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논설위원 耕海 金鍾吉

▲ 백용흠 해운공사 전무, OOCL의 Mr.C.H.Tung, 백웅기 해운공사 동경지점장(왼쪽부터)-1971~1976간 백웅기가 해운공사 동경지점장 근무시
백웅기(白雄基)는 1932년 5월 21일 전북 고창군 고수면 초내리에서 백남영과 홍삼차 사이에서 2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고창욱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해방되던 1945년에 고창중학교(6年制)에 입학했다. 고창중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장교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웠다. 그리고 서울대 문리대 언어학과를 나와 영어교사를 하던 그의 누님도 영어를 가르쳐주며 미국 고등학교 교과서를 열여섯 권이나 가져다주었다. 미적분까지 영어로 공부하였으니 고등학교 때 영어원서강독을 한 셈이었다.

그가 중학교 6학년 때 6·25전쟁이 발발하여, 이 땅은 동족상잔으로 피바다가 되었다. 전남에 4만2천여 명과 전북에 5천3백여 명이, 그 중 고창에서만 2천4백여 명이 좌익에 의해 학살됐다. 고창여자중학교 교장이었던 그의 선친도 학살됐다. 아버지의 비명횡사로 집안에 그늘이 드리워져, 그는 국비학교를 찾아 1951년에 해양대학 항해과 7기로 입학했다.

대학생활도 평탄치 못했다. 당시 군산에 있던 해양대학이 폭격으로 교사가 전파됐다. 기숙사 건물을 개조하여 2층은 기숙사로, 1층은 교실로 사용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고서 학교가 부산 거제리로 이사했다. 천막교사에서 한 학기를 보내고 승선실습을 나갔다 돌아와 1955년에 졸업했다. 기념사진 한 장 찍지 않은 초라한 졸업식을 하고서 곧바로 해군에 입대했다. 그는 대학의 낭만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처참한 전쟁‧ 폭격으로 학교를 잃는 공포‧ 굶주린 피난살이‧ 천막교사의 좌절감‧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등. 고통과 고뇌와 절망의 터널을 대학의 낭만으로 대신했다. 이 땅에서 비극의 삶을 살았던 대학생들이 어찌 백운기 뿐이었으랴!

그는 해군 복무를 긍정적으로 받아드렸다. 적은 급여이지만 만족했다. 사회초년생으로 해군장교에게 부여된 임무가 무엇인지, 어떤 처신을 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그가 미7함대에 소속된 수송선을 타고 일본 요코스카에 입항하며, 정문을 통과할 때면 미군헌병들의 장교에게 깍듯한 예우를 흐뭇해했다. 미국이 원조한 낡은 경비정을 타고서 동‧서‧남해를 경비할 때 파도가 삼킬 듯 한 위험에서도 국가안보를 생각했다. 백령도와 연평도, 제주도와 울릉도에 기항하여 가난하게 살아가는 섬사람들을 살펴보며 많은 것을 생각했다.

낡은 경비함이지만 승선실습 때 만져보지도 못한 전자항해 장비를 조작하는 재미를 만끽했다. 중학교 때 라디오를 분해하고 조립했던 실력으로 해군공창에서도 수리를 못한 Radar를 수리했다. 손도 대보지 못한 Loran도 흥미롭게 조정해 보았다. 함대에서 교육을 차출할 때는 동료들의 차출을 대신했다. 때론 기관장교들이 받는 냉동기와 내연기관 교육까지 대신했다. 이처럼  열심히 공부하여 후일 해양대학 연습선 선장하면서 Radar를 수리하고 전파항법을 가르쳤다.  

―힘이 없어 국권을 빼앗긴 나라에 태어나 남이 가져다 준 광복을 맞이했으나 민족분열로 인한 동족상잔의 피비린내를 그는 몸소 마셨다. 그러나 시대와 운명에 거슬리지 않고 굳건하게 살아왔다.―  

그는 40개월의 국방의무를 마치고, 1959년에 4년 후배들의 틈에 끼여 해운공사에 입사했다. 남궁련이 해운공사와 극동해운의 사장을 겸임하고 있어 극동해운의 신라호에도 승선했다. 1964년에 Worldwide Shipping으로 해외송출을 나가 World Tatsu의 2항사로 승선했다. 선장은 영국인, 기관장은 덴마크인, 1항사는 영국면허를 가진 중국인, 1기사는 스웨덴인, 통신사는 인도인이었다. 부원들은 모두 중공의 관동성과 복건성 출신이라 처음에는 경계했으나 차차 친숙해졌다. 피부색갈이 각양각색인 인종시장이었다.

백웅기는 1965년 말에 귀국했다. 손태현 학장과 김주년 교수가 학구적 그를 해양대학 연습선 반도호 선장으로 임명했다. 상선대학 출신이 모교의 연습선 선장을 역임했다는 것은 분명 자랑이고 영예이다. 그는 자리를 옮겨 미국해군 MSTS 부산기지사령부의 선박검사관으로 임명되었다. 월남전이 한참이던 1960년대 후반에 열 몇 척의 LST와 화물선에 한국선원들이 승선했다. 그로 인해 부산의 조선공사와 대선조선에서의 정비와 수리를 감독했다. 그는 미국선급 ABS의 룰을 적용하여 선박검사를 꼼꼼히 하느라 휴일도 없었다.

