푸른 하늘과 계속하여 이어진 희무레한 뾰족 바위들을 어깨로 감싸 안고 계곡을 향해 호령하는 그런 기분이었다. 하산길에서 만난 절부암의 여성 관리원(리향옥이라고 했음)에게도 기념이 될만한 문구와 서명을 부탁해 받아냈다. 나중에 이 관리원에게는 기자들이 달려들어 사진을 찍고 한바탕 인터뷰 비슷한 것을 해대는 바람에 상당히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좀더 내려오다가 소설가 박범신씨를 만났다. 이문열씨와 박범신씨, 이문구씨등 소설가들은 언론사의 부탁으로 금강산 방문 소감을 쓰기 위해 왔다고 했다.2차선 봉래호 승객과 조우삼선암과 괴면암이 있는 지역까지 내려왔을 때 현대상선의 관광 2차선인 봉래호를 타고 온 사람들과 마주쳤다. 현대상선 박광훈 전무, 이재현이사 등과도 만나 반갑게 악수를 했다. 봉래호를 타고 온 사람들은 이날 아침 장전항에 도착하여 출국 수속을 하고 이제 막 등정에 나선 참이었다. 나는 다시 괴면암이 코 앞에 보이는 장소(나중에 확인하니 이곳이 정성대라고 했다)로 올라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서 있었는데 북한이 고향인 사람들은 제물들을 바위에 펼쳐놓고 망향제를 지냈다. 축도 읽고 제법 순서를 지켜서 시제를 지내는 것처럼 엄숙하게 절들을 했다. 일부 관광객들은 흥분되어 어머니를 부르기도 하고 우는 사람까지 있었다. 우성해운의 홍용찬 부사장도 제사를 지낸다음 눈물을 글썽이는 상기된 얼굴로 텔레비젼 카메라맨과 인터뷰하는 모습이 보였다. 필자도 절을 한다음 음복을 했다.우리 일행은 오후 3시가 넘은 시각에서야 식사 장소인 금강원으로 내려왔다. 필자는 배가 고파 이미 점심도시락을 먹은 상태였으므로 금강원 식당을 구경이나 하자는 생각에 일행을 따라 들어갔다. 금강원은 금강호텔과 붙어있었다. 들어가보니 사람은 없고 의자와 탁자만이 놓여 있는데 이미 관광객들이 모두 점령한 상태였다. 통로로 좀더 들어가자 미닫이 방들이 있고 방 한가운데는 짧은 다리의 대형 식탁이 놓여 있었다. 나오면서 보니 출입구 오른편으로 매점이 있었는데 현대측이 못 팔게 한 것인지, 아니면 북한사람들이 창피하여 치워놓은 것인지 상점 선반위에는 아무 것도 놓여있는 것이 없었다.금강원 밖으로 나왔을 때 한 군인이 김일성이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그린 대형 액자를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관광객들이 이것을 촬영하려고 하자 그는 급히 제지하면서 절대로 못 찍게 했다. 필자는 버스 뒤에 숨어 먼 발치에서나마 기어코 그 액자의 사진을 찍었다.“반공 산교육 참 잘했다”북한은 변하지 않았다. 금강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금강호에 승선하여 나의 캐빈을 찾아들어 갔을 때는 그런 사실을 더욱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먼저 도착한 채사장이 침대에 누어 북한 텔레비젼 방송을 보고 있었다. 뉴스를 들어보니 어제와 비슷한 내용이었다. 위대하고 영명하신 최고사령관 김정일 지도자께서 함경북도를 친히 방문하시어 현지지도를 했다는 내용이 주였다. 금강산 관광객이 도착했다는 소식은 어디 한군데도 없었다. 지난밤에 보았던 북한 TV 방송 내용이 생각났다. 해설자가 나와 김대중정부를 비방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괴뢰도당들이 위험한 교예(巧藝---서커스)를 하고 있는데 이제 땅에 떨어질 날도 몇 달 남지 않았다”고 했다. 만물상관광을 하고 돌아온 21일 밤에도 TV 해설이 있었는데 한미 군사협정을 비방하는 내용이었다. 텔레비젼에서는 연극 비슷한 것이 공연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내용은 당과 조국에 충성을 강요하는 것들이었다. 남북화해라는 것이 아주 멀고도 먼 길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번 금강산 관광을 통해 관광객들은 모두 ‘살아있는 반공교육’을 참 잘들 받았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출발 지연으로 한 때 소동막 잠자리에 들려고 할 즈음 현대 금강호의 梁在元 선장(한국측 선장)이 찾아와 간단하게 인터뷰할 수가 있었다. 180센치의 장신인 그는 해양대학교 32기로 경남 의령 태생이며 현대상선에 입사한 이래 자동차선, 컨테이너선 등에 많이 승선했으며 여객선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승객들의 안전문제에 가장 신경 쓰고 승객들이 불편을 느끼는 사항은 없는가를 항상 살핀다”고 말했다. 그의 1차적인 목표는 현재 50여명의 한국인 승무원들이 외국인 승무원들에게 하루 빨리 운영에 대한 노하우를 배워서 자체적으로 운항하고 서비스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는 것이라고 했다. 현재 대부분의 외국인 승무원들은 6개월 계약으로 현대상선에서 채용하고 있다고 그는말했다.梁在元선장이 돌아가고 잠을 청했으나 잠이 오질 않았다. 북한에서 마지막 날이어서 그런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때 밖에서 웅성웅성 대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보니 승객들 20-30명이 5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금강호의 장전항 출발 지연문제를 강력하게 항의하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대학가에서 데모하듯 큰 소리로 떠드는데 주요 내용은 “모 일간신문 기자들이 승객들을 볼모로 잡고 금강산 관광증을 반납하지 않아 배의 출항이 지연되었으므로 당사자들이 나와 사과하고 해명하라”는 것이었다. 이래저래 어수선한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아직은 멀기만 한 통일”다음날인 12월 22일 눈을 떳을 때 이미 금강호는 출발했던 동해항에 돌아와 있었다. 식사를 하고 배에서 내리니 통관 검사대 앞에는 보도진들과 환영객들이 뒤범벅이 되어 시장터를 방불했다. 필자는 동해해양수산청에 들러 차를 마신 다음 택시를 타고 동해역으로 갔다. 이미 올때부터 새마을호 왕복 티켓을 끊어서 왔기 때문에 오던 코스를 다시 되돌아 서울로 가면 되는 것이었다.기차 안에서는 통일부 직원과 모 대학교의 대학원생이라는 사람한테서 금강산 관광 후 소감에 대한 설문지를 받았다. 필자는 가장 좋았던 관광지로 ‘만물상’을 적었고 가장 아쉬웠던 점으로서는 ‘북한 주민을 전혀 접촉하지 못한 점’을 써넣었다.정말 이번 금강산 관광은 우비를 입고 사워를 한 느낌이었다. 북한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친해질 듯 싶었는데 막상 다가가면 견고한 사회주의 체제가 느껴졌다. 통일이 가깝구나 희망도 가져봤지만 결국 아직은 멀고도 먼 길이구나 하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내년에 따뜻한 봄이 오면 다시 금강산을 찾기 위해 금강호를 타리라고 마음을 다져본다. (최초로 금강산 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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