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金鍾吉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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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3월 31일 항만물류협회 신임 부회장 이취임식 때, 왼쪽부터 이학구 전임 부회장, 신태범 회장, 주재환 신임 부회장
신태범은 1928년 1월 15일 경남 거창군 위천면에서 신창성과 조순갑 사이에 6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중종반정 때, 14대 조부 신우맹이 이곳 거창으로 옮겨온 지 450년이 되었다. 거창에는 학덕을 겸비한 요수 신권과 황고이 신수이를 제향(祭享)하는 구연서원이 있다. 두 분은 신태범의 13대와 8대 조부이다. 조선조에 다섯 분이 대과에 급제하는 등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여 서부경남에서는 손꼽히는 명문가문이다.

그는 거창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통영중학교에 진학했다. “가까운 대구나 진주를 두고, 왜 멀리 통영까지 가셨습니까?”란 필자의 질문에 그는 “경북중학교에 낙방을 하고 재수를 하려는데 담임선생님이 ‘신설된 통영중학교에 시험을 쳐보라고’하여 그렇게 되었지.”라고 대답했다. 통영중학교는 학년 당 1학급인데 한 학급에는 한국인 30명과 일본인 25명이 공부했다. 그는 학업성적이 우수하여 일본학생을 제치고 급장과 대대장을 하며 통솔력을 발휘했다. YS(김영삼 전대통령)는 신태범의 통영중학 1년 후배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은 친교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에 몇몇 친지들이 모여 오찬을 하는 자리에서 YS가 “내가 통영중학교에 다닐 때 신회장이 하도 위풍이 늠름하여 감히 옆에 얼씬도 못 했지”라는 농담을 해서 좌중을 웃겼다고 한다.

신태범은 통영중학을 나와 해양대학 항해과 2기로 입학해 1950년에 졸업했다. 취직하기가 어렵던 시절에 성적이 우수해 ‘해운공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미국이 원조한 볼틱형 에리사위트호에 3등 항해사로 승선하고 있는데 6.25전쟁이 일어났다. 에리사위트호는 군에 징발되었고 신태범도 군복으로 갈아입고서 군수물자를 수송했다. 해운공사 사장 남궁련은 신태범을 선원계장으로 발령했다. 당시에는 탈 배가 없어 선원취업이 어려웠고, 배를 타면 외국에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선원은 인기직업이었다. 더구나 선원봉급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밀수하기 좋은 배를 타려고 뇌물공세가 심했다.

그는 이러한 혼탁한 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남들은 가지 못해 안달을 하는 선원계장을 스스로 그만두고 선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남궁련은 그를 다시 본사로 불러들여 선원과장으로 발령하여 18개월간 근무하게 했다. 이 기간에도 압력과 유혹을 받았으나, 휘둘리지 않고 공정한 인사를 하면서도 어려운 사람들을 따뜻하게 보살폈다. 그때 그가 눈여겨보았던 사람들을 훗날 그가 고려해운을 경영할 때 스카우트했다.

5.16혁명 후에 해운공사 군산호가 묵호 앞 바다에 좌초되어 선저가 대파되는 사고가 발생했고 군산호는 조선공사에서 수리하게 되었다. 신태범은 군산호의 선장 겸 수리감독으로 발령되어 조선공사에 매일 출근했다. 이것이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선주를 대리해서 조선공사 사장 이영진과 자주 접촉하게 되었다. 당시는 군정기간이었기 때문에 현역대령으로 조선공사 사장을 하는 이영진 사장은 혁명정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조선공사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5천 톤급의 신조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5백 톤급도 신조한 실적이 없었다. 고작 선박수리만 하고 있었다. 해운도 100톤 이상의 강선이 겨우 67척에 10만여 톤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선령 20년 이상의 노후선이 대부분이어서 해운이나 조선업이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신태범은 이영진에게 “일본선박들이 대부분 태평양전쟁에 투입되었다가 폭격을 맞아 돌아오지 못 했어요. 살아남은 선박들도 전쟁을 치르기 위해 급조된 전시형 선박이라 쓸모가 없습니다. 일본해운이 재기불능 상태인 상황에서 일본정부가 계획조선정책을 과감히 추진하여 조선과 해운이 전전(戰前)상태로 복구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계획조선을 추진해야만 조선업과 해운업이 살아날 것입니다.”라고 간곡하게 설득했다. 마침 상공부 조선과장 김철수가 현재 해사문제연구소 이사장 박현규와 절친한 관계라서 신태범과도 평소에 막역한 관계였다. 이런 인연으로 김철수와 이영진, 그리고 신태범 세 사람, 즉 정부, 조선, 해운을 대표하는 3자가 3위1체가 되어 계획조선을 추진했다.

