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金鍾吉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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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년 10월 23일 IMO 사무총장 Srivastava의 한국방문 때 박현규(사진 오른쪽)와 만남.
 박현규(朴鉉奎)는 1927년 7월 3일 경남 울산 대현면에서 박은기와 최교이 사이에 5남 5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45년에 해양대학 항해과 1기로 입학했다. 필자가 해양대학에 입학하게 된 동기를 묻자 그는 “선친의 친구 분이 ‘우리나라가 부강한 국가가 되려면 젊은이들이 해양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말씀에 감동되어 그렇게 되었어”라고 말하며 이어 “진해에서 입학하였는데 국비관비생이라지만 미군정에서 예산이 영달되지 않아 급식은 물론 피복지급이나 난방도 되지 않아 그 고생을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었지. 이시형 학장이 강냉이밥을 잡수시니 그것을 따라 먹을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가 해군에 교사를 빼앗기고 인천으로 이전했으나 교사를 구하지 못해 다시 군산으로 갔었지. 그 지긋지긋한 고생을 했기 때문에 모교에 대한 연민의 정이 애착과 집착으로 되었는가봐”라고 60년도 넘은 옛날을 전설처럼 이야기했다.

그는 1948년 4월에 해대를 졸업하고 해운공사에 입사했다. 평택호 3등 항해사로 첫 승선을 하여 2등 항해사로 진급하였는데 야간당직 중에 영도 수상서 형사가 그를 체포해 갔다. 2등 기관사가 작성한 포섭대상자 명단을 남로당 조직책에게 넘겨주었는데 그 명단에 박현규가 포함되었기 때문이었다.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다행히 제7관구 경찰청장 박찬현의 신원보증으로 석방되었다. 박찬현은 그의 선친과 부산 제2상 동창이었다.

그는 해운공사에서 해기계장을 했고,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해운공사노조  초대위원장으로 피선되어 선원복지를 위한 투쟁도 했다. 선박으로 돌아가 동남아항로에 취항하는 제주호 선장을 포함 총 8년간의 승선경력을 마감하고 1961년 6월에 해운공사 본사 해무과장으로 발령받아 육상근무를 했다.

박현규는 1964년 4월에 풍국해운을 설립하여 대표이사가 되었다. 이것이 그의 인생항로의 전환점이었다. 그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으로 망가졌던 해운과 조선을 계획조선으로 복구된 사실을 신태범과 함께 그의 초등학교 동기생이었던 상공부 조선과장 김철수와 조선공사 사장 이영진에게 설파하고 이를 추진했다. 신태범이 제1차로 계획조선을 따내어 1600G/T의 신양호를 건조하게 되어 고려해운 이학철과 합류했다. 박현규는 2차 계획조선을 따내기 위해 조양상선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으나 고배를 마셨다. 다시 도전하여 3차 계획조선에서 2600G/T의 보리수호를 건조했다. 계획조선으로 선박이 계속 건조되어 우리 해운과 조선이 휴면상태에서 깨어났다.

박현규도 보리수호를 가지고 고려해운에 합류하여 전무로 취임했다. 그는 고려해운에서 능력을 발휘해가며 1973년 7월에는 KCTC를 창립하여 대표이사가 되었다. 한국해운에 대재앙이 서서히 다가오던 1980년 10월에 그는 고려해운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세계해운이 장기불황의 늪으로 빠져들어 1980년에 419까지 치솟던 운임지수가 1982년에는 190으로 급락하면서 세계선박의 14.7%가 계선되었다. 극동/북미의 정상운임이 35$이었는데 12$로 떨어졌고, 때론 한국선박회사들끼리 과당경쟁으로 5$까지 곤두박질치기도 했다. 그 결과 많은 선박회사가 도산되었고 싱가포르에서 7~8척이 압류 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국제해운경기를 예측 못하고 한국해운회사들은 중고선박들을 무모하게 도입하여 막대한 결손을 시현했기 때문이었다. 선박을 처분해도 담보가액의 반에도 미치지 못해 금융권으로 불똥이 튀어갔다.

박현규는 사돈뻘 되는 강경식 재무장관에게 해운의 심각성을 알리고 협조를 구했다. 강경식은 김재익 경제수석과 서석준 부총리께 이 사실을 알리고 대책수립을 건의했다. 서석준은 先해운회사통폐합→後금융지원이란 확고한 정책방향을 제시했다. 해운항만청은 그 정책에 따라 <해운산업합리화>대책을 수립하고서 강력하게 집행하여 한국해운이 기사회생하게 됐다.

해운회사통폐합 와중에서 현대상선은 컨테이너정기선시장에 진입계획을 착착 추진하고 있었다. 현대상선에 면허처분이 되면 고려해운은 공중분해 될 것이 분명했다. 박현규는 강경식 대통령비서실장과 배수진을 쳐놓고, 정연세 해운항만청장은 ‘날아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는 식의 해운정책을 할 수 없다는 논리를 전두환 대통령 면전에서 과단성 있게 보고했다. 그 결과 고려해운은 원양컨테이너정기선 부분의 부채 및 재산을 현대상선에 양도하고 고려해운은 근해컨테이너정기선만을 운항하되, 현대상선으로부터 100억원을 받아내었다. 이로써 고려해운이 해운회사통폐합의 물살에 휩쓸리지 않고 생존하게 되었다.

