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金鍾吉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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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11월 선주협회 회장단이 부산에서 해운관련기관, 기업, 단체장들을 초청한 만찬. 왼쪽부터 필자(부산해항청장), 고 이맹기 선협회장, 허택 BCTOC 사장, 박종규 선협부회장
허택(許澤)은 지금은 부산으로 편입된 경남 김해군 녹산면 녹산리에서 1932년 3월 3일 허소방과 윤시덕 사이에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마을에 학교가 없어 어린나이에 조선조에 봉화대가 설치됐던 278m의 봉화산을 넘어 초등학교를 힘겹게 다녔다. 그는 1946년 부산에서 자웅을 겨루는 경남중학교와 부산중학교에 응시하여 모두 합격됐으나 경남중학을 선택했다. 이어 경남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고향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모교에 대해 진한 애정과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가 경남고 2학년 때 6·25전쟁이 발발하여, 이듬해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하여 헌병학교 제7기로 수료했다. 그는 헌병하사로 거제포로수용소에서 소장 돗드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 감금되어 나흘 만에 석방되는 사건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가 부산포로수용소에서 야간당직 중에 이승만 대통령이 1953년 6월 18일 0시를 기하여 ‘반공·애국 동포’를 북한으로 보낼 수 없다는 용단을 내려 반공포로를 석방했던 감격도 맛보았다.

그는 6·25전쟁 50주년을 맞아 참전용사동지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부산 어린이대공원에 ‘憲7學兵 1661名 6·25參戰記念碑’ 건립을 주동했다. 그는 역사의 한 모퉁이에서 나라를 위해 자신을 불사르는 애국충정을 체험했다. 그는 도전적이고 과단성이 있는가하면, 경남고 1학년 때 문예반 활동에서 발표한 자작시 ‘풀피리’는 그의 목가적인 정서를 엿볼 수 있다.

<고양이 양지쪽에서 하품한 봄날/ 들에 나가 놀다가 풀피리 만들었네/
흙냄새 나는 논두렁에/ 하늘 안고 누었네/ 꽃바람이 불었네/ 나비가 날았네/
풀피리 불었네/ 노을이 짙어가네/ 때가는 줄 잊고서 풀피리 불었네>
그는 3년간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하여 경남고를 졸업하고서 부산대학 법과에 입학했다. 부산법대를 졸업하고 1959년 5월 8일에 부산해무청 촉탁으로 임명되어 행정을 보조하면서 장면 민주당정권에서 시행한 국토건설요원시험에 합격했다. 5·16혁명 직후인 1961년 5월 31일 서기로 임명되면서부터 관리, 항로, 항무, 선원, 선박 등 해운행정을 두루 경험하며 경력을 착실히 쌓아갔다.

허택은 1980년 7월에 포항해운항만청장에 취임했다. 필자가 “처음으로 기관장이 되었으니 의욕이 넘쳤겠네요”라고 묻자 그는 “부두순시를 하려는데 포항제철 정문에서 차를 세워놓고 검문검색을 해요. 항만관리 책임자가 국가부두를 항만순시하려는데…. 주객이 완전히 전도되었지요. 포항제철 박태준 회장의 위세에 눌려 포항 사람들이 온통 눈치만 보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포철이 오·폐수를 여과 없이 바다로 쏟아내고 있었어요. 몇 차례 시정조치를 요청했으나 묵묵부답이었고…. 묵과할 수 없어 박태준을 해양오염방지법 위반으로 고발했지요. 포항지역이 왈칵 뒤집혀질 수밖에…. 박태준의 질책이 두려워 임직원들이 온갖 인맥을 동원하여 협박과 회유를 하였으나 꿈쩍도 않고 버텼지요. 그랬더니 안하무인의 포철의 태도가 확연히 변화됐어요”라고 말하는데서 그의 배포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이어 “경북지역에서 소비하는 양곡을 포항항을 제쳐놓고 울산항이나 마산항에서 하역하여 트럭으로 운송해 왔어요. 막대한 운송비와 시간을 낭비해 가면서…. 이유는 포항항에서 양곡하역을 하면 분진으로 인해 포철제품에 결함이 생기기 때문이었지요. 또 선석을 빼앗겨 포철에 체선, 체화가 발생함으로 양곡선박을 못 들어오게 했지요. 그냥 두고만 있을 수 없어 2만톤급과 700톤급의 선석 2개를 확보하고 분진을 방지할 수 있는 소형 싸이로를 설치했지요. 당해 연도에 포항항에서 양곡하역이 30만톤에 이르러 막대한 물류비를 감축했지요. 조달청장과 경북지사로부터 감사패를 받았고, 국가부두를 마치 사유부두로 오인하는 포철에 국가부두의 관리주체가 누구인가를 가르쳐 주었지요”라고 투박한 경상도 억양으로 말했다.

