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金鍾吉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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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년 3월 이승만 대통령 내외의 임석하에 프리스코 극동함대사령관으로부터 미국 동성훈장을 수상하는 윤원영(왼쪽)
윤영원(尹英遠)은 1924년 8월 19일 경남 거제군 연초면에서 윤형엽과 권아지 사이에 1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여덟 살에 20리쯤 떨어진 하청소학교에 입학했다. “어린 내가 영하의 날씨에 콧물을 훌쩍거리며 울면서 학교로 걸어가는데 상급생들이 가엽게 여겨 학교까지 업어주었지. 6학년 때는 부산으로 수학여행을 갔어. 학교 앞 선창에 정기여객선이 있는데 학생들이 가난해서 풍선을 탔지. 부산까지 30마일밖에 안되는데 열두시간이나 걸려 배멀미로 초죽음이 되었지.”라고 어린 시절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윤영원은 1940년 4월에 진해고등해원양성소 항해과 22기로 입학했다. 입학정원은 항해과 기관과 각 20명이었다. 한국학생이 4분의 1밖에 안되고 교사는 전부 일본인이라 한국학생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돛 20개가 달린 연습선 海王丸으로 군수용 석탄을 운반하며 실습을 마쳤다. 1944년 9월에 졸업을 하고서 승선을 하여야 하는데, 태평양전쟁에 징발된 선박의 5분의 3이 어뢰와 폭격을 맞아 돌아오지 못했다. 일제의 야욕에 희생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진단서를 제출하고 승선을 미루다가 해방을 맞았다.

진해에서 해안경비대 손원일 준장에게 충성선서를 하고 1946년 4월 해군소위로 임관됐다. 이승만 대통령이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을 초청하여 진해 해군공관에서 1949년 8월 8일, 한중정상회담을 했고, 무쵸 미국 초대대사를 초청하여 진해 앞 바다에서 낚시외교도 했다. 이 때 윤영원은 중령으로 진해통제부 작전부장으로 근무하면서 체험하였던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내가 PK보트로 이승만 대통령 내외를 모셨지. 섭씨 3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에 대통령 내외는 갑판위의 의자에 앉아 시원한 바닷바람을 마시며 희색이 만만하셨어. 한 시간 순항을 마치고 조함창(造艦廠)으로 들어가는데 대통령께서 ‘저놈 포살하라!’고 외치셨어. 혼비백산하여 주위를 살펴보니, 수병이 조함창 앞산 바위 위에서 완전나체로 PK보트를 향해 체조를 하고 있었지. 또 ‘저놈 포도청에 집어넣어!’라고 고함을 치셨어. 수영복을 입을 형편이 못된 시절이라 맨몸으로 수영을 하고 체조를 한 것이 무슨 죄가 되겠어? 하지만 프란체스카 국모의 코앞에서 물건을 드러내놓고 체조를 하는 야만스러움에 노발대발하셨겠지. 미국인들은 수영복을 입고 수영하는데 당시 수영복을 입을만한 형편이 못된 한국의 실정을 모르셨겠지. 그리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대통령이 되셨지만 『포살』, 『포도청』이란 조선시대 용어를 쓰시는 것을 보면 언어관습이란 변하기가 어렵구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어. 그 수병은 아마도 헌병대에 끌려가 혼쭐이 났겠지.”

윤영원은 6.25전쟁 중에는 원산에서부터 진남포까지 동·서해의 기뢰 소해작전을 펼쳤다. 미 해군이 주축이 된 연합함대합동작전에도 참가했고 피난민 수송작전 등을 하며 수없이 사선을 넘나들었다. 그는 구축함 함장과 한국함대 제1전단 사령관을 거쳐 1956년 7월 18일에 수로국장으로 발령받아 2년 7개월간 근무했다. 당시 수로국이 해군에 소속됐을 때였다. 그는 항해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부산항과 인천항을 비롯하여 동·남·서해안에 대한 수로측량과 조류관측을 실시했다. 해상(海象)변화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해도와 수로도지를 간행하여 안전한 뱃길을 열어 주었다.

그가 인천경비부 사령관으로 있을 때 5·16혁명이 일어났다. 새벽 5시경에 경기도경국장이 무장해병대가 한강을 건넜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해군참모총장에게 긴급전화를 했으나 비서실장이 바꿔주지 않았다. 대항을 하느냐고 물어도 사령관이 알아서 행동하라는 대답 뿐이었다. 그 후 현역대령 유승원이 인천시장으로 부임하여 시장실에서 회의가 열렸다. 중령인 경찰국장과 해병대위인 헌병대장이 배석했다. 윤영원이 시시콜콜한 문제를 가지고 갑론을박하며 시간을 끄는 것이 못 마땅해서 한 마디 했던 것이 혁명주체세력의 비위를 거슬렀다. 헌병대장인 해병대위가 해군대령인 윤영원을 힐난했다.

