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논설위원 耕海 金鍾吉

▲ KSS해운 증권거래소 상장 기념식(2007. 10. 26). 장두찬 회장(오른쪽), 한국상장사협의회 서진석 부회장.
장두찬(張斗讚)은 1939년 9월 23일 경남 남해군 남해읍 남산동에서 장연석과 김양수 사이에 4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남해농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시골 농업학교에서 1주일이면 논밭에서 10시간 이상 농사실습을 해야 했다. 그런 환경에서 도시에 있는 명문고교 학생들과 겨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교 2학년 때 검정고시에 응시하면서 서울 명문대학에 진학하겠다고 밤잠을 자지 않고 공부했다.

방학 때 해군사관학교 생도인 고교선배를 만났다. 그 선배가 품위유지비까지 받으며 공짜로 공부할 수 있고 성적이 우수하면 미국유학도 할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을 받아 해사에 진학했다. 그는 50:1의 경쟁률을 뚫고 입학정원 100명 중 18등으로 합격했다. 공군사관학교도 합격했으나 해사를 선택했다. 장두찬은 1958년 2월 28일 해사에 입학하여 이상형의 해군장교로 인간개조를 하는 아카데미 교육을 받으며 피 끓는 청년기를 시작했다. 1학년 생도는 한 순간도 먼눈을 팔 수 없는 엄격한 규율과 정밀한 일과에 쫓겨 긴장의 연속이었다. 군인이 되기 위한 혹독한 훈련은 물론 4학년 침실청소도 했다.

그는 4학년이 되어 호위구축함 2척으로 구성된 훈련함대로 원양실습을 떠났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태평양에서 감격스럽게도 일부변경선을 넘어 하와이에 도착했다. 하와이 해변을 거닐며 부유하고 평화스러운 미국이 부러웠다. 진주만에서 위용을 자랑하는 태평양함대를 보며 빈약한 우리 해군함대를 되돌아보았다. 괌을 경유하여 진해에 귀항할 때까지 1개월 반 동안 우리해군의 국제적 좌표가 어딘가를 확인했다. 그리고 우리해군이 지향할 방향을 그려보았다.

그는 1962년 2월 28일 졸업과 동시 해군소위로 임관됐다. 그는 상륙함과 초계함 등에서 함상근무를 했다. 임관 2년 만에 중위로 진급한 직후 동기생 중에는 제일 먼저 도미유학을 하여 포술장교교육 16주 과정을 수료하는 등 해군장교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귀국 후에는 함대훈련단 교관을 거쳐 그 당시 우리나라에 한 척밖에 없는 구축함에 발령되는 등 촉망을 받으며 초급장교 시절을 보냈다. 그는 해사생도 때부터 시작하여 8년간 해군에서 복무하다가 그 후 8년간은 타 부처에 파견근무를 거쳐 1974년 3월 31일 소령으로 예편했다. 해군에서 8년, 파견부처에서 8년을 합해 16년을 해군으로 복무했다.

장두찬은 1974년 3월 31일에 전역하고 곧바로 KSS해운에 입사했다. 그는 파견부처에서 외자도입에 관련된 업무를 하면서 KSS해운 창업자 박종규와 인연을 맺었다. 박종규는 해운공사에서 선박도입업무를 하다가 해공을 그만두고 KSS해운의 전신인 코리아케미컬캐리어스를 설립했다. 1969년 말 조그마한 식당에서 열린 회사 창립발기인 모임에 장두찬이 우연히 참석하게 된 것이 KSS해운에 입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부산사무소장으로 발령되어 9개월 근무하면서 선원과 선박관리 등 현장경험을 쌓은 뒤 영업부장으로 본사에 올라왔다. 그가 영업부장으로 근무하였던 1975년부터 2년 반은 우리나라 석유화학공업의 급성장기간이었다. 선복을 확보하고 일본항로와 동남아항로에 케미컬선박을 투입했다. 그리고 유럽/아프리카 항로에는 냉동가스탱커를 취항시켰다.

그는 1977년 7월에 동경지점장으로 부임했다. 부임 직후에는 일본어를 몰라 힘들었지만 공부를 열심히 했다. 일본에서 되돌아본 한국은 중국과 국교가 없어 서쪽과 북쪽이 완전히 차단되어 섬나라보다 훨씬 열악한 해운환경임을 알았다. 하지만 미구에 한중국교수립의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중국의 잠재력을 파악하고서 우선 중고선 2척을 구입해서 일본/중국 항로에 석유화학제품을 수송하자고 본사에 건의했다. 그러나 자회사인 동해조선의 불실로 인해 투자여력이 없으니 알아서 하라는 회답이 왔다. 본사가 무책임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그에게 100% 권한과 책임을 맡긴다고 이해했다.

