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金鍾吉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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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O 사무총장 Srivastava가 1983년 10월 23일 방문했을 때 이준수 등과 오찬 장면
이준수(李俊秀)는 1926년 7월 29일 황해도 사리원에서 이근섭과 박용복 사이에 2남 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해방되던 1945년에 경기중학교를 졸업했다. 서울대 공과대학의 전신이 된 경성광산전문학교에 입학했다가 그만두고 바다가 좋아서 해양대학 항해과 1기생으로 입학했다.

그는 1948년에 해양대학을 졸업하고서는 좋아했던 바다를 떠나 중앙육아원 부속 농공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6.25가 발발하자 50여명의 고아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온갖 고초를 다 겪어가며 천신만고 끝에 부산까지 왔으나 고아들을 먹여 살릴 길이 막막했다. 고아들을 굶길 수 없어 피난보따리에 넣어두었던 책을 팔려고 부산역전 길거리에 책을 늘어놓고 있었다. 고달픈 피난살이에 역사, 종교, 철학 등 재미없는 책을 그 누가 사보랴!

해양대학 동기생 박현규도 대한해운공사를 따라 부산에 피난 와있었다. 길을 가다가 책을 파는 이준수를 보았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 하지만 거지 떼와 방불한 고아들과 함께 책을 팔고 있는 이준수의 몰골이 처량했다. 박현규의 주선으로 해운공사에 취직해서 호구를 해결했다. 그는 동대신동 산 중턱에 무허가 바라크에서 고아들과 침식을 함께 했다. ‘가진 것 없어도 도둑맞을 것은 있다’고 도둑이 담요나 헌옷가지를 훔쳐갔다. 옆에서 하도 딱해 “미제 자물쇠라도 사서 잠그라”고 해도 “우리보다 어려운 사람이 가져가는데 어떻게 해!”라고 말하며 빙긋이 웃었다. 추운 겨울에 “오바를 입어!”라고 하면 “고아들을 제대로 입히지도 못하는데 내가 어떻게 오바를 입어!”라고 대답했다.

피난시절이라 부산시내에 구걸하는 불량아들이 득실거렸다. 경찰이 아이들을 난폭하게 끌어다가 짐차에 마구 처박는 것을 본 이준수는 “죄 없는 애들을 왜 개 끌어가듯 끌고 가! 너희들이 이 애들을 먹여 살릴래? 선도할 자신 있어!”라고 험상궂은 인상을 하고서 고래고래 질타를 하자 순경들이 놀라 애들을 버려두고 가버렸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장사치들을 채찍으로 좇아내고 탁자와 의자를 뒤엎으셨다. 그리고는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드느냐?”고 진노하셨다’는 성경구절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었다. 병들고 가난한 이웃을 한없이 사랑하면서도 불의에 대해서는 분노를 폭발하셨던 예수의 행적에 독실한 크리스천인 이준수가 순치되었으리라!

이준수는 해운공사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모교 해양대학이 수재인 그를 교수요원으로 징발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후배제자들의 교육에 정열을 불사르다가 신성모 학장의 권유로 해양대학을 떠나, 경희대학과 서울대학에서 각각 석사와 박사과정을 마치고 모교로 돌아왔다. 그는 교수로 있으면서 동창회장을 맡아 정부 각 부처를 찾아다니며 학교와 동창회의 어려운 현안문제들을 슬기롭게 해결했다. 해양대학이 문교부로 이관되기 전에 학사학위를 받지 못했던 졸업생들에게 학사학위를 수여토록 했고, 병역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사회진출을 못하고 있던 졸업생들을 해군예비원령으로 해결했다.

1960년대 후반 선원송출이 한창일 때 보수나 모든 여건이 열악하여 실습선 반도호에서 승무원들이 떠나고 있었다. 그는 어려운 곳을 찾아 나타나는 성품대로 반도호 선장을 자임하고 나섰다. 하루도 빠짐없이 반도호에 출근해서 승무원들을 격려하고 고무했다. 그렇게 하여 실습선 승선교육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한국해운학회를 비롯하여 한국항해학회, 한국해법학회, 한국항만학회 등을 창립하거나 관여하며 우리나라 해운문화를 꽃피울 토대를 일찍부터 닦았다.

이준수는 1968년 1월부터 모교의 학장으로 취임하여 8년간 학교발전에 혼신의 열정을 다 바쳐 오늘의 해양대학 기틀을 구축했다. 교수자질 향상을 위해 외국유학을 보내고서, 친지들의 도움을 주선하여 그들의 생활비까지 지원해서 학위를 취득토록 했다. 그는 실습과장인 정세모 교수에게 “기관과 교수들은 외국유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다섯 명이나 받았는데, 항해학 계열은 박사학위를 주는 대학이 지구상에 없네. 정교수는 연세대학에서 받은 전자공학석사를 토대로 전자공학박사 학위를 받으면 전파항해학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일세.”라고 권유하였다. 정세모는 일본으로 가서 동경공업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렇게 해서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해양대학의 박사학위 소지자 교수 비율은 전국 대학 중에 제1위가 되었다.

