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金鍾吉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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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L의 초대형 컨테이너 선박 2척을 삼성중공업에서 진수식 때. 왼쪽부터 배주원 회장, Hochstadt 회장, Lua Cheng Eng 사장.
배주원(裵柱元)은 1936년 6월 3일 경남 하동군 양보면에서 배상수와 정말선 사이에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산골에 서당교육이 고작이었던 시절에 조부 배석도는 사재를 털어 양보소학교를 설립했다. 조부는 일본을 이기려면 신학문을 배워야한다고 설득해 동네 아이들을 입학시켰다. 그리고 그의 아들 배상수와 손자 배주원도 취학시켰다.

조부와 부친이 모두 교육자인 집안에서 자란 배주원은 진주농림중학교를 다니다가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될 때 경남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경남고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서울대 상과대학에 응시했으나 1차에는 낙방하고 재수하여 다음해 입학했다. 그는 1959년에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과를 졸업하고 그 다음해 천우사 신입사원 모집에 원서를 넣었다. 그러나 당해년도 졸업생만으로 제한해서 원서접수를 거절당했다. 그는 부당함을 항의하며 천우사에서 여섯 시간 농성투쟁 끝에 간신이 응시했다. 뚝심으로 시험을 본 그는 9:1의 경쟁을 뚫고 합격의 영예를 차지했다.

그가 천우사에서 처음으로 한 일은 무역부에서 합판수출을 보조하는 것이었다. 1개월 후에 선박부로 옮겼다. 이것이 그가 해운의 길로 들어서는 관문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천우사 선박부는 우리나라 해운대리점업계의 선두주자였다. 당시 국적선 선대가 빈약하여 수출을 해운대리점을 통해 외국선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천우사 선박부는 Yamashita Shinnihon Line, Tokyo Shipping, Showa Line의 일본계 대리점이었고, 미국계 대리점인 에버렛과 함께 해운대리점업계의 쌍벽을 이루면서 우리나라의 수출입국을 여는데 기여했다.

배주원은 1963년 4월 천우사 동경지점으로 발령받았다. 동경생활은 그가 해운전문가로 성장하는데 절호의 기회였다. 하주와 대리점자격으로 Tokyo Shipping, Nissan, Dowa Kaiun, Daito Kaiun을 상대하며 Chartering을 했고, Demurrage, Despatch, Claim 등 다양한 해운관행도 알게 됐다. 그리고 인생의 동반자를 해운가문에서 맞아들인 인륜지대사도 동경근무기간 중 치뤘다. 동경근무 4년은 그의 인생의 황금기였고 또한 해운전문가로 성장해 가는 ‘시금석기간’이었다.

그는 해운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열정을 가졌다. Showa Line에 자원해서 4개월간 연수를 받으며 우선 해운에 필요한 해운전문용어를 익혔다. 일상적인 용어와는 달리 난해했지만 필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선박의 운항과 관리, Liner와 Tramper, 용적화물과 중량화물 등 해운전반을 개괄했다. 그리고 당시 컨테이너가 일본에 상륙하고 있어 컨테이너수송이 미래 수송의 총아가 될 것이란 것도 연수과정에서 알게 됐다.

배주원은 Showa Line에서 연수가 끝나자 1967년 9월 대한선박의 이탈리아 주재원으로 파견됐다. 천우사의 전택보가 1/3, 대농의 박용학이 1/3, 개풍그룹의 이정림이 1/3을 각각 투자해 대한선박을 설립했다. 대한선박이 벌크선박 7척을 이탈리아 제노아에 있는 안살도 조선소에 발주했다.

그는 천우사 측의 선주감독으로 당시 한국 최대의 벌크캐리어 ‘경주호’ 진수식 준비를 총괄했다. 한국과 이탈리아의 경제계와 관계의 귀빈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유재흥 대사의 부인이 테이프커팅을 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의 선명휘호 ‘경주’를 청와대 수석비서관 신동식이 직접 이태리 조선소까지 가져올 정도로 성대한 진수식이었다. 행사의 절차와 인적․물적 동원 등 지극히 난행(難行)한 진수식 준비를 하면서 배주원은 해운인으로 크게 성숙해졌다. 그는 또 이탈리아 체류 중 IRI(이탈리아 국립연수원)의 해운전문인과정 5개월도 수료했다.

그는 이탈리아 근무를 마치고 1968년 런던으로 발령받아 대한선박의 용선업무를 담당했다. 1823년에 설립되어 150여년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발틱거래소(Baltic Exchange)가 선박매매와 용선을 하며 세계해운시장을 주도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거래소를 출입하며 시시각각 변화하는 시황을 분초를 다투어 가며 텔렉스로 보고하느라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리고 로이즈보험과 P&I Club들, IMO와 로이즈선급 등 해운관련 기구와 제도, 관행과 법률,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해운단체와 기업들이 모여들어 세계해운의 중심인 런던에서 세계를 향해 시야를 넓혀갔다.

