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金鍾吉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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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판부 부원들과 함께 안전운항을 위해 철저한 점검을 하는 김말봉 갑판장(오른쪽에서 두번째).
김말봉(金末捧)은 1952년 5월 3일 부산 영도구 영선동에서 김면조와 서동열 사이에 9남매 중 여덟번 째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던 때가 북한의 남침에 의해 촉발된 6·25전쟁으로 전국토가 초토화되었고 수많은 인명과 재산이 사라졌다. 남북한의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모여들어 참담한 생활을 하던 민족수난시대였다. 그의 대가족도 먹고살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티기가 어려웠던 형편에서 그는 배워야겠다는 일념으로 부산해동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김말봉이 3년간 군복무를 마치고 시급히 해결하여야 할 일은 일자리를 찾는 것이었다. 영도섬에서 바다와 배를 보면서 자란 그는 ‘내가 살아갈 길은 바다와 배밖에 없다’는 각오로 부산해운항만청을 찾아갔다. 승선경력이 없어 당장 외항선에 승선할 자격이 없다는 대답에 실망했다. 그러나 끈덕지게 도움을 청하자 요리사면허가 있으면 승선할 수 있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그는 요리학원 3개월 과정을 수료하고 요리사면허를 취득하고서 1977년 10월 1일 흥아해운의 오로라호의 조리사로 승선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와 낭만으로 가슴 설레며 부산항을 출항했다. 그러나 선원들의 식탐과 음식투정을 참고 견디기가 어려웠으나 군대생활에서 단련된 인내심으로 버텼다.

1987년에 적성에 맞지 않는 조리사를 그만두고 견습갑판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선박운항과 갑판정비를 배우기 위해 피나는 고생 끝에 6년 만에 갑판장으로 승진했다. 갑판장은 갑판부 사관들과 부원들의 중간에서 허리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허리가 튼튼하여야만 신체가 건강하게 활동하듯, 선박도 갑판장이 허리역할을 잘해야만 선내화합과 운항능률을 기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어렵게 체득한 기술과 경험도 후배들에게 아낌없이 전수했다.

김말봉은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는 “1993년 9도남호가 홍콩에서 컨테이너를 싣고 방콕으로 항해 중이었습니다. 베트남 남단을 지나는데 태풍으로 거칠었던 바다가 잠잠해져 선내 크레인을 이용하여 갑판에 적재된 컨테이너 시프팅 작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크레인이 고장이 났습니다. 크레인 수리를 마치고 다시 작업을 하려는데 파도가 거세게 몰아쳤습니다. 다음날 방콕에서의 운항스케줄을 맞추려면 항행 중에 작업을 해야만 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항구에 입항해서 작업을 해도 될 것을…. 운항비용을 절감해서 회사에 도움이 되게 하겠다는 충정으로 전 선원들이 작업에 매달렸습니다. 역풍으론 작업을 할 수 없어 선수를 뒤로 돌려 작업을 하다가, 작업을 멈추고는 선수를 돌려 전진항해를 하다가 다시 선수를 뒤로 돌려 작업하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무거운 고박장비를 양 손에 들고 상갑판을 지나가다가 넘어지면서 성난 파도에 휩쓸렸습니다. 요행히 핸드레일을 붙잡고 ‘사람 살려’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데 동료가 달려와 구조해 주었습니다. 그때 수종고혼이 되었을 터인데 살아남아 인생을 덤으로 살고 있습니다”라고 회상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또 “2001년에는 마닐라호가 매주 부산과 울산, 그리고 일본의 8개 항을 운항하는 벅찬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선원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특히 일본 토요하시항은 매주 새벽 2~4시 사이에 입항했습니다. 북서계절풍이 거세게 몰아치던 1월 어느 날 새벽에 부두와 부두 사이로 들어가 접안시키려고 했지요. 히빙라인을 던졌으나 갑판에 적재된 컨테이너에 걸려 부두에 도달하지 못 했습니다. 몇 번을 반복하다가 겨우 선수 히빙라인으로 로프를 부두비트에 걸었습니다. 직경 10cm의 로프 하나로 바람에 밀리는 9천톤의 선박을 지탱하기란 아슬아슬했었지요. 로프의 장력에 못 이겨 로프와 맞닿는 난간이 엿가락처럼 구부러졌습니다. 로프가 절단된다면 선원들이 부상을 당하기 때문에 모두 대피시키고서 저가 윈치를 조작하느라 영하의 추위도 잊은 채 30분간 사투를 벌였습니다”라고 아찔했던 순간을 말했다.
그리고 “30년간 배를 타며 부모님이 위급하다는 전보를 받고도 임종을 지키지 못한 불효는 두고두고 마음을 저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몇 날을 바다가 요동치는 황천항해에서 성난 파도가 배를 통째로 집어삼킬 것만 같아 ‘이제 죽는구나.’하고 가슴 조였던 일들이 눈을 감으면 주마등처럼 흘러갑니다”라고 지옥문을 넘나들던 순간들을 회상했다.