15년 이상 군생활을 했지만 생리적으로 맞지 않음을 느껴왔던 윤영원은 이때 군복을 벗고 1962년 1월 1일부터 인천항 도선사로 취역했다. 인천항은 조석간만의 차이가 심하고, 좁은 수로에 어망이 널려있고 소형선박이 갑자기 나타나 아찔한 순간이 많았다. 항로에 묘박하는 선박들이 있어 폭설과 농무 때는 한치 앞을 볼 수 없어 가슴이 타들어갔다. 도크 갑문(閘門)을 통과하는데도 장애가 많았다. 영하 20도 이하의 겨울철이면 파도가 쳐서 얼어붙은 본선의 줄사다리에 매달려 10m을 승하선하기란 위험천만이었다. 일본에서는 다른 직업보다 도선사의 머리가 빨리 희어진다고 백두업(白頭業)라고 했다.

그는 1968년에는 도선을 끝내고서 짙은 안개 속에 2일간 갇혀버렸다. 항로를 잃고 헤매던 도선선이 무인도인 승봉도 모래톱에 승양되었다. 도선사가 행방불명된 사건이었다. 다음날 노를 저어 나무하러 온 어부가 그를 발견하고 인천에 데려다 주었다. 도선사가 그렇게 위험하고 고단한 직업이다. 그러나 그는 “도선사를 천직으로 생각하니까 항상 즐겁고 안온하기만 했어. 탁 트인 시야를 바라보며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마셨고, 사다리를 타고서 본선을 오르내리는 운동은 골프장 필드를 걷는 듯 상쾌함을 느꼈지. 인천에서 안도까지 2~3시간을 도선선에서 독서와 사색을 즐겼어. 피도에서 본선을 기다리면서 우럭을 낚아 회와 찌개를 만들어 위스키 한 잔을 곁들이면 이런 신선놀음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었어.”라고 말하며 이어 “김성은 국방장관이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을 모시고 팔미도에 오셨어. 도선선에서 민어 두 마리로 회와 찌개를 만들어 드렸는데 팔미도 등대 밑 모래밭에서 어떻게나 맛있게 잡수시던지 지금도 그때의 광경이 눈에 선하다”고 회고했다. 그는 도선사의 고역을 즐거움을 소화하는 즉 轉苦爲樂의 지혜를 터득했다.

단 하루라도 인천항 운영에 차질이 생기면 수도권의 산업경제활동은 막대한 타격을 받는다. 그 이유는 인천항이 수도권의 원자재 수입항이었기 때문이었다. 인천항 기능의 일부인 도선사 윤영원은 32년간 소임을 다해 수도권 산업경제활동을 융성하게 하는데 일익을 했다.
윤영원은 도선사가 되기 전, 서울 원효로 4가에서 일곱 자녀를 데리고 다세대 주택에서 전세로 살았다. 어느 날 집주인이 변소가 협소하다고 변소출입을 금지했다. 아이들은 3분 거리의 전차종점에 있는 변소를 이용해야만 했다. 수신제가를 못하는 아비 때문에 자식들이 설움을 당하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가장은 가정을 품격 있게 다스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재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혁명정부에서 고위직을 권유받았으나 사양하고,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땀 흘린 만큼 돈을 벌어 안정된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도선사를 선택했다.

윤영원은 로터리를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얻기 위해 싸우기보다 현실에 만족하고 베풀며 살아가야 한다.’는 철학을 그가 1963년 3월 16일 인천로터리클럽에 입회하고서 현재까지 45년간을 실천해왔다. 1975년에 인천로터리클럽 회장과 1985년에 국제로터리 제369지구(인천·경기) 총재를 맡아 앞장서서 로터리정신을 구현했다. 시골벽촌에서 사설강습소(보통학교의 전신)를 설립하고 학생을 가르쳤던 선친을 기리기 위한 장학금 1천만 원을 비롯해서 로터리장학기금에 매년 1천 4백만 원씩 10년간 기부했다. 1987년에는 수해로 참혹한 재난을 당한 남부지방에 그가 위종양으로 위를 거의 자르다시피 하여 후유증으로 고생하면서도 3개월간 도선을 해서 번 돈 1천만원을 의연금으로 기탁했다. 그 후에도 수해가 나면 힘들게 번 돈 1천만원을 두 번이나 의연금으로 조선일보에 기탁했다.

『당신이 바로 열쇠다』, 『모든 사람이 당신을 원하고 있다』는 로터리 모토를 구현하기 위해 자행회와 영산 등 사회복지단체도 성심껏 후원했다. 그는 “많은 봉사단체들이 사회와 인류에 공헌하고 있지만 로터리클럽처럼 매주 모임을 갖고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토론하고 실천하는 예는 드물다”고 말했다. 그리고 “인간의 가치는 봉사의 정도에 따라 평가된다”라고 말했다. 그는 로터리운동이 『인격수련의 세계적 도장』이라는 신념으로 국내는 물론 일본, 인도, 미국, 유럽 등 세계 도처로 활동무대를 넓혀갔다. 그 결과 영예스럽게도 한국로터리총재단의 의장도 역임했다.

항해자가 북극성을 보고 대양항해를 하듯, 윤영원은 84세 노령임에도 지금도 참된 인생항로를 찾는 사람에게 북극성처럼 빛을 비쳐주고 있다. 그는 을지무공훈장과 충무무공훈장을 받았고 미국의 동성무공훈장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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