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논설위원 耕海 金鍾吉

▲ 1985년 3월 13일, 해운진흥촉진대회에서 이범준 국회의원, 손수익 교통장관, 수상을 한 선원부인들, 정연세 청장, 박건석 선주협회장, 필자(오른쪽 부터)
정연세(鄭然世)는 1934년 9월 19일 서울 종로구 와룡동에서 정원화와 신후이 사이에 2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1947년 4월에 경기중학교에 입학하여 1953년 3월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공과대학 토목공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1957년 3월에 서울대 토목과를 졸업하고 곧바로 해무청 시설국 항만과에 사회첫발은 내딛었다. 대학 전공과목의 정통코스라 할 수 있는 항만과 근무가 그에게는 일생의 행운이었다. 그는 1962년부터 태백국토건설국에 근무하면서 묵호 주문진 임원 등 동해안 항만건설현장을 6년간 누볐다. 건설현장에서의 경험과 감각은 그가 후일 항만건설 행정과 정책을 펴는데 밑그림이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5개월간의 항만공학 연수는 선진국의 항만건설현황과 동향을 파악하는 기회가 되었다.

정연세는 1968년 2월에 건설부 항만시설국 항만계획과로 발령받아 서울에 입성했다. 당시 항만시설국에는 한양공대 토목과 출신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경기고와 서울공대를 나온 그는 엘리트이었지만 비주류였다. 그러나 그는 항만계획담당관의 보직을 받고서 활기차게 항만정책을 수립할 수 있었다.

1969년 2월에 이한림이 건설장관으로 부임은 그에게 또 하나의 행운이었다. 직원들이 진시황제라고 부르며 호랑이처럼 무서워하였던 냉엄한 이한림이 정연세를 옆에 가까이 두었다. 그래서 그는 마음 놓고 항만개발을 역동적으로 추진했다. 미국에서 부산항 IBRD차관교섭과 일본에서 북평항건설을 위한 한‧일 각료회담 실무교섭, 싱가포르 영국 불란서 등 선진항만을 시찰하였고 국제항만협회(IAPH)에 참가하며 국제 감각과 안목을 넓혔다.

우리나라 근대항만의 태동은 1876년에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강화도조약에 의해 개항됨으로써 시작되었다. 1876년에 부산항, 1880년에 원산항, 1883년에 인천항이 차례로 개항되었다. 개항 이전의 부산포는 소나무와 동백나무가 우거진 백사장 주위에 고기잡이배 몇 척이 한가롭게 떠있는 포구였다. 부산 북항과 남항이 매축되어 근대적 항만의 면모가 나타나자 비로써 항만이란 개념이 인식되었다.

광복될 때까지 위 3개를 포함 11개가 개항되었다. 광복 후 분단으로 북한에는 원산‧진남포‧신의주‧웅기‧성진‧용암포 등 6개 개항이 있었고, 남한에는 부산‧인천‧군산‧목포‧마산 등 5개 개항이 있었다. 행방직후 혼란과 6󈽕전쟁을 겪으면서 항만을 건설할 여력이 없어 겨우 파손된 항만을 유지보수 하는데 급급했다.

5󈽌 혁명정부가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면서 잠자던 항만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1961년 12월 30일에 개항질서법이 정비되어 개항장이 11개로 늘어났다. 그리고 건설부가 항만개발을 촉진하고 관리를 하기위해 1967년 3월 30일에 항만법이 제정되고, 제1종지정항만 16개와 제2종지정항만 24개가 지정되었다. 1차와 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의해 수출입화물이 급증되었으나, 이를 처리할 항만시설이 따르지 못해 하역능력의 부족으로 경제개발에 큰 장애가 되었다. 건설부가 1972년부터 시작되는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수출 100억불을 대비해 획기적인 항만개발계획을 추지했다.

그러나 차관제공자인 세계개발은행(IBRD)이 항만의 건설과 운영을 일원화하라는 권고에 의해 1975년 12월 5일에 항만법을 개정하여 지정항만의 관장이 건설부에서 해운항만청으로 이관되었다. 이보다 앞서 1973년 5월 5일 대통령령에 의거 발족된 부산항만관리청이 부산항건설을 관장하게 되었다. 대신 건설부는 산업기지개발촉진법을 제정하여 공업항건설을 관장했다. 그 결과 공업항은 건설부가, 일반항은 해운항만청으로 건설주체가 2원화되었다.

해운항만청이 1976년 3월 13일에 발족되고서 정연세에게 행운이 또 찾아왔다. 초대청장 강창성이 그를 발탁하여 시설국장으로 발령했다. 정연세가 2차와 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서 우리나라 양대(兩大)항만인 부산항 1단계사업과 인천항 도크건설을 주도했던 것을 강창성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연세는 해운항만청으로 옮겨 국장, 차장, 청장을 역임하며 4차와 5차 항만개발계획을 역동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해무청, 태백국토건설국, 건설부, 그리고 해운항만청을 이어오며 우리나라 항만건설의 중심무대에서 열연을 하였던 주연배우이며 우리나라 현대항만역사의 산증인으로 우뚝 섰다.