이준수는 한국 제1의 항만 부산항 초입에 위치한 조도가 상선대학 부지로 최적지라고 구상했다. -그 구상은 해대요가를 작사했던 그의 낭만에서 꿈틀거렸으리라!- 조도는 국방부와 해군, 그리고 민간인들이 각각 소유하고 있어 해양대학 신축부지로 확정될 때까지 엄청난 저항에 부딪쳤다. 이 문제를 이한림 건설장관이 발 벗고 나서서 해결해 주었다. 이한림은 군 후배인 문교장관과 국방차관 등 관계당국과 수차례 만나 설득을 거듭하여 해결했다.

이한림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해양대학을 도운 데는 연유가 있다. 이한림이 수산개발공사 사장으로 취임하였을 때, 윤상송 학장의 추천에 의하여 이준수가 수산개발공사 선박담당 이사로 한동안 근무했다. 이한림은 이때 이준수의 인격과 실력에 완전 매료되어 깊은 신뢰와 애정을 갖게 되었고, 이로 인해 해양대학 신축에 절대 절명의 도움을 주었다.

신축공사가 착공되었으나, 바다가 가로놓여 건설자재의 수송애로로 인해 공사가 지지부진했다. 건설업자를 닥달해 봐야 소용없다고 판단하고, 이준수와 평소에 돈독한 우의를 유지하고 있던 장지수 해군참모총장을 만났다. 공사 진행상의 애로사항을 그에게 설명하고 협조를 구해 해군상륙정 LCM 한 척을 할애 받았다. 끊임없이 트럭에 실려 들어오는 자재를 트럭 채 LCM으로 실어날아 공사가 급진전 되었다. 그는 어떤 인연으로든 친교를 맺은 사람을 특유의 친화력으로 포용하여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유지하다가 꼭 필요할 때 도움을 청했다. 그러면 상대가 큰 힘을 보태주어 불가능한 일도 해결되었다. 해결이 되고나면 그는 조용히 뒷전으로 물러나고, 도움을 준 분을 칭송하면서 자신을 추호도 들어내지 않았다.

이한림은 학교가 준공될 무렵, 건설부의 추경예산을 어렵게 확보하여 조도와 영도간의 방파제를 건설해 주었다.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은 은공을 갚을 길 없었다. 이준수와 교직원과 동창회가 뜻을 모아 이 방파제를 『翰林提』라고 명명하려고 했으나 이한림은 한사코 고사했다. 요즘 큰 길, 작은 길이 모두 이름을 붙이는 세상이 되었다. 다리도 이름이 있는데 방파제에도 『翰林提』라고 이름을 붙인들 무슨 흠이 될까? 허나 이한림이 생존해 있어 곤란하다면 후일 해양대학·이한림·조도 3자를 아우르는 상징으로 『翰林提』라고 명명될 날이 오리라고 기대한다.

대형오염사고가 빈번하게 발생되어 국제해사기구(IMO)가 『선원의 훈련·자격증명·당직근무에 관한 협약(STCW)』을 제정했다. 이 협약의 발효가 임박하여 급하게 선박직원법과 선원법을 개정했고 동시에 선원재교육기관인 해기연수원을 1983년 6월 30일 설립했다. 당시 필자가 해운항만청 선원선박국장으로 근무할 때, 이희성 교통장관의 결심을 받아내어 이준수를 해기연수원 위원장으로 위촉했다. 급하게 추진하다보니 예산을 확보 못해 원장을 임명할 수 없었다. 위원장이 원장을 겸임해서 무보수로 힘든 업무를 추진했다.

필자가 하도 송구스러워 “선생님! 차량구입비와 업무추진비만은 확보되었습니다. 쓰시지요.”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그는 업무추진비도 사양하고, 손태현 교수가 일본 교환교수로 가면서 두고 간 고물승용차를 인수하여 손수운전을 하며 교수인선 등 개원준비를 하느라 이곳저곳을 분주하게 다녔다. 이준수의 고매한 인격을 흠모하여 정영화, 유명윤, 허용범 등 우수한 교수진이 모여들었다. 이들이 열정적으로 선원재교육을 실시하여, 한국선원의 자질을 세계적 수준으로 향상시켰다.

이준수는 한국해운의 메카인 해양대학이 세계적 굴지의 상선대학으로 발전하는데 한 알의 밀알이 되어 한국해운의 큰 별이 되었다. 그 공로로 그는 국민훈장동백장을 수상했다. 젊은 날의 청순했던 낭만이 속세에 물들지 않았고, 연륜이 쌓이면서 청교도적인 도덕과 절제로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아왔다. 지금은 세상살이에 초연하여, 30년 후배 목사님이 사목하는 해양교회에서 장로의 직분으로 지순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청하라, 주실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란 진리를 체득하고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다.
*협찬: 창명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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