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논설위원 耕海 金鍾吉

 

▲ 오른족 두번째 김영환 부산시장, 하나건너서 김부웅, 안상영 해양청장, 김광일 국회의원, 필자(부산해양청장).
김부웅(金富雄)은 1935년 6월 29일 경북 영일군 오천면 일월동에서 김문로와 정선이 사이에 4남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여덟 살에 아버지를 여이고 홀어머니를 도와 땔감나무를 했고 꼴을 베어 소를 먹이고 외양간을 치웠다. 어머니는 보리밭을 매며 “보릿고개를 넘기자면 보리가 잘 되어야 풋보리를 찧어 개떡이라도 해먹을 수 있을 터인데”하며 한숨을 짓는 어머니가 가여워서 그는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고 한다.

  그는 오천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포항수산중학교에 합격하였으나 입학금과 책값을 걱정해야 했다. “농사를 짓다가 형편이 좀 나아지면 그때 야간 중학교를 가면 어떠냐?”고 묻는 어머니에게 “하숙을 하지 않고 통학을 하며 농사일을 돕겠습니다.”라고 어머니를 설득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논에 거름을 한 짐 나르고 12km를 걸어 학교를 다녔다. 간신히 포항수산고등학교까지 졸업했으나 대학진학을 접어야했다. 해군에 지원하여 1958년 3월에 해군통신학교 무선통신과 6개월을 수료하고 무선사하사관으로 장기복무를 했다.

  김부웅은 함정과 해군본부에 근무하다가 헌병사령부로 파견되었다. 당시  원용덕 헌병사령관은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한 정보와 수사를 한 손에 털어지고 국가권력을 행사하며, 이승만 독재정권을 받혀주는 친위대였다. 그는 사령부 조사과에 근무하면서 서울도심에서 민심과 선거동향을 파악해서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는 부산으로 옮겨 군부대와 사회단체에 대한 사찰을 했다.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반정부데모가 전국으로 확산되며 마산과 부산에서는 고등학교 학생들까지 데모에 참가하여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도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이 주말이면 부산에 내려와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과 낚시를 했다. 김부웅은 헌병사령부 부산분실의 쾌속정에서 낚시를 하는 그들을 경호했다. 그는 국가안위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육군의 수장이 한가히 낚시를 한다는 것은 군부가 이승만정권의 퇴진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때의 그의 예리한 정치적 감각이 후일 노동운동하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노동운동도 정치행위이니까.

  4·19 혁명 후 국무회의에서 헌병사령부해체를 결의했다. 김부웅은 원대복귀 하여 소해정 통신장으로 근무하가가 해군통신학교에서 전파관리법과 무선공학을 가르쳤다. 그는 2급 통신사자격증을 가지고 해운공사 입사시험에 응시했다. 그러나 현역군인은 응시자격이 없다고 퇴짜를 맞았다.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이맹기 해운공사 사장에게 ‘현역군인에게 국영기업의 응시자격마저 박탈한다면, 국가에 충성하는 군인에게 지나친 냉대이며 군인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라고 편지를 썼다. 이로 인해 그는 특별채용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1967년 3일 1일 대한해운공사 부산지점 통신감독실에 신입사원으로 발령되었다가 그해 11월에 서해호 통신장으로 승선했다. 선령 25년의 폐선직전의 선박으로 최고속력 7노트의 석탄증기선이었다. 미국 서해안 3개월과 동해안 4개월이 소요되는 1차 항해를 떠났다. 태평양을 건너 LA를 경유하여 파나마운하를 향해 항해 중, 정오위치 보고를 타전하기 위해 송신기에 스위치를 넣는 순간 ‘펑’하는 소리와 함께 송신기가 꺼져버렸다. 쥐 한 마리가 송신기에 들어갔다가 고압전류에 감전되어 피가 튀겨 뒤죽박죽이 되었고 코일은 타버렸다.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되었다. 위급한 사고가 발생해도 S.O.S 타전도 못하게 되었다. 그는 부속품도 없는 상황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온갖 지혜와 기술을 동원하여 응급조치를 했다. 발신이 되자 “브라보”라고 목청 끝 외쳤다. 파나마 외항에서 수리를 의뢰했으나 오래된 송신기라 부품이 단절되어 수리가 되지 않았다.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조심 부산에 귀항했다.