그 결과 1962년 조선공사에서 제1차 계획조선에 의해 최초로 1600톤급 신양호를 건조하게 되었다. 계획조선의 자금배분은 선주 10%, 정부보조 40%, 융자 50%이었다. 선주가 선가의 10%만 부담하면 선박을 건조할 수 있었다. 당시 선주들은 한국에서는 대형선박 건조가 불가능할 것이라 여겨 포기하고 있던 차에 신양호를 건조하는 것을 보고 가능성을 확인했다. 선주들은 너도 나도 계획조선에 앞 다투어 뛰어들어 계획조선은 2차, 3차로 계속 이어졌다.

휴면상태에 있던 조선업이 계획조선으로 인해 활성화되어 시설이 정비·확장 되고 조선기술도 날로 향상되어 오늘날 세계 제1조선국가로 도약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또한 계획조선으로 인해 선박확보의 촉발제가 되어 해운업이 활기를 뛰어 오늘날 세계 8대 해운국으로 성장하는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신태범은 조개표 석유회사를 운영하던 신중달 명의로 제1차 계획조선을 신청했다. 자본이 부족하여 후에 기범선을 운영하던 고려해운 이학철과 거창출신 양재원이 참여하여 3인 공동명의로 신양호가 1964년 4월에 준공되었다. 신양호가 준공되고서 신태범은 고려해운 상무이사로 취임했다. 우리나라에서 동업이 성공하기가 어려운데도 신중달, 이학철, 양재원 세 주주들 중간에서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고 투명하게 회사를 운영해서 오늘의 고려해운과 KCTC로 발전시켰다.

그는 서고에서 서류뭉치를 직접 찾아와 필자에게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신양호 계획조선에 관련된 공문서, 설계도면, 공사비내역, 세 주주들의 출자비율 등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 신양호 계획조선은 우리 해운사와 조선사의 기록으로 보존될 가치가 있어 해양대학 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다. 그 서류뭉치는 그 사본이었다. 그 사본이 필자에게는 신태범이 공정하고 투명한 경영을 성공적으로 했다고 웅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신태범은 해운공사 근무 12년 중 선원계장과 선원과장을 하면서 많은 해기사들과 친교를 가졌다. 그 중에서 이승은, 박장균, 이윤수, 조판제 등 우수한 인적자원을 영입하여, 이들이 고려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신태범은 1964년 고려해운 상무로 출발해서 1970년 전무, 1980년에 고려종합운수(KCTC) 사장, 1985년 고려해운 사장 그리고 현재의 KCTC회장까지 43년간 고려와 운명을 같이 해왔다. 그리고 고려해운 26.5% KCTC 20%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고려’가 마치 그의 분신인양 애착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해운공사 12년과 해양대학 재학기간을 모두 합치면, 해운인생 60년이 되었다. 그는 고려의 울타리 안에 머무르지 않고 1984년에 해상주선협회 회장, 1988년 관세협회 회장, 1999년에 항만하역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해운계 원로로 우뚝 섰다.

특히 선주협회 부회장으로 있던 1971년에 패기만만한 정영훈이 해운국장으로 부임했으나 해운에 문외한이었다. 선주협회 부회장을 함께했던 박효원과 두 사람이 정영훈을 도와, 영세한 한국해운의 보호 장치인 웨이버제도를 일본의 반대에 맞서서 존속시켰다. 그리고 선박도입 관세율을 감면시켰고, 해운진흥대책수립 등 우리 해운의 토대를 다지는데 일익을 담당한 것을 지금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그는 고려대학과 서울대학에서 경영대학원을 다니면서 새로운 경영기법을 배우는 것을 물론, 조중훈, 정수창, 김상하 등 재계의 걸출한 원로들과의 교유를 통해 해운계 울타리를 뛰어넘어 경제계 전반으로 활동무대를 넓혀갔다. 1985년에 대한상공회의소 상임위원이 되었고 그 뒤 감사까지 역임하면서 경제계가 해운을 이해하고 협조하는데 일조했다.

해운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82년에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하였고, 2001년에는 해양대학에서 명예경영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어 2003년에 해양대학 동창회로부터 <자랑스러운 해대인상>을 수상했고 그 다음해에는 물류학회로부터 해사문화상도 수상하여, 해운인으로 최고의 영예를 차지했다.

필자가 “43년 세월을 고려에 몸담아오며 80고령에도 건재하실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신태범은 “비결이 따로 있겠소? 선조들의 정신을 받들어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했을 뿐이지!”라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협찬: 창명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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