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金鍾吉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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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에 광양제철공장에 입항할 광탄선을 도선하는 김재곤.
김재곤(金在坤)은 1939년 5월 27일 경남 남해군 이동면에서 김용태와 박원아 사이에 3남4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고조부는 경복궁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고 한다. 오위장은 조선시대 종2품의 군직(軍職)이었다. 오위장은 순찰을 하고서 그 결과를 국왕에게 직접 보고했고,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궁정에서 근위병의 사열을 지휘했다. 그의 고조부와 그 형제분들도 무관으로 입신했던 무관의 가문이었다. 오위장은 고종황제가 군제를 개혁했던 1882년에 폐지되었다.

김재곤은 어릴 때부터 배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교장인 선친을 따라 일곱 살 때 남해군 삼동면 지족에서 살았다. 연기를 내뿜고 통통거리며 떠나는 발동선을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다. 지족은 작은 포구지만 조선소와 철공장들이 있었다. 조선소 목수가 만들어준 장난감 배를 물에 띄워놓고 물장난을 했다.
그는 남해중학교를 졸업하고 1954년 경남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부산항에 정박해있는 산더미 같이 큰 외국선박에 매료되었다. 그는 “저런 배를 타고 수평선 넘어 미지의 세계로 갈 수 없을까”하고 동경했다. 광복동 거리를 누비던 유니폼의 해양대학생들이 그렇게 멋있게 보일 수가 없었다. 3학년 때 해양대학으로 소풍을 가서 해양대학에 진학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해양대학 항해과 13기로 입학하여 1961년에 졸업했으나, 탈 배가 없어 고등학교 때 동경했던 ‘미지의 세계’ 꿈은 무산되었다. 당시 해양대학 졸업생 대부분이 탈 배가 없어 중고등학교 교사, 학원 강사, 신문기자 등 각양각색의 직업전선으로 흩어졌다. 김재곤도 학사경사 모집에 응시해서 경찰에 근무하다가 다행히 1962년 11월 고려호 3등 항해사로 승선하게 되었다. 

고려호는 태평양전쟁 말기 폭격을 맞아 부산진 앞 바다에 좌초된 가즈우라마루(勝浦丸)를 극동해운 사장 남궁련이 인양하여 요코하마 슈리미조선소에서 수리한 선박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Miss Korea라고 명명했다. 전무후무하게도 현역해군제독 박옥규가 상선인 고려호 선장이 되어, 1952년 10월 21일 부산항을 출항하여 최초로 태극기를 게양하고 태평양을 횡단했다. 

김재곤은 선박관리와 선내규율이 철저하게 다져진 고려호의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그래야만 망망대해에서 고립된 선박이 혹독한 바다의 위험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명령체계가 확립되지 않고 각자가 직무에 충실하지 못한다면 공동체가 공멸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 선장이 되고서도 그러한 신념으로 선원들을 지휘 통솔했다. 

김재곤은 극동해운에서 2년간 근무하다 선원송출로 해외에 나갔다. 제1차로 2천 톤급의 Loong Wha호, 그 다음으로 제2차로 1964년 7월 3천 톤급의 Loong An호에 승선하게 되었다. 송출선원 36명이 부산항 2부두에 도열했다. 해운계 인사들과 선원가족들이 모인 가운데서 부산해운항만청장이 송출선원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격려사를 했다. 마치 군부대의 출정식을 방불케하는 분위기였다. 일자리가 없어 실업자들이 넘쳐났고, 수많은 선원들이 배를 탈 수 없어 어깨가 축 쳐져 부산 중앙동 거리를 배회하던 때였다. 이때 협성해운이 일본 교세이기센의 편의치적선박 3척에 한국선원 송출의 문을 처음으로 열었다. 

환송식이 끝나고 여객선이나 항공기 대신 비용절감을 위해 소형화물선 북해호에 올라갔다. 짐 보따리를 통로에 놓아두고 해치 위에 모여앉아 오륙도를 뒤로하고 부산항을 떠났다. 선장과 기관장에게는 선실이 제공되었으나, 선원들 일부는 식당과 통로바닥에서, 일부는 아예 해치 위에서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현해탄을 건넜다. 구레조선소에 도착해 보니 수많은 선박들 중에 볼품없이 벌겋게 녹슬어있는 가장 작은 배가 룽안호였다. 폐선하려고 매달아 두었던 배를 해운경기가 좋아져 고철 값으로 구입하여, 값싸고 양질의 한국선원을 고용해서 운항하게 되었다. 실망스럽고 참담함을 억누를 길이 없었으나 그 길에서 벗어날 탈출구가 없었다.