허택은 1903년(고종 7년)에 건립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호미곶등대가 건축사적 문화사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여 줄 것을 경북지사에게 건의했다. 경북지사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영일군수에게 부지와 예산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전국의 등대가 보관하고 있는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여 등대박물관을 만들었다. 등대박물관에 관광객들이 모여들어 지금은 지방명소가 됐다.

그는 1984년 6월 마산해운항만청장으로 부임했다. 마산청 관할에 있는 통영에는 한려해상공원에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들어 유람선을 이용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유람선들이 규정과 규격 미달이라 해난사고가 빈발했다.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검찰과 경찰의 협조를 얻어 선원안전교육과 선박검사를 강력하게 지속적으로 실시했다. 그 결과 선원의 안전의식이 제고되고 선박의 안전설비가 갖추어져 해난사고를 예방했다. 그리고 부산항으로 들어가는 가득도 부근해역은 여객선과 화물선, 그리고 군함 등 각종 선박의 통행이 밀집하여 충돌사고가 빈발했다. 그는 부산항만청과 해군당국과 협조하여 등부표를 설치했다. 등부표를 중심으로 선박의 통항을 좌우로 분리하여 충돌사고를 예방했다. 해운행정의 요체가 해상에서의 인명과 재산의 안전임을 그는 오랜 경험을 통해 체득했기 때문에 이를 실천했다.

허택은 1987년 7월 9일에 부산해운항만청장으로 발령받았다. 대학을 막 졸업하고서 1959년에 임시직인 촉탁으로 부산청에 첫발을 디뎌놓은 후 28년 만에 부산해운항만청 수장으로 금의환향했으니 감격이 남달랐으리라! 그러나 감격은 잠시뿐이었고 시련이 닥쳐왔다. 대만 근해에서 원목선이 침몰하여 많은 선원들이 사망했다. 선원노조와 가족들이 선박회사와 협의를 하다가 요구조건이 충족되지 않자 부산항만청으로 몰려와 청장실에 난입했다. 강석길 비서가 이를 막다가 다리가 부러졌고 허택도 멱살을 잡히는 치욕을 당했다. 그들은 청사를 점거하고서 복도에서 숙식을 하며 꽹가리를 치고 공무방해를 했다. 6월 항쟁을 거쳐 노태우 정권에 들어오면서 걷잡을 수 없는 민주화의 요구가 폭력으로 치닫고 있을 때였다.

지금은 고인이 된 안상영 부산시장이 영도 앞바다에 인공섬 건설계획을 착수했다. 그곳은 부두하역작업 전후에 선박들이 묘박하는 해역이었다. 자동차로 말하면 주차장이었다. 인공섬을 만들면 선박들이 거제도나 진해만에서 묘박을 해야 함으로 항비와 시간 등 경제적 손실이 막대하고 부산항의 입지에도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는 각 기관과 언론, 지역유지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고, LA시장이 부산을 방문한 만찬자리에서 안상영과 격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건설부의 장기매립계획과 해운항만청의 부산항광역개발계획, 그리고 부산시의 도시계획에도 인공섬 건설계획이 반영되기까지 했다. 허택은 김영환 신임 부산시장에게도 인공섬 건설의 심각함을 알렸다. 김영환은 예산을 이유로 자신의 임기 내에 건설을 착수하지 않을 것을 천명했다. 그 뒤 인공섬 건설은 무산되고 말았다.

신선대컨테이너부두를 건설하려면 신선대산을 절개하여 매립을 해야 했다. 그런데 신선대가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어 부산문화재관리위원회가 이를 반대했다. 허택이 강태홍 부산시장에게 간곡하게 부탁하여 강태홍이 문화재관리위원들을 설득해서 신선대산 절개를 하게 되어 신선대부두 건설이 순조롭게 진행, 부산항의 심각한 체선, 체화가 해결되었다. 

허택은 31년간의 공무원 생활을 마감하고 1990년 3월에 부산컨테이너부두운영공사(BCTOC) 사장으로 갔다. 그는 BCTOC의 컨테이너 1000만teu 실적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행사를 개최했다. 그리고 그는 부산항과 뉴욕항과의 자매항만계약을 체결하여 부산항의 위상을 높였다. 또한 앉아서 항만이용자를 맞이하지 않고 외국의 선박회사를 찾아가, 초청해서 항만시설과 서비스를 파는 포트세일즈를 몸소 시행했다.
필자가 오랜 기간 고향에서 근무한 소회를 묻자 그는 “BCTOC 근무를 합해 통산 36년간 해운항만행정을 하면서 묵호·마산·포항·인천 등에서 잠시 잠시 근무를 했으나 대부분 부산에서 근무했지”라고 말하며 “부산에서 태어나 공직생활을 하며 일생을 보냈다는 것이 행운이고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산항에 버려진 돌 한 조각도 무심케 보지 않았던 부산항의 지킴이었다고 자부합니다”라고 부산항에 대한 진한 애착과 애정을 털어놓았다.

*협찬: 창명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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