그가 1984년 2월 해운항만청장으로 취임했을 때, 국제해운시장의 불황으로 한국선박들이 외국에서 압류당하고 해운회사의 부도가 속출했다. 그는 해운국장 최훈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해운산업합리화계획을 밀어붙였다. 불실한 선박회사를 퇴출시키며 과감하게 통폐합을 하여 한국해운이 기사회생했다.

해운합리화 과정에 에피소드가 있다. 현대상선은 컨테이너정기선 시장에 진입하려고 계획을 면밀하게 추진하고 있었다. 선진해운국에도 컨테이너선사가 한두 개밖에 없는데 우리나라에는 한진, 조양, 고려 3사나 있었다. 여기에다 현대상선에 컨테이너면허를 한다면 과다경쟁으로 중소회사는 소멸할 것이 확실했다. 그는 전두환 대통령 면전에서 해운실정을 설명하고 현대상선에 면허가 불가하다고 당차게 보고하고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고려해운은 근해(近海) 컨테이너면허만 유지하고 원양(遠洋) 컨테이너면허는 현대상선에 양도하되, 현대가 고려의 막대한 부채를 인수하는 방안이었다. 이렇게 교통정리를 해서 고려해운은 통폐합 급물살에서 살아남았고, 현대상선은 오늘날 세계굴지의 컨테이너선사로 성장했다.

정연세는 1979년 제11차 국제항만협회(IAPH) 총회부터 꾸준히 참가하여 집행위원으로 피선되었고 제15차 IAPH총회를 서울에 유치했다. 1987년 5월에 개최된 제15차 IAPH 서울총회는 80여개 국가로부터 1000여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국제회의였다. 정연세는 영예스럽게도 의장으로 총회를 주관했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서울총회가 최고였다고 많은 회원들 간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그는 IAPH부총재를 역임하였고, 2007년 4월 27일에 미국 휴스턴에서 개최된 제25차 IAPH총회까지도 명예회원으로 참가하며 IAPH에 대한 각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그는 해운항만청장을 퇴임하고서 한국항만협회장과 대한토목학회장을 역임했다. 대한토목학회장은 대학교수 등 학계에서 맡는 것이 관례임에도 관료출신이 맡은 것은 토목분야에서 그가 쌓아온 공적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한국선급협회(KR) 회장으로 선임되어 대덕단지에 건물을 신축하여 KR를 대전으로 이전했다. 그의 재임 중에 KR가 국제선급연합회(IACS)의 의장선급으로써 소임을 다했다. 

그는 해운항만청장을 퇴임하고서 해운항만청 퇴직자들의 친목단체인 사단법인 해항회 회장을 맡아 17년간 헌신했다. 그는 해항회를 단순한 친목단체로 머무르게 하지 않고 회원들의 건강과 복지 향상을 위한 단체로 격상시켰다. 그는 사재를 일부 출연하여『해항회장학회』를 마들어 어려운 형편에 있는 해운항만청 전‧현직 직원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그리고 상당한 자금을 투자하여『만남의 광장』이란 공간을 마련하였다. 사무국이 그곳에서 항시 활동하면서 회원들을 보살피고 있다. 노령회원과 병환으로 고생하는 회원들에게 위로금을 전달하여 그들에게 삶에 대한 의지와 보람을 안겨주고 있다.『만남의 광장』에서 회원들이 바둑으로 소일하거나, 노후의 삶을 서로 걱정하고 위로하며 은퇴공무원으로 품위를 지켜가고 있다.

1976년에 창설된 해운항만청이 꼭 20년 만에 폐지되었다. 그래서 많은 회원들이 해항회를 해운항만청의 연장선(延長線)에 있는 것으로 느끼고 있다. 청장이 모두 열세 분이었었는데 열두 분은 왔다가 제갈 길을 찾아간 과객이었다. 그러나 정연세는 대학에서부터 항만토목공학을 전공하여 사회첫발을 해무청 항만과에 내딛어 해운항만청장을 그만둘 때까지 34년을 항만과 영욕을 같이했다. 해운항만청을 그만둔 뒤에는 해항회를 정성껏 가꾸었다. 그래서 정연세를 ‘영원한 해운항만청장’이라고 부른다.

그는 해운항만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녹조근정훈장과 홍조근정훈장을 비롯하여 불란서정부로부터 프랑스 해기훈장을 비롯하여 다양한 상훈을 수상했다.

◇취재지원 : 창명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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