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金鍾吉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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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ACS의 1999년 서울 이사회에 참석한 각 선급대표들과 그 일행들. 앞줄 왼쪽부터 여섯번째가 신호철.
신호철(申浩澈)은 1930년 9월 28일 개성에서 신현문과 문최봉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평양전쟁이 종말로 치닫고 있을 때 전쟁에 광분한 일제는 어린 학생들까지 근로보국대로 내몰았다. 그도 제2임진강철교 건설에 강제동원 되어 문산소학교에서 합숙노동을 하다가 8.15광복을 맞았다. 그때 그가 겨우 개성중학교 3학년이었다.
광복된 조국의 미래를 꿈꾸며 열심히 공부해, 1949년에 서울대학과 해양대학에 모두 합격했다. 고심 끝에 해양대학을 선택해 항해과 5기로 입학했다. 2학년 때에 6·25남침으로 태평양전쟁보다 더 혹독한 전쟁을 치러야했다. “개성 송악산은 38선상에 놓여있어 6·25 전에도 국군과 인민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했었지요. 포성소리가 들렸고 때론 포탄이 개성 변두리에 떨어졌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요”라고 그는 가고픈 고향을 추억했다.

신호철은 해대를 졸업하고 해군특교대에 입대해 훈련을 받고 1953년에 소위임관과 동시에 전역되었다. 그는 해운공사에 입사했으나 해군에 다시 소집되어 3년간 복무하고 1958년에 중위로 제대했다.

그는 해운공사에 재취업해 4년간 근무하다가 1962년에 한국선급협회(KR)로 옮겨 검사원이 되었다. 때마침 행운이 그를 찾아왔다. 영국 정부초청으로 전통을 자랑하는 로이즈선급협회(LR)에서 연수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당시 런던은 제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고색창연한 도시와 건물들, 그리고 거미줄처럼 연결된 지하철이 놀랍고 부러웠다. 대영제국박물관에서 세계적이고 세기적인 유물을 관람하며 세계를 지배했던 대영제국의 영광에 압도되기도 했다.

세계최초로 1760년에 창립된 LR는 2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었다. 전통에 걸맞게 기술이 고도로 축적되어있었고 교육훈련도 합리적이었다. 당시 LR는 만재흘수선, 선체, 기관, 전기, 냉동 등 5개부와 기술연구소로 구성되어 있었다. 직원들이 돌아가며 매주 1~2회씩 과업 후에 60~90분간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빠짐없이 수준 있는 논문발표를 열중해 경청했다.

신호철은 처음 만재흘수선부에서 수개월 교육을 받으며 만재흘수선 계산을 습득했다. 선체부로 옮겨 6개월간 LR 내규와 자료에 의해 선체종강도와 구조강도해석을 익혀갔다. 이어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 있는 Fairfield 조선소로 갔다. 거기서 LR선임검사원을 뒤따라 다니며 입거검사를 실습했다. 다시 런던본부로 돌아와 냉동부에서 열손실을 연수했다.

KR이 초창기이므로 기술습득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자료수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LR에서 공부한 교재와 자료를 모두 복사해 두었다. 1964년 봄 귀국할 때 그 자료들을 챙겨서 가지고 돌아왔다. 2년간 연수를 마치고 KR로 돌아와 보니 변화가 없었다. 본부 요원은 몇 사람에 불과했고, 부산지부에는 7~8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부산지부가 현장업무를 하면서 기술검토를 하고 있어 부산지부가 본부역할을 하고 있었다. LR에서 가지고온 자료가 KR의 선급업무를 발전시키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신호철은 “1960년에 총선복은 1만 1765척에 34만 4085톤이었지요. 그러나 100톤 이상의 강선은 67척에 11만 8755톤에 불과했어요. 그것들도 20년 이상의 노후선이 대부분을 차지했었지요. 조선도 극히 미미했습니다. 5000톤급 조선능력을 가진 조선소가 단 하나뿐 이었으니까요. 더구나 500톤급 신조선을 건조한 조선소는 하나도 없었어요. 그러나 혁명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이어 계속된 경제개발계획으로 해운과 조선이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했지요. 해운과 조선의 성장에 힘입어 KR도 인적 물적으로 급격하게 성장했고 기술도 획기적으로 발전했어요. 그로부터 20년 후 1980년에 KR의 입급선박이 1586척에 492만톤에 이르렀어요. 참으로 경이로운 발전이었지요”라고 해운과 조선의 발전에 발맞추어 KR이 성장해온 과정을 회고했다.

