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金鍾吉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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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부터)김순갑 해대총장, 배순태 도선사, 필자, 김화태성 라자로마을원장 신부. 2005.7.8 필자의 보은의 밤 행사에서
배순태(裵順泰)는 1925년 2월 26일 경남 창원군 상남면 토월동에서 배재복과 이남이 사이에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1941년 4월 진해고등해원양성소 23기로 입학했다. 그러나 당시는 태평양전쟁 말기여서 전쟁에 광분한 일제가 총동원령을 발령하는 바람에 배순태는 진해고등해원양성소를 조기졸업하고 일본군에 징집되었다. 요고스카 海兵團에서 훈련을 받고, 해군소위로 임관되기 직전에 일제가 패망하자 혼자서 귀국했다.

  당시 조선우선주식회사 대부분의 선박들은 전쟁에 징발되어 피폭을 당했다.  금천호도 폭격을 맞아 일본에서 수리를 마치고 부산항에 입항하게 됐는데, 홍순덕은 일본인 선장으로부터 금천호를 접수했다. 이때 배순태는 3등 항해사로 손수 금천호에 게양된 일장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게양했다. 역사적 순간을 체험한 것이다. 후일 금천호는 해양대학 신성모 학장이 인수하여 연습선으로 개조되었으며 4.19이후에는 윤보선 대통령이 반도호로 명명했다.

  극동해운 남궁련 사장이 기뢰를 맞고 부산항에 승양되어 있던 카즈우라를 수리했는데 1952년 10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이 고려호로 명명하여 미국으로 처녀항해에 나서게 했다. 그러니까 고려호는 태극기를 게양하고 태평양을 횡단한 우리나라 첫 번째 상선이라고 할 수 있다. 박옥규 현역 해군제독이 전무후무하게도 상선인 고려호 선장으로 선임되었고, 사관의 대부분도 진해고등해원양성소 출신의 현역해군장교들로 구성되었으나 배순태는 민간인으로 3등 항해사로 발탁되었다. 고려호가 샌프란시스코에 입항했을 때 교민들이 고려호에 게양된 태극기를 바라보고서 조국이 광복되었음을 실감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배순태는 이 광경을 목격하고 심장에 뜨거운 피가 끓고 있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1953년에는 해운공사 동해호의 선장이 되어 최초로 대권항법으로 태평양을 횡단하여 항해일수를 7일이나 단축시켰다. 이어 파나마운하를 지나 영국의 리버풀항 등 유럽의 여러 항구들을 입출항 했고, 귀로에 지중해와 수에즈운하를 경유, 부산으로 귀항하여 세계일주항해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

  배순태는 1958년 10월 22일에 인천항 도선사로 취역했다. 인천항은 조석간만의 차이가 9~10m나 되어 조류가 급할 뿐만 아니라 해상기상이 변화무쌍한 도크항만으로 어느 항구보다도 험난한 도선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93년 2월 26일 정년퇴직까지 34년간 위험하고 난해한 도선을 도맡아 했다.

  8년간의 대역사 끝에 동양최대의 인천항도크가 1974년 5월 10일 준공되었다. 일부에서는 도선사의 도선 기술이 도크운영의 관건이라며 파나마운하와 같이 외국의 우수한 도선사를 선발하여 취역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배순태는 이런 주장들을 적극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도크가 준공되기 전인 3월 27일 여수호를 시험도선 하였고 이어 4월 15일에 개통식에서 김신 교통부장관과 유승원 국회교통체신위원장, 그리고 인천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선박 큐바를 능수능란하게 도선했다. 이로써 외국 도선사를 취역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꼬리를 감추게 되었다. 만약 당시에 외국인 도선사를 취역시켰더라면 외화의 유출은 물론 인천항 운영이 지금도 외국인의 영향아래 있을 찌도 모를 일이다.

  Hector호가 1976년 6월 22일 소맥 5만 3592톤을 싣고 인천외항에 입항했다. 그러나 갑문을 정비하느라 문비보호시설인 Stoping Log가 1.75m나 돌출되어 선폭 32m나 되는 거대선의 입거가 불가능했다. 더구나 이때 수도권에 밀가루가 품절되었고 관광호텔에서도 빵을 굽지 못하는 긴급사황이 발생하여 농림부가 교통부에 긴급조치를 강요하고 있었다.

  양현에 여유간격이 없어 본선이 돌출부와 접촉하면, 인명사고는 물론 공사를 망치는 위급한 사항이었다. 선박회사와 항만관계자들이 대책회의를 거듭했지만 묘안이 없어 입항거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배순태가 도선을 자원하면서 인천항에 있는 예인선과 방충재를 최대한 동원할 것을 요청했다. 갑문관리소장 백상기는 사고가 나면 면직당할 것을 각오하고서 직원들과 함께 거대선이 입거하는 광경을 숨을 죽이고 바라보고 있었다.

