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논설위원 耕海 金鍾吉

▲ 2001년 소청도 등대에서 백원경.
백원경(白元敬)은 1961년 12월 6일 인천항 팔미도등대에서 태어났다. 등대장 백봉규와 부인 김윤화 사이에 1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그는 처음부터 숙명적으로 등대인생 이었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이어 3대째 등대를 지키고 있다. 촛불이 자신을 태워 어두움을 밝히듯이 등대도 자신을 태워 뱃길을 밝힌다. 등대지기 역시 뱃길을 밝혀주기 위하여 자신을 불사르는 희생과 봉사의 삶이다. 그것도 당대에 끝나지 않고 3대를 이어왔다. “나 여기 있소!”하고 하늘을 향해 외쳐도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참으로 갸륵하게 위업을 이어왔다.

그의 할아버지 백도수는 일제시대에 등대지기를 시작했다. 등대가 있는 섬들에는 변변한 학교나 의료시설이 없었다. 그는 한학(漢學)에 박식하여 발령받아가는 섬마다 배움에 소외된 어린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한의학에도 조예가 있어 등대에는 환자들의 발길이 끝이지 않았다. 그는 당시 카메라를 어깨에 걸치고 다니며 사진을 찍을 정도로 하이컬러이었다. 8·15해방 때는 소청도 등대에서 일본인들과 함께 근무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중요한 등대부품을 해체해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등탑마저 허물고 돌아가려는 그들의 잔악한 행위를 말렸다.

6󈽕때 어느 날 낯모르는 사람이 은밀히 찾아와 백도수에게 팔미도등대에 불을 켜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외지 사람들이 들어와서 등명기와 부속품을 떼어가서 등댓불을 켤 수가 없었다. 백도수는 그의 두 아들과 함께 3부자가 교대로 이틀 동안 횃불을 휘돌려 미주리함대의 인천상륙작전을 도왔다. 그 후에 국군이 찾아와 누가 횃불을 올렸냐고 조사했다. 인민군과 내통한 것으로 오해하고 빨갱이로 몰아 백도수가 곤욕을 치렀다. 등댓불을 켜달라고 부탁한 낯모르는 그 사람은 누구이었을까? 미군 첩보원이 틀림없다. 미군이 국군도 모르게 인천상륙작전을 사전에 면밀하게 계획했다는 증거였다.

백도수의 아들 백봉규는 6·25전부터 인천표지관리소에 근무하다가 그의 아버지와 함께 횃불로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을 도왔다. 그 후 그는 소청도, 팔미도, 부도, 목덕도 등 서해의 여러 등대에서 근무했다. 백봉규는 1976년 5󈽌민족상 사회부분상을 수상했다. 인천상륙작전을 도와 풍전등화의 대한민국이 자유민주국가로 회복하는데 일익을 담당했고, 고되고 청빈한 등대지기의 본분을 다한 공로가 인정되어 5󈽌민족상을 수상했다.

백봉규는 부상(副賞)으로 받은 상금을 인천로터리클럽에 장학금으로 기탁했다. 인천로터리클럽은『백봉규장학금』으로 어려운 고등학생과 대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평생 외딴 섬에서 등대지기의 고된 업무에다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5󈽌민족상 상금을 미련 없이 쾌척했다. 누구나 그 갸륵한 정신에 머리를 숙일 뿐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부인 김윤화도 가톨릭신자로서 고단한 살림살이에도 푼돈을 모아 어려운 이웃을 도왔다.

인천로터리클럽 회장과 국제로터리 제369지구 총재를 역임한 윤영원은 다시 상당한 금액을 재출현하여, 자신의『청호장학금』과 다른『송은장학금』과『백봉규장학금』등 세 개를『靑白松獎學金』으로 통합하여 현재도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필자가 1985년 연말에 인천해운항만청으로 발령받아 병상에 있는 백봉규를 방문했다. 그는 “청장님! 아들 원경이가 전문대학을 다닙니다. 조부부터 해온 등대지기를 했으면 하는데 경원이가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좀 설득을 해 주세요”라고 부탁했다. 백봉규와 첫 대면이었지만 그의 숭고한 삶과 진지한 부탁을 흘러버릴 수 없었다. 백원경을 불러 등대원을 권유했으나 싫다는 대답이었다. 어린나이에 부모와 헤어져 등대자녀 합숙소에서 외롭게 지낸 것이 마음에 상처가 되어 거부했다. 필자는 “자신을 불태워 바닷길을 안내하는 등대지기의 삶은 생명의 길이고…. 어두운 세상을 밝혀주는 숭고한 삶이다. 더욱이 조부로부터 3대를 이어 등대원이 된다면 얼마나 자랑스럽겠냐?”고 설득했다. 세상모르는 젊고도 젊은이에게 무거운 멍에를 지우는 것이 죄스러웠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백원경은 1986년 3월 8일에 등대수 10등급으로 임용되어 안도등대에서 등대지기의 첫 발을 내디뎠다. 처음 몇 년간은 갈등과 회의로 마음고생이 많았으나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는 일제와 전쟁 때 더 많은 고된 삶에서도 묵묵히 봉사와 희생을 하셨겠지’라고 생각하며 멍에를 벗지 않고 참고 견뎌왔다. 그는 안도등대에서 시작하여 선미도등대와 평택 충전실에서 근무했다. 그는 고달픈 등대생활에서 신병을 얻어 휴직도 해봤다. 1994년 2월에 7등급으로 승급되어 선미도와 소청도에서 등대장을 하는 등 벌써 20년이 지났다.

