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金鍾吉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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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도서관 자료실에서‘한국해양대학론’을 집필하는 손태현 전 한국해양대학 학장
손태현(孫兌鉉)은 1922년 5월 22일 경남 밀양읍 교동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5년에 한국해양대학 항해과 1기로 입학하여, 1948년 졸업하고서 교수요원으로 모교에 남았다. 그는 이시형 학장의 분신이 되어 해양대학과 운명을 같이했다. 그는 “나의 종교도 해양대학이요, 나의 신념도 해양대학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평생을 모교와 제자와 그리고 학문을 위해 열정을 다 바쳤다.

신성모가 1956년 11월 28일 제8대 해양대학 학장으로 취임해서 묵은 때를 다 벗겨내고 새로운 학풍을 진작시키고자 했다. 학생들에게는 외출금지령을 내려 면학분위기를 조성했고, 교수들에게는 학문연구에 박차를 가하면서 교수자질 향상을 위해 학위를 취득하도록 서울대학 등으로 유학을 보냈다.

손태현은 연세대학으로 갔다. 필자가 연세대학으로 가게 된 경위를 묻자, 그는 “신성모 학장의 추천서를 갖고 백락준 연세대학 총장을 찾아갔었지. 최현배 부총장이 배석한 총장실에서 백락준 총장께 3학년 학사편입이 아니고 1학년부터 시작하겠다고 말씀드렸지. 교수경력을 가진 40대의 만학도가 20세 이하의 1학년생들과 섞여 교육을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던지 총장과 부총장께서 한참이나 망설이시다가 허락을 하셨어. 1학년 입학을 허락받았으나 그래도 자존심을 고려해 상급생이 없는 신설된 경영학과를 선택했었지”라고 50년 전을 회상했다.

손태현은 1961년 12월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경영학과를 제1회로 졸업하고서 해양대학으로 돌아왔다. 그는 해양대학 졸업생으로는 최초로 영예롭게도 1963년 9월 16일 제11대 학장으로 취임했다. 사람을 ‘외유내강’이나 ‘외강내유’라고 분류하지만 손태현에게는 외강내강(外剛內剛)이란 표현이 적절했다. 그는 스스로 밤을 새워가며 학문연구에 몰두하는 학구열이 강인하다 못해 처절했다. 그리고 교수와 학생들에게도 추상같은 엄격한 기준을 정하여 공부하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게 했다. 

그는 학장임기를 마치고서 다시 연세대학으로 돌아갔다. 연세도서관에 학장을 역임한 만학도가 하루도 빠짐없이 밤늦도록 학문연구에 몰두한다는 기획기사가 중앙일간지 한 면을 완전 장식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손태현이었다. 그는 학문연구에 매달려 스스로와 악전고투하며 1970년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그러나 그가 연세대학의 순수혈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연세대학의 첫 번째 경영학박사학위를 받을 수 없어, 아쉽게도 동아대학으로 옮겨 1972년에 경제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손태현은 1968년부터 간난신고(艱難辛苦)의 대장정에 들어갔다. 그는 한민족이 한반도에서 유구한 역사를 바다와 더불어 살아오면서 눈부신 해상활동을 하였음에도, 한국해운사에 대한 연구가 없었다는 것을 학자로서 부끄럽게 생각해왔다. 간혹 학자들이 단편적으로, 또는 다른 연구과제에 수반하여 부차적으로 한국해운사에 관한 기술은 있었다. 그러나 한국해운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실적은 없었다. 경제학이 경제사·경제이론·경제정책으로 이루어지듯 해운론 역시 3분야로 이루어져야만 했다. 

해운이론과 해운정책은 외국학자들에 의해 많은 연구가 있어 이를 인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해운사는 한국학자 스스로가 연구개척할 영역이었다. 해양대학에서 해운론 강좌가 있었지만 외국인이 연구한 이론과 정책만을 인용하여 강의했다. 그는 조상들의 해운역사를 강의하지 못해 학자로서 부끄러움을 금치 못한 나머지 한국해운사 연구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의 앞에는 태산준령 같은 험난한 길이 가로놓여 있었다. 첫째, 국내외를 불문하고 한국해운사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가 전무했다. 둘째, 역사, 경제학, 경영학, 항해학, 해운실무 등에 관한 광범하고 종합적인 지식이 그에게는 부족했다. 셋째, 규장각의 도서나 고문서 등을 판독하고 해석할 한학(漢學)도 그에게는 지대한 난제였다. 손태현은 자신의 능력부족을 통감하고 중도에 포기할 것을 몇 번이나 생각했다. 그러나 ‘불충분하고 부정확하더라도 한반도 역사에서 이러이러한 해운 사건들이 있었다’라는 정도라도 기술해 두면 후일 누군가가 보완과 보증을 해 주리라는 믿음으로 붓을 던지지 않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앞만 바라보고 나갔다.