  본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미끄러지듯 갑문을 통과하고서는 7부두에 유유히 접안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항만관계자들은 걸작의 예술작품을 감상하듯 환상적이었다고 말하며 배순태를 導船神라고 불렀다.

  도선사의 임무가 항만시설의 보호와 효율화라고 한다면, 항만에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극복하는 것도 도선사의 몫이다. 1977년과 1984년에 한파가 밀어닥쳐 인천항은 결빙되었고, 한강에서 유빙이 떠내려와 항만운영이 마비되었다. 이때 배순태는 예인선들을 갑실 내로 집결시켜 결빙을 깨고 그 깨진 틈새로 본선을 입거시켰다. 그러나 얼음이 끼여 갑문이 닫혀지지 않자 갑문조정실이 초비상태가 되었다. 그는 예인선의 방향을 거꾸로 돌리게 하고, 스크루우를 급회전시켜 얼음을 밀어내고 갑문을 닫게 하는 재치를 발휘했다. 

  1986년 1월 21일 그로발선이 7부두에서 옥수수5만 5600톤을 하역하고 출항하려는데 기관고장이 발생했다. 배순태는 예인선 5척을 동원하여 선수와 선미 양현에 각각 1척씩을 붙여 4척으로 본선의 방향을 조정하고, 나머지 1척은 선수에서 본선을 예인하여 갑문을 빠져나갔다. 본선과 예인선 6척의 선단을 일사불란하게 조정통제하며 마치 곡예를 하듯 고난도의 도선을 했다.  

  평택에 LNG터미널이 준공되고 1986년 10월 31일 최초로 한국에 10만 톤의 골라스피릿트가 입항했다. 충돌사고가 발생하면 LNG폭파로 인해 반경 10km이내는 폐허가 된다고 하여 도선사들이 겁을 먹고 도선을 기피하기 때문에 배순태가 이 선박을 도선할 수밖에 없었다. 사전에 현장을 답사하고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암초를 피하기 위해 Z자형의 협수로를 통과해야했고 부두의 위치가 횡조류와 북서풍의 영향을 받을 것을 고려하며 30여년의 축적된 경험과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안전하게 접안시켰다.

  5515대를 적재하는 최대 자동차전용선(PCC) 노삭타이샷이 1987년 2월 인천항에 입항했다. 그는 PCC의 특수구조와 갑문을 비교하며 치밀하게 계산하여 갑문을 통과시킴으로써 인천항을 자동차 수출항으로 굳혔다.

  1988년 올림픽 때, 소련선박이 84년 만에 인천항에 입항하게 되었다. 배순태는 선수와 관광객을 실은 소련 여객선 미하일 소로호프를 도선했다. 당시 소련 선박회사가 가난하여 예인선을 쓸 수 없었다. 예선지원을 받지 않고, 운동장비와 자동차를 하역하기 위해 후진으로 1부두로 접안시키는 그의 탁월한 도선 기술을 보고 소련 선원들이 감탄했다. 이로 인해 한국 도선사의 우수성이 동구권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88올림픽은 <동·서 진영이 모두 참가한 화합과 전진의 대제전>이었는데, 이때 배순태는 인천시의 성화 봉송의 최종주자로서 240만 시민이 지켜보는 데서 64세의 노익장을 과시하듯 활기차게 달리며 짜릿한 감격을 맛보았다.   인천항의 열악한 도선조건에서도, 능란한 곡예사가 자유자재로 기교를 부리듯이 거대선박을 능숙하게 도선하여 導船神이라고 불리게 된 근저에는 투철한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도선사의 권익보호와 외국과의 기술정보교환을 위해 한국도선사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해운계 후진양성을 위해 70억원 상당의 재산을 해양대학에 기부했고 고향에 있는 학교와 사회사업시설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공로들로 그는 명예공학박사학위를 받았고, 산업훈장과 해사문화상을 수상하였다.

  배순태는 일제 때 상선학교를 졸업하였고 해방 직후 폐허가 된 우리 해운을 개척할 때부터 참여했다. 그리고 우리 해운과 경제가 번영하는 역사적 길목에서 선장으로서, 도선사로서 금자탑을 쌓아올렸다. 명예와 돈 그리고 80을 넘은 고령에도 청년 못지않은 건강을 향유하고 있다. 우리 해운계의 거목으로, 해운역사의 산증인으로 우뚝 서있다. 해양대학 김순갑 총장은 필자에게 “해양대학에 배순태기념관이 건립될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협찬: 창명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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