그는 해양대학을 8기로 졸업하고 해운공사 런던주재원으로 와있던 김성응으로부터 세계해운의 흐름과 해운전문영어도 배웠다. 특히 그의 동경주재 인연으로 일본 6대선사의 런던주재원들이 만든 Japan Club의 특별멤버가 됐다. 업무의 연장선에서 Japan Club을 출입하며 런던해운계의 사교를 만끽했다.

그는 1969년에는 뉴욕에 머물며 런던과 더불어 세계적 해운시장을 이끌어가는 뉴욕 해운시장을 살펴보는 기회를 가졌다. 귀국하여 대한선박의 영업과장으로 일했다. 그러나 천우사 전택보가 대한선박의 지분을 처분하자 그는 대한선박을 그만두고 삼아해운으로 옮겼다. 삼아해운에서 대한선박의 화물을 알선하며 카고 브로커로서 경력을 쌓다가 1973년 6월에 흥아해운 영업상무로 발령받았다.

당시 흥아해운은 재래선과 세미컨테이너선으로 한일항로에 취항하면서 Japan Line대리점도 겸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과 영국에서의 경험과 인맥을 활용해 사업 확장에 나섰다. 한일항로에 머물지 않고 동남아항로를 개설해 흥아해운이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리고 1980년에는 중동항로에 진출하며 Oasis멤버가 됐고, NYK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FEFC의 중동항로에도 합류했다. TS Tokyo의 대리점으로 TS Korea를 설립하여 포워딩업무도 겸했다. TSR 포워더 Nissin Transportation Warehousing과 Air Canada와도 제휴해 포워딩의 영역을 넓혔다.

싱가포르 국영회사 NOL의 동경주재원이 대리점계약을 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했다. 주위에서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배주원은 개의치 않고 특유의 뚝심과 지략으로 그 주재원을 공략했다. 그가 싱가포르로 날아가서 NOL사장과 대리점계약을 체결했다. 그 NOL사장이 후일 싱가포르 수상이 된 Goh Chok Tong이었다. 그는 또 대성메타놀이 미츠비시와 제휴해서 여수에 공장을 설립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막강한 경쟁사가 있어 승산이 없는 것으로 보았지만, 성사시켜 특수탱커운송에도 진입하여 흥아해운이 고속질주를 했다.

배주원은 해운업계의 현안문제에도 열성을 보였다. 1977년 한․일선주협의회의 대표를 비롯해서 한․인니, 한․말레이시아 해운회담 대표로 참가했다. 78년에 한일항로의 한국선주중립위원회의 의장도 맡았다. 그는 1980년에 선주협회 부회장으로 피선되었다. 그리고 1983년에 한일컨테이너수송협정을 체결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러한 공로로 국무총리표창을 수상했다.

배주원은 1986년 8월부터 서울에 싱가포르 대사관이 설치되기까지 4년간 명예영사를 맡기도 했다. 비자발급과 공증 등 제반 영사업무를 처리하며 때론 부분적이지만 정무부문까지 관여하여 싱가포르 대사역할을 했다. 그리고 싱가포르 명예무역발전대표를 15년간 맡았다. 양국의 우의와 교역을 증진한 공로로 1991년 11월 8일 싱가포르 국가공로훈장을 받았다.

1995~1996년에 세계해운은 경쟁이 치열해졌다. 약육강식의 냉엄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NOL이 싱가포르정부와 협력하여 APL을 매입키로 했다. NOL보다 배나 큰 APL을 삼키고 나서, 배주원은 1998년 2월 1일 APL KOREA회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APL은 한국에서 1주간 약 5천teu를 취급하며 시장점유율이 15%나 돼 한국해운시장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NOL이 APL을 인수한 배경에는 미국의 막대한 군수물자 수송권을 계산하고 있었다. 문제는 NOL이 미국의 자존심인 APL의 일선 주역들을 NOL의 가족으로 만들 수 있느냐에 있었다. 거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산골소년이 해운에 입문해 해운인생 항로를 오래토록 항해하며 세계해운을 섭렵하고서 마지막으로 APL KOREA회장으로 취임하기까지의 과정이 치열하여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현란(絢爛)하군요”란 필자의 멘트에 배주원은 “수출입국 해운입국이란 신념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되돌아보면 자랑할 만한 업적이 없네요”라고 겸손해 했다. 그는 이어 “내외 해운계 많은 인사들이 모여서 만든 저의 성대한 은퇴식에 참석한 NOL회장의 진정어린 고별사를 들으면서 그래도 헛되게 인생은 살지 않았구나 하고 자위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협찬: 창명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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