한국 선주들이 일본에서 신조선 발주가 급격하게 늘어날 때인 1969년에 그는 일본 주재원으로 발령받았다. 해운공사가 가사도 조선소에서 화물선 건조를 비롯해, 협성해운이 사이기 조선소에서 2척, 고려원양의 하야시가네 조선소에서 원양 트롤선 2척, 히로시마 우지나 조선소에서 2척 등 신조선 검사경력을 쌓아갔다. 그리고 신조선에 거치할 기관과 의장품 검사도 했다. 일본 전역에 대한 출장계획을 짜서 검사를 했으나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일본해사협회(NK)에 일부 위임했다. 이와 같은 신조선검사와 기관제조검사는 KR의 기술발전을 촉진시켰다.

그는 귀국하여 1973년에 부산지부장으로 발령받았다. 검사원의 기술향상을 위해 매일 과업이 끝난 후에 교육을 실시했다. 한척의 선박을 한 검사원이 담당하려면 검사원 각자가 선체/기관/전기/전자 등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요구되었다. 또한 경험이 중요하기 때문에 적절한 수검선박을 선택하여 검사원들의 현장연수도 실시했다. LR에서의 연수경험을 백분 활용하여 KR검사원의 교육을 실시했다. 그리고 선급검사는 국제적으로 통용되기 때문에 영문검사보고서작성과 영어회화연수도 권장했다. 당시 부산지부의 관할구역은 포항에서 목포까지 광범위해 검사원이 30명이나 됐다. 그는 그들에 대한 교육훈련이 KR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하고 교육에 열중했다.
신호철은 본부 선급관리부장을 거쳐 KR런던사무소장으로 부임했다. 1980년 6월 2일 Carlton Tower Hotel에서 허동식 이사장이 주관한 런던사무소개설 축하연이 개최됐다. 한표욱 주영대사를 비롯해 각 선급단체와 해운, 조선, 보험업계의 대표 등 70여명이 참석한 축하연에서 KR을 홍보했다.

런던소장의 임무는 국제선급연합회(IACS)의 각 작업부 회의 참석, 국제해사기구(IMO)의 기술회의에 참가, 유럽 각 지역에서 선급검사 등이였다. IACS의 작업부회의가 연간 10회나 개최됐고, IMO의 기술 관련회의도 연간 20주에 달했다. 혼자서 소화하기란 불가능했다. 실제로 1980~1986년 6년간 신호철이 참석한 IMO회의만 해도 106주나 돼 만 2년에 해당됐다. 선진국은 정부대표를 비롯해 다수의 전문가들이 충분한 사전검토를 하고서 IMO회의에 참가했다. 그리고서도 추가검토가 필요한 사항은 작업그룹을 만들어 세부적으로 검토했다. 그러나 우리는 정부와 KR본부로부터 훈령이나 의견제시가 없어 회의참석에 의의를 찾는 수준에 불과했었다.

신호철은 KR을 떠나 있다가 1992년 KR부회장으로 복귀했다. 해난사고가 빈발하여 해상오염과 재산손실이 막대하던 때였다. 이로 인해 각국정부와 IMO, 보험과 해운업계에서 선급기관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을 때였다. IACS는 자기방어를 위해 ISO 9000 품질감사 제도를 도입해 이 감사에 합격해야만 IACS 정회원 자격이 유지된다는 의결을 했다.

IACS사무소장 Mr. Bell은 “IACS 정회원들 간에는 KR이 품질감사에 불합격 될 것이라는 여론입니다”라고 신호철에게 말했다고 한다. 사실 당시 KR에는 품질을 다룰 수 있는 자격증 소지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모든 임직원과 함께 1년간 매일 밤늦게까지 품질감사수검을 위한 준비에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1993년 IACS품질감사에 무난히 합격해, KR이 오늘날 IACS정회원 자격을 유지하고 있다.

신호철은 1998년 7월에 IACS의장으로 선출되어 1년간 직무를 수행했다. 그는 IMO총장이 참석하는 런던 이사회에서, 그리고 롯데호텔에서 개최된 서울 이사회에서 기라성 같은 선진선급들의 대표를 상대하며 이사회를 두 번이나 주재했다. 그리고 IACS런던사무소의 주요행정업무도 관여하며 국제선급연합회의 수장으로 영예롭게 업무를 수행했다.

필자가 “KR 초급검사원으로 출발하셔서 LR연수와 일본 주재원을 거쳐 런던사무소장 등 선급검사원으로 엘리트코스를 밟아 최고영예인 국제선급의 수장이 되신 것을 고진감래라 할 수 있겠지요?”라고 묻자 신호철은 “IACS의장을 맡게 된 것은 저의 일생일대의 영광입니다.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신 KR임직원들 모두에게 그 영광을 돌려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협찬: 창명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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