그 이전에도 고려해운에 위기가 있었다. 함경도 반혁명사건에 연루된 이학수와 항렬이 같은 고려해운 사장 이학철을 형제로 오인하고 기관에서 급습하여 고려해운이 곤경에 빠졌다. 박현규는 사정 팀의 인맥을 통하여 “함경도 사람과 통영 사람이 형제는 무슨 형제냐?”라는 말 한마디에 오해가 풀려 위기를 모면한 에피소드가 있다.
박현규는 해양대학 동창회장을 14년 했고 기성회장도 역임했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 가정에 대한 책임이 강하듯이 해양대학이 천신만고의 대장정을 하던 시대에 1기생으로 졸업했다. 그러기에 모교에 대한 애정과 애착이 강하다. 1956년에 신성모가 학장으로 부임했다. 이시형 학장이 관사를 비워주고 길가에 나앉게 되었다. 그가 앞장서 이시형에게 살집을 마련해 줬다. 손태현과 이준수도 학장을 퇴임하고서 집이 없어 박현규가 그들의 집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손태현, 이준수, 박현규는 모두 해양대학 1기생이다. 두 사람은 학장으로, 한 사람은 동창회장으로 모교에 대한 열정이 ‘누가 더하고 덜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인간유형은 극명하게 구별된다. 손태현은 학문탐구를 위해 자신을 불사르는 강철 같은 학구파, 이준수는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낭만적인 이상주의자, 박현규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해와 협조로 문제를 해결하는 실사구시의 현실주의자이다. 그들의 극명한 인간유형을 예리한 필치로 묘사한다면 베스트셀러가 될 터인데…. 누군가 해 볼만 한 일인데! 

이준수 학장이 해양대학을 조도로 옮겼다. 조도는 국방부와 해군, 그리고 민간인들이 각각 소유하고 있어 해양대학 신축부지로 확정할 때까지 반대와 저항이 극심했다. 이한림이 국방과 문교부장관에게 수차례 간곡하게 협조를 구해 해결되었다. 그리고 학교준공에 맞추어, 건설부의 차년도 예산에 반영키로 하고 조도방파제공사를 조기시행했다.

이한림은 박대통령과 사관학교 동기이자 친구였다. 박대통령의 누님이 이한림 관광공사총재를 찾아와 청탁을 하자 “누님! 정희가 대통령 재임 중에 그런 청탁을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친구를 위한 마음에서였지만 차갑게 거절했다. 또 그전에, 그가 건설장관으로 취임하자마자 현대건설이 그의 매부를 상무로 영입했다. 속내를 알아차린 그는 현대건설에 대해 건설부 출입을 엄금했다. 매부가 해임되어 그의 노모로부터 질타를 당했다. 엄격하다 못해 냉혈이었으나 이한림과 이준수와의 가교역할을 했던 박현규의 요청은 다 받아들였다. 이준수와 박현규가 ‘해양대학이 이 나라 해운과 경제발전의 초석이다’라는 절규에 이한림이 매료되었을까? 아니면 유비가 제갈량의 지혜와 지략을 사기위해 삼고초려를 해서 군신수어지교(君臣水魚之交)를 맺은 그런 관계였을까?

박현규의 행적을 관찰해보면 ‘세상에 독불장군이 없다’는 격언이 연상된다. 세상만사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인연이 얽히고 설켜 이해와 협조, 반목과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그는 평소의 인연을 적절히 활용하여 의논하고 조정하여 불가능한 문제를 풀어가는 지혜를 발휘하고 있다. 그런 방식으로 모교에 대해 봉사와 헌신을 마다하지 않아 많은 공적을 남겼다. 그 공로로 해양대학으로부터 명예경영학박사학위, 모교와 동창회로부터 ‘자랑스러운 해대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산업포장 동탑산업훈장 해운공로탑을 수상했다.

그는 1985년 8월 해사문제연구소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윤상송이 해양대학 학장을 퇴임하고서 설립한 해사문제연구소를 박현규에게 인계했다. 그는 월간 해양한국을 계속 발간하여 지령 30년에 통권 411호에 이르렀다. 해운종합지로서 해운계의 시사(時事)와 현안, 그리고 학술논문 등 다양한 토픽을 취급하고 있어 해운영양제를 공급한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주관하는 콤파스클럽을 통해 해운계에 문제를 제시하고 그 대책을 협의한다. 그 외에도 해운학회 해법학회 등에 직·간접으로 관여하고, 1969년부터 로터리클럽에 입회하여 남서울 로터리클럽의 회장과 국제로터리 3640지구 총재 등을 역임하며 국내외적으로 40여년간 봉사활동을 해왔다.

해방당시부터 해운에 투신했던 신성모, 박옥규,  황부길, 이시형, 남궁련 등 해운광복세대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랜 세월이 흘러갔다. 광복 후에 해운에 종사했던 이맹기, 박건석, 현영원, 이원옥,  김윤석 등 해운 1세대들도 유명을 달리했으나, 박현규가 건재하여 후배들을 다독이고 지혜를 모아 문제를 풀어가는 해운계의 대부 역할을 확실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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