  가족과 멀리 헤어진 고독감, 숨 막히는 좁은 공간, 매일 반복되는 통신당직, 죽음과 조우하는 황천항해의 공포와 뱃멀미, 뱃놈이란 사회적 천대 등을 뼈저리게 맛보고 해운공사를 떠났다. 그는 1970년 12월에 송출선원으로 일본 산고기선에 승선하다가 2년 8개월 만에 귀국했다. 그는 송출기간에 전일본해원노동조합의 4개월간의 파업을 목격했고, 편의치적선의 선원들을 노예선원이라고 공격하는 ITF(국제운수노동연맹)의 캠페인을 보았다. 그리고 미국 부두노동자파업 때 LA에서 우리나라 선원들이 공원에 모여 한국해원노조  집행부규탄대회에 동참하면서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김부웅은 귀국하여 해기사협회 상무 이헌탁과 신한해운 김태규와 함께 해원노동조합의 부정과 비리를 폭로하고 부산검찰청에 조합비 횡령과 유용, 선주로부터 뇌물수수 등을 고발하여 장을용 위원장이 구속되었다. 1974년 10월 16일 정기대의원대회가 개최되어 위원장 홍건표, 부위원장 김태규가 선출되고 김부웅은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기획관리실장을 맡아 예산지출은 물론 위원장의 판공비까지 관리 통제하는 막강한 실권을 행사했다.
 
  그는 1977년에는 대만 중화해원총공회를 방문하여 ITF정책에 대해 한국과 대만이 공동대처하기로 합의했고, 아일랜드에서 개최된 ITF총회에 참가하여 극동아시아 노조의 단합을 이끌어내는 등 노동외교를 했다. 한국선원송출과 ITF정책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ITF의 편의치적선정책과 선원해외취업』이란 논문을 노동조합해원노보에 발표해 그의 입지를 높였다. 그는 노조활동을 방해하고 협박하는 권력에 항거하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검찰에 송치되기도 했으나 기소유예처분으로 풀려났다.

  그는 1978년 4월 다시 바다로 돌아갔다. 10·26 대통령시해사건이 발생하고서 1980년 3월에 귀국하여 사태를 주시하다가 휴가차 귀국한 선원 등 40명을 규합하여 상경했다. 서울에 거주하는 20명과 합류하여 60명이 1980년 5월 16일 한국노총 사무총장실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해원노조위원장 홍건표가 노총사무총장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건표가 해원노조위원장과 노총사무총장을 사임함으로써 투쟁이 끝났다.  

  김부웅은 1981년 해외취업노동조합 결성을 착수했다. Eastern Shipping, Japan Line, Lasco Shipping과 30여개 군소 선원송출회사에 소속된 대의원 120명에 의해 김부웅이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송출선원과 그 가족들의 권인보호를 위해 혼신의 열정을 쏟았다. 가족상담실 운영, 주부대학의 개설, 장학회설립, 김포공항 선원안내센터 설치, 소비조합설립과 공동구판장운영 등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서 송출선원의 복지를 위해 진력했다. 그리고 가족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부인들의 솜씨자랑 전시회와 자녀 백일장 및 사생대회 등도 개최하였다. 의료보험에서 해외취업선원이 제외되어 1만 3천여 명과 그 가족 5만여 명이 의료보험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해외취업선원 의료보험조합설립 인가시청을 부산시를 경유 보사부에 제출했으나 3차나 반려되었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인맥을 총동원하며 집요하게 밀어붙여 1984년 1월 10일 보건사회부의 인가를 받아냈다. 송출선원과 그 가족에 대한 열정과 업적이 인정되어 그는 2대 위원장으로 재선되었다.

  김부웅은 6년간의 해외취업노동조합 위원장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1987년 2월 3일에 전국해원노동조합연맹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선원의 안전‧ 복지‧ 취업이 국제적 기준과 통제로 발전되어가는 추세를 감안해서 ITF와 ILO을 통한 국제노동외교를 활발하게 전개했다. 그는 닥쳐올 환태평양시대에 걸맞은 선원복지회관 건립을 일생일대의 모험으로 추진했다. 인천국제선원 호텔 매각대금을 시드머니로 하고, 정부와 부산시 그리고 ITF의 재정지원을 받아내기 위해 분골쇄신했다. 지하 3층 지상 19층의 연건평 6천평의『부산마린센터』건립을 정기대의원대회에서 의결되었다. 불가능으로 여겼던 사업을 갖가지 지략과 전략을 동원하여 천신만고 끝에 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우람찬『부산마린센터』가 1991년 10월 30일 준공이 되었다.

  1990년 12월 13일 노태우 대통령의 소련방문 때 그는 노동계대표로 수행했다.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몰락해가는 것을 목격하고서, 우리나라는 노사가 산업평화를 이루어 복지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재선(再選)의 연맹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새마을운동본부장의『숨은봉사자상』과 정부로부터『대통령표창』『금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도전과 투쟁, 쟁취의 인생을 살아오셨는데 그 저력이 어디에 있었습니까?”라고 필자가 묻자, 김부웅은 “가난한 집에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고생을 했기 때문에 선원들의 한숨과 눈물어린 애환이 저 자신의 아픔으로 닦아왔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동반자인 저의 아내가 쪽방에서 생활고로 결핵까지 앓으면서도 저를 끝까지 이해와 협력을 해 준 것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데서 냉철하기만한 그에게서 부인을 사랑하는 따사함이 돋보였다.

◇취재지원 : 창명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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