그는 “오직 바닷길을 밝혀 준다는 사명감으로 묵묵히 일해 온 저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라고 말하며 이어 “허지만 저가 밝혀준 등댓불로 인해 수많은 뱃사람들이 사고 없이 항해를 했으리라 생각하면 뿌듯합니다.”라고 말하는데서 그의 강한 의지와 사명감이 옆보였다.

그는 선대들의 DNA를 이어받았음인지 소청도등대에서 근무할 때는 허물어져가는 노인들의 집을 수리해주었고, 보일러나 가전제품도 고쳐주는 등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이 답례로 주는 고구마나 생선을 정성이 담긴 선물로 생각하고 기꺼이 받았다. 그리고 평택해운항만청에 근무하면서 봉사동아리에 가입하여 독거노인이나 양로원을 방문하여 노인들을 도왔고 적은 금액이지만 정기적으로 후원금을 보내고 있다.

백원경은 2003년 7월에 평택해양수산청이 개청되면서부터 항로표지관리실(충전실)에 근무해오고 있다. 자동차운반선과 국제여객선의 입출항이 빈번한 평택항과 당진항이 서해의 중심항으로 부상하면서 항로표지시설이 확충되었다. 무인등대 17기와 등부표 36기를 포함하여 총 72기의 항로표지를 관리운영하고 있다. 2005년에는 최첨단 IT기술을 이용한 항로표지집약 관리시스템을 구축하여 항로표지기능의 신뢰도를 크게 향상시켰다. 국제항로표지기구(IALA)의 권고기준을 97%나 충족하여 안전한 선박운항과 쾌적한 해양환경을 유지하고 있다.

항로표지의 유지관리에 필요한 장비와 비품이 400여종이나 된다. 기존의 관리실에는 수많은 장비와 비품들이 무질서하게 늘려있어 긴급할 때 무엇을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백원경은 82평의 관리실 내부를 모범적인 민간기업 이상으로 말끔하게 정리했다. 비품 진열장을 독자적으로 설계하여 각종 소등사고 때나 긴급출동 때 누구나 손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기능별로 특성별로 분리하여 정리 했다. 그는 기기와 비품의 점검표를 작성하고 취급주의사항을 기재하여 축전지 등 위험물에 의한 안전사고를 예방케 했다. 그리고 고장이 난 기계를 공구대에서 자체수리를 할 수 있도록 하여 내구연한을 연장시키고 예산을 절감했다. 이를 벤치마킹하기 위해서 전국 해양수산청에서 자료요구를 하거나 직접 와서 체험학습을 하고 있다.

그는 “육지근무는 각종 수당이 등대근무에 비해 30~40%나 적어 생계에 어려움이 있지만, 연만한 홀어머니와 자식을 생각해서 육지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섬에서 근무하는 동료들에게는 미안하지만”라고 말하는데서 훌륭한 선대를 욕되지 않으려는 충정과 효심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어릴 때 등대합숙소에서 겪었던 외로움과 고통을 자식에게는 넘겨주고 싶지 않은 자식사랑이 대단했다.

그는 14년간이나 7등급을 달고 있으나 자리가 없어 진급을 못하고 있다. 공무원은 돈보다 한 등급씩 승진하는 맛으로 앞뒤보지 않고 달려간다. 14년간 승진을 못하면 후배들에게 짐짝처럼 보이지 않나하는 자괴감과 자신의 무능과 무력을 자학하게 된다. 등대지기는 광학‧ 음향학‧ 수학‧ 물리학‧ 해상기상학 등에 관한 소양과 지식이 필요한 전문직이다. 그럼에도 단순노무직처럼 기능직으로 직무분류를 해 놓아 스스로 발전할 동력을 상실했다. 네덜란드처럼 수준 높은 전문직으로 전환시켜만 미래에 항로표지가 발전될 것이다.

◇취재지원 : 창명해운㈜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