그는 1969년 8월 Eastern Shipping으로 송출을 다시나갔다. 원목선 Easter Beauty호를 조선소에서 인수해서 뉴질랜드 항로를 1년간 6항차를 취항했다. 항로가 생소했지만 뉴질랜드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이상적인 사회제도에 매료되었다. 그는 이스턴 쉽핑에서 2년간 승선근무를 하가가 1971년 귀국했다.

백웅기는 해군제대 후 신입사원으로 입사하였던 때부터 11년 후에 해운공사에 재차 입사했다. 해운공사는 1968년 11월에 민영화되어 한양대학 계열로 넘어가 완전 딴 체제였다. 그는 본사 기획실 근무를 하다가 동경지점장으로 발령받았다. 동경근무 4년은 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보람차고 화려했다. 뉴욕 정기선의 운항과 집하 등이 전반적으로 일본에서 이루어졌고, POSCO의 가동에 맞추어 일본의 선박회사와 종합상사와 협력하여 광석선을 도입하고 용선업무도 처리했다.

그는 또 일본에서 해운공사의 컨테이너영업에 대한 준비를 본격적으로 했다. 첫째 OOCL Line과의 Space Chart를 제휴했고, 둘째 일본 Kawasaki Line의 협조를 얻어내어 컨테이너운항 실무요원에 대한 위탁교육을 실시했다. 그리고 이토쭈 상사와 컨소씨엄으로 산물선 여러 척도 도입했다. 그리스 선주가 현대조선에 발주하였으나 제1차 오일쇼크로 인수를 거부했던 VLCC의 인수방안을 검토했으나 성사되지는 못했다. 그 VLCC를 모체로 아세아상선을 설립했고 그것이 오늘날의 현대상선이 되었다.

백웅기는 1976년 10월에 해운공사를 떠나 Eastern Shipping으로 다시 돌아가 미국항로에 자동차 전용선의 선장으로 승선하였고, 중동항로의 LPG선과 원유선의 선장을 하다가 유공해운으로 갔다. 선경그룹이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하고 유공해운을 1982년 6월 29일 설립했다. 그는 유공해운 설립에 참여하여 온갖 장애물을 헤치고 기초를 튼튼하게 다졌다. 해운공사 동경지점장과 중동항로의 유조선선장 경험을 백분 활용하여 난해한 문제들을 풀어갔다. 해운회사 경영경험이 없던 최종현 그룹회장과 손길승 유공해운사장이 그를 전적으로 신뢰해주었다. 그들이 믿고 맡기는데 화답하여 그가 소신껏 일했던 것을 더없는 보람이었다고 말했다.

해운공사 동경지점장 때의 경험과 인연으로 CITOH상사와 협력하여 노르웨이에서 VLCC 2척을 컨소시움으로 도입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선원채용은 동지상선 서병기 사장의 협조로 해결했다. 그가 선원들을 인솔하고 두바이로 가서 선박인수 절차를 마치고 Ras Tanura항에서 원유를 선적함으로써 유공해운이 닻을 올렸다. VLCC 2척의 운항은 순조로웠으나 선원의 사기와 복지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는 선원가족 상담실을 부산에 설치하고 선장부인을 실장으로 임명했다. 가족 상담실을 지원해서 봄과 가을 두 차례 호텔을 빌려 ‘선원가족모임의 밤’을 가졌다. 사장이하 전 임원이 자리를 함께 하여 기탄없는 대화를 하면서 침목을 도모했다.

급여가불을 선원가족들이 희망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회사가 1억 원의 기금을 출자하여 신용협동조합을 조직하였다. 선원들의 적극적 호응과 노사 간의 확고한 신뢰가 조성되어 기금이 수억으로 성장되었던 것을 지금도 흐뭇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1983년 PC Set를 구입하여 복잡한 선원급여를 계산하는 프로그램개발에 손수 도전하여 2개월 넘게 고전했으나 다행히 완성해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백웅기는 MSTS의 선박검사, 해운공사 동경지점장, Eastern Shipping의 중동항로 원유선승선 등 다양한 경험을 총동원하여 유공해운을 궤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유공해운에서 계열회사인 경진해운을 포함하여 유류유출사고 한 번 없이 11년간을 근무하고 해운인생을 마감했다.

“상선대학을 나와서 해군함상근무와 국책해운공사에서 승선, 해외송출선원과 민영해운공사 경영, 그리고 개인회사 유공해운의 설립과 경영 등 해운을 두루 경험했습니다. 또한 Common Carrier와 Industrial Carrier까지 모두를  섭렵한 해운인이 선배님을 제처 놓고 또 있습니까? 라는 필자의 질문에 그는 “선배와 동료들, 그리고 함께 승선했던 선원들의 협조덕택으로 생각하며 지금도 그분들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취재지원 : 창명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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