그리고는 “저가 처음 승선을 할 때는 외항선 마도로스는 육상직업보다 급료도 많았고, 서민들에게는 불가능했던 외국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외제가전제품도 가질 수 있어 이웃들로부터 부러움을 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장기간 가족과 떨어져 열악한 해상생활을 하면서도 오히려 육상직업보다 급료가 낮고 사회적으로 대우도 받지 못해 젊은 사람들이 승선을 기피해 안타깝습니다”라고 선원기피 현상을 걱정했다.

1992년부터 흥아해운에도 중국 조선족이 승선하기 시작했다. 견습갑판원으로 승선한 그들을 김말봉은 처음부터 하나하나 가르쳐서 지금은 그들이 흥아해운의 다른 선박에서 갑판장 직급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돈을 벌기위해 가족을 멀리 떠나온 그들이 측은하여 다독거리며 가르쳤습니다. 이제는 어엿한 갑판장으로 제 몫을 다하고 있는 것을 보면 대견하고 흐뭇합니다. 그러나 한국선원이 고임금이란 이유로 선주들로부터 외면당하여 외국인에게 일자리를 빼앗기는 것을 보면 안타까울 뿐입니다”라고 우리선원들이 우리선박에서 밀려나가는 것을 애석해 했다.

욱일승천하던 흥아해운이 도남그룹을 인수하여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으나 끝내 회생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흥아해운이 결정적 타격을 받고 부도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상여금이 삭감되자, 선원들이 회사가 문을 닫으면 퇴직금도 못 받는다고 불안해하며 흥아해운을 떠났다. 그러나 김말봉은 흔들리지 않고 어려운 여건을 극복해야 한다는 각오로 가일층 맡은바 소임을 다했다. ‘동료들에게도 회사가 어려울 때 나몰라라 하고 떠나는 것보다 남아서 회사를 살리는 것이 뱃사람의 의리가 아닌가’라고 독려했다.

흥아해운은 법정관리 10년간의 굴레를 벗어나 정상화되었다. 이윤재 회장이 분골쇄신하며 회사의 느슨한 나사를 조이고 치밀한 경영전략이 주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회사에 애착을 가지고 직무에 최선을 다했던 김말봉 같은 충직한 보통선원들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30년 긴 세월을 오직 흥아해운에서만 외길을 걸어왔습니다. 그 세월 속에서 얼굴에 계급장처럼 주름살이 늘어만 갔습니다. 그래도 이처럼 건재하고 있는 것은 가족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으로 한 시도 마음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회사의 배려와 동료들의 협조가 없었다면 내가 버틸 수 있었을까 생각하고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무상한 세월에 대한 아쉬움과 주변을 돌아보는 마음이 아름답게 보였다.

그는 갑판책임자로 “철저한 준비와 점검으로 갑판에서의 잠재적 결함을 사전에 조치하여 PSC(항만국통제)에 걸려 출항정지를 당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운항스케줄에 차질이 발생되지 않아 수출화물이 적기에 도착되어, 고객들로부터 신뢰를 높이는데 일조했다고 자부합니다”라고 선원으로서 당당하게 살아왔음을 말했다. 이러한 공로로 김말봉은 국무총리표창을 수상했다. 그러나 그 표창은 그의 30년 가시밭길에 비하면 너무나 약소했다.

음지에서 땀과 눈물로 애환을 달래며 살아온 수많은 보통선원들이 이름 없는 들꽃처럼 사라져갔다. 그들의 공적을 정당하게 평가하여 훈장과 같은 큰 상으로 보상해 준다면 선원확보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도가 있으련만! 해운기업은 경영자의 철학과 능력에 따라 흥망이 엇갈리겠으나, 그에 못지않게 선원들의 책임의식과 자질에 달려있다.

선원에는 상선대학을 졸업한 귀족선원인 상선사관이 있고 서민선원인 보통선원이 있다. 권한과 명예는 상선사관에게 돌아가는 반면, 책임과 질책은 땀과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진 보통선원의 몫이 되어왔다. 속원이나 하급선원이란 용어는 종속이나 굴종의 용어였다. 그러나 세상은 변해 선박에 최첨단 장비가 설치되고 15명 내외로 선원이 감축된 현실에서 보통선원은 종속관계에서 벗어나 어엿한 독립기능인으로 위상을 찾아가고 있다.
*협찬: 창명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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