그는 모험을 했다. 개조비용을 포함 척당 30만불을 동경 현지에서 조달하여 2척을 인수했다. 스미토모그룹과 장기운송계약을 체결하고 한중수교 전인 1978년부터 일본/중국 항로에 취항시켰다. 1982년에 한중수교가 되고 현재까지 30년이 되도록 케미컬선대와 가스탱커선대의 주된 항로로 굳혔다.

1985년 해운산업합리화 때 KSS해운이 미원통상의 당밀전용선 4척과 일우해운의 냉동선 5척을 인수했다. 당밀전용선 4척은 무리가 없었으나, 냉동선은 은행부채가 280억원인데 선가는 50억원밖에 되지 않아 KSS해운이 곤경에 처했다. 그는 백방으로 노력하여 은행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무부리(無負利 : 이자를 부과하지 않음)거치 12년에, 13년의 균등상환조건을 이끌어내어 해운산업합리화의 위기를 극복했다. 아직도 그 은행부채가 일부 남아 있어 2010년에 상환이 끝나게 된다.

장두찬은 1995년 3월에 KSS해운사장으로 취임하여 창업자 박종규의 경영철학을 철저히 지켜왔다. 즉 첫째 손해를 보더라도 원칙을 지켜 뒷거래를 하지 않고 투명한 기업 활동을 하여 올바른 기업문화를 창출하고, 둘째 전문경영인 체제를 확립하여 사회공기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고, 셋째 종업원지주제 실천하여 종업원 모두가 주인이 되어 화해와 상생의 경영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킨 규제와 혼탁한 세상에서 경영철학을 실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이곳저곳의 감사와 조사를 받으며 헤쳐 나가자니 아찔한 순간순간이 많았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현재 13척의 선대와 신조발주가 2척이 있어 모두 15척이다. 취급하는 케미컬도 벤젠‧ 프로판‧ 암모니아‧ 에틸젠 등 100여종이나 되어 복잡 다단한 운송이다.

“해양수산부의 간부가 PSC검사를 하면서 KSS해운의 선박에 결함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라는 필자의 말에 장두찬은 “KR로부터 ISM Code에 의한 안전품질경영적합증서를 획득하여 안전품질 관리팀이 수시 확인을 하고, 육상근무 임직원들도 방선하여 선원들을 지도격려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고객에게 품질을 보증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선박안전관리가 최우선임을 선원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장두찬은 2003년 8월부터 2007년 1월까지 영예롭게도 외항해운업계의 수장인 한국선주협회장을 역임했다. 정부당국의 인허가에 의하여 외항해운업을 하던 때는 선주협회장이 상당한 매력이 있었고 자기 회사의 이권도 챙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율화된 지금은 봉사해야하는 자기희생의 자리였다. 이런저런 모임에, 각종 공식행사에 빠지면 해운업계가 불리하지 않을까 또는 괘씸죄에 걸리지 않을까 하여 부족한 시간을 쪼개어 참석해야할 자리에는 꼭 참석했다. 대통령 해외순방 때는 역할의 유무에 관계없이 자비로 수행해야하는 피곤한 직책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선주협회장 재임기간에 몇 가지 사업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첫째, 많은 선박펀드가 만들어지고 활성화 되었다. 회원선사들이 펀드를 활용하여 선복확충에 나서 우리해운이 급속하게 성장되었다. 둘째, 한국P&I가 토대를 구축했다. Match Fund형태로 정부로부터 2005년부터 2011년까지 매년 10억원씩 70억원의 보조를 이끌어냈다. 이에 맞추어 회장단 선사들이 하룻밤 사이에 33억 원을 출연했다. 현재까지 정부보조와 출자‧출연을 합해 KP&I에 유입된 총 자금이 110억에 이르고 있다.

셋째, 외국선사에게만 지원되었던 수출입은행의 선박건조자금을 국내선사에게도 활용할 수 있게 했다. 넷째, 세법을 개정하여 톤세제도를 도입했다. 외항해운기업의 소득에 대한 법인세를 면제하는 대신 선박의 크기에 따라 순톤수 10톤 당 4~14원의 톤세만을 부과토록 하여 외항업계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를 위해 해운기업의 회계담당자들이 선주협회에 차출되어 1년간 밤낮없이 자료를 정리하여 당위성을 문서로 입증했다. 이 입증된 문서로 해양수산부의 관계관과 해운업계가 공동으로 세정당국과 국회를 설득했다. 여기엔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한 노무현 대통령이 해운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세정당국이 톤세제도를 5년 시한의 일몰제라고 하며 폐지 움직임이 있어 해운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필자가 한국해운의 전망을 묻자 장두찬은 “전망에 앞서 현재 철저한 기업가 정신으로 해운기업을 경영해 달라고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후죽순처럼 해운기업이 난립하고 있어요. 현재는 해운경기가 호황이니까 문제가 없는 듯 보이지만 항상 호황일 수는 없습니다. 미래를 대비 통폐합을 한다든가 정적규모로 조정 등 지금부터 체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취재지원 : 창명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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