그는 한국해운사를 집필하는 과정에 겪었던 처절한 몇 가지 일화를 술회했다. 그 하나는, 한국사의 개념을 파악 못해 미로에서 방향감각을 잃고 좌절감에 빠져들었다. 당황한 마음에 누구의 소개도 없이 서울대학 고병익, 한우근, 김철준 교수의 연구실을 찾아갔다. 앞뒤구분을 못하는 유치한 질문을 하였는데도 이 석학들이 무단침입자의 무례를 탓하지 않고 역사의 방향을 제시하고 문헌소개까지 해 주었다.

또 하나는, 주일 미국대사이었던 라이샤워 교수의 저서 『Ennin’s Diary』와 『Ennin’s Travels in Tang China』를 구하려고 출판사에 연락했으나 절판 품절되었다. 영·미·일의 서점에도 문의했으나 허사였다. 보스톤에 있던 현대공업 부사장 안충성으로 하여금 라이샤워를 직접방문토록 했으나 한 권씩밖에 없는 소장품이라고 거절당했다. 안충성은 손태현의 성화에 못 이겨 재차 라이샤워를 방문하여 꼭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간절하게 호소하여 한 권씩밖에 없는 희귀본을 얻어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연세대 상과대학 송태영 교수의 연구실에서 한국해운사의 틀을 잡느라 몰두하던 무렵에 교내에 도난사건이 빈발하였다. 조사를 하던 중, 심야까지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던 그 연구실을 주목했다. 일제단속에 지장이 있으니 야간에 연구실 사용금지의 통고를 받았으나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총장에게 불려가 사정을 설명했더니 총장이 “도난사건 때문에 연구를 중단하게 할 수 없지요”라고 말하며 오히려 격려해 주었다. 그런 소란이 있었음에도 송태영은 1년 이상 그의 연구실을 사용토록 허락해 주었다. 그 외에도 조금이라도 연구에 필요한 문헌이 있으면 그곳으로 여행하는 사람에게 그 학자가 초면이던 구면이던 불문하고 청탁하는 습성이 생겼다. KDI의 사공일 박사와 미국의 신중성 박사에게도 많은 폐를 끼쳤다고 했다.
손태현은 해외연구를 위한 출국에 쫓기어 충분한 논증을 못 다한 채 아쉬움을 남겨두고 1982년 8월말 『韓國海運史』를 발간했다고 했다. 필자는『한국해운사』를 서가에 장식품으로 꽂아두었다가 『船舶行政의 變遷史』를 쓰느라 『한국해운사』를 탐독했다. 원시시대의 선사해상교통으로부터 시작하여 삼국시대의 중국과의 역동적인 견사운항(遣使運航), 고려후기와 조선조에서 세곡(稅穀)을 운송하던 조운(漕運), 대한제국의 서구형기선 운항, 그리고 현대해운에 이르기까지 시대적으로 구분된 한민족의 해운통사(海運通史)가 기술되어 있었다.

『한국해운사』는 구절양장(九折羊腸)의 14년간 고난을 극복하고서, 잃어버린 한민족의 해운뿌리를 캐낸 손태현의 위대한 업적이었다. 선조들의 해상활동에 관한 기초적 문헌이 없는 상황에서,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그가 그 난해한 한민족의 해운통사를 발간한 경이로움에 필자는 고개를 깊이깊이 숙였다. 그리고 필자는 『韓國海運史』를 숙독하면서 미당 서정주의 시 한편을 연상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손태현은 지금도 해양대학 도서관 논문자료실에서 『한국해양대학론』을 집필하고 있다. 해양대학 출신들이 기업경영, 해상근무, 행정, 선급, 보험 등 각 분야에 투신하여 오늘의 한국해운을 이룩한 업적을 기술하고 있다. 해운분야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면에서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적들을 발굴하여 기술하고 있다. 심지어 김일성이 1948년 5월 14일 정오를 기해 남한에 전기를 단전했다. 단전으로 서울은 암흑세계가 되었고 모든 산업 활동이 마비되었다. 이때 미국이 제공한 디젤발전기를 해양대학 출신이 조립하고 수리하여 어두움을 밝히고 산업 활동이 재개되었다. 이러한 기록들을 단순한 기술이 아니고 논증을 해가며 기술하고 있다.

쉬는 토요일인데도 일찍 도서관 자료실에 출근하여 집필에 몰두했다. 필자가 “선생님! 내후년이면 미수(米壽)이십니다. 안경도 쓰시지 않고 잔 활자를 보시며 쉴 새 없이 집필하시는 건강은 하늘의 은총입니까? 아니면 부모님의 음덕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하하하”하고 웃으셨다.  
*협찬: 창명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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