룽안호는 항해 중에 외판에 균열이 생겨 침수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나무를 깎아 구멍을 막고 그 위에 시멘트를 해서 응급조치를 했다. 아슬아슬한 위험도 겪었다. 겨울철 거친 동지나해를 항해하던 밤중에 기관실이 침수되기도 했다. 늑골 하나가 균열되어 절단되다시피 된 상태였다. 그 영향으로 인접된 외판이 찢어져 침수가 된 것이었다. 선체의 로링으로 그 부위에 충격이 가해지면 당장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총비상령을 발령하여 전 선원이 동원되어 지지목과 각종 목재를 날라다가 밤을 새워가며 버팀목을 세우고 괴이고 하는 응급조치를 했다. 근근덕신으로 지옥 문전에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그래도 선원들은 룽안호에 정이 들고 애착도 생겼다. 벌겋게 녹 쓸었던 선체를 부지런히 ‘깡깡’을 하고 페인팅도 하여 겉보기엔 새 배같이 만들었다. 기기 하나하나를 정성드려 수리하고 구석구석을 닦고 기름칠을 하여 모든 선박의 기능이 제대로 돌아갔다. 선원들은 스스로가 개척자라고 자부하며 “우리가 잘해야 한국선원들에게 살길이 열린다. 우리가 힘들더라도 참고 견디자”라며 서로를 격려하는 술잔도 나눴다. 그렇게 죽을 둥 살 둥 일해도 급료는 선장 330불, 2항사 90불, 말단선원 10불에 불과했다. 하기야 당시 우리 국민소득이 100불도 되지 않을 때였으니까. 이렇게 시작된 선원송출이 1985년경에 절정을 이루어 4만 명에 5억불 외화를 가득하여 당시 국제수지 개선에 한몫했다.

김재곤은 태극기를 게양한 국적선박을 타고 싶다는 생각에 애환에 젖었던 송출선원 6년을 마감했다. 대한선박에 입사하여 여러 선박의 선장을 역임하며 1년에 한번밖에 가족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오대양 육대주를 떠돌았다. 한때 토성호의 선장으로 마제란 해협을 통과한 적이 있다. 당시에 칠레 도선사가 승선하였으나 아르헨티나 정부가 칠레 군사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선해버렸다. 도선사도 없이 엉터리 해도에 의지해 항해를 하느라 위험한 고비를 넘기도 했다. 아옌데 대통령의 사회주의국가 칠레의 들판에는 잡초만 우거져 먹을 것이 없었다. 국민들의 얼굴에 누렇게 부황이 뜨고 눈은 초점을 잃고 있었다. 곡물을 하역하는데 하역인부가 20명이면 족한데도 60여명이 배에 올라와서 낮잠을 자며 ‘농뗑이’를 부렸다. 한 달이 지나도 하역은 끝나지 않았다. 국영대리점이 식수를 공급하는데도 며칠이 걸렸다. 포퓰리즘이 낳은 재앙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가족들을 자주 볼 수 있는 범양상선으로 옮겼다가, 1979년에 묵호항 도선사가 되었다. 그러나 시멘트와 무연탄 가루가 뿌옇게 휘날리는 묵호항에서 평생을 보낸다고 생각하니 질식할 것만 같아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퇴했다. 다시 승선을 하다가 1985년에 재도전해서 고향이 바라보이는 여수항 도선사로 취역했다. 
배의 길이 320m, 흘수 20m의 광탄선이 입항하는 광양항 항로의 만곡부분을 건설부 항만건설사무소가 폭 350m의 준설계획을 세웠다. 김재곤은 항해역학상의 수치를 제시하며 준설의 폭을 넓혀 줄 것을 간곡하게 청원했다. 그 결과 폭 500m로 확장하게 되어, 이에 대해 크나큰 긍지를 가지고 있다. 

1987년 현대자이안트호가 철광석 30만 톤을 적재하고 여수외항에 투묘했으나 테일 샤프트가 고장 나서 선체가 꼼짝도 못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테일 샤프트를 수리를 하려면 선미를 수면 위로 올려야하는데 그 많은 화물의 양하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어요. 우선 일본에서 1만 6000마력의 초대형 예선을 불러오고 여수항의 예선 5척을 동원하여 본선을 예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며 작전계획을 수립했으나 겨울철이라 거센 북서풍과 파도가 큰 장애였습니다. 하지만 계획변경은 불가능했습니다. 일본 초대형 예선은 선수에서 예인을 하고, 다른 예선 5척을 선수와 선미 양현에 각각 배치함과 동시에 본선의 조타기를 이용하여 방향을 조정하며 우선 예행연습을 해보았습니다. 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어 작전에 들어갔습니다. 곡예사가 고난도의 곡예를 하듯 본선과 예선 6척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며 만곡부를 통과할 때 아슬아슬한 위험이었지만 본선을 무사히 부두에 접안시키는 쾌거를 거두었습니다. ‘Wonderful! Perfect!’라고 외치는 선장의 감탄사를 듣고서야 긴장이 풀려 몸과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했습니다.”라고 그때의 긴장과 감격을 말했다. 

그는 2007년 5월 정년퇴임할 때까지 22년간 거대한 구조물인 시추선과 장대한 크레인을 실은 바지선 등 크고 작은 선박 1만 1500여척을 무사고 도선하며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 공로가 인정되어 김재곤은 대통령표창을 수상했다.  

*협찬: 창명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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