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논설위원 耕海 金鍾吉

▲ 솔베이지 송을 작곡한 노르웨이의 작곡가 Grieg의 생가가 있는 Bergen에서 김성응 부부. 뒤의 세계최대호화 여객선 Queen Mary 2호(15만톤G/T. 탑재인원 3,056명)로 칠순 여행중.
김성응(金星應)은 1934년 3월 18일 충남 천안시 병천면에서 김상훈과 권처순 사이에 3남 6여 중 여섯째로 태어나 유복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2년에 해양대학 항해과 8기로 입학했다. 주위에서 해양대학 진학을 뜻밖이라고 말하며 외국에 대한 동경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들 짐작했다. 노르웨이 문호 Ibsen의 희곡<페르 귄트> 부수음악으로 Grieg가 <솔베이지 송>을 작곡했다. 솔베이가 방랑의 길을 떠난 페르가 돌아오기를 목마르게 기다리며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는 감미로운 음악<솔베이지 송>을 김성응이 즐기는 것을 보면, 젊은 날부터 낭만과 모험과 그리고 방랑의 품성(稟性)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김성응은 1956년에 해양대학을 졸업하고 1년간 영어교사를 하다가 해운공사에 입사했다. 미주항로에 3년간 승선하다가 육상으로 옮겨 본사에서 선박자재와 해상보험 업무를 하면서 대학 야간부 3학년에 편입해 경제학을 전공했다. 외국유학이 별 따기보다 힘들 때 그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영국정부의 Colombo Plan 장학금으로 영국에 가게 되었다. 주한영국대사관에서 인터뷰를 거쳐 서울대학 Language School에서 영어교육과정을 마치고 1966년 1월 영국으로 떠났다.
 
그는 Institute of Insurance에서 보험을, Polytechnics of London에서 해운법을 공부했다. 보험회사와 P&I Club에서 보험실무를 했고 외국학생들과 어울려 여행을 하며 영국을 이해했고 국제 감각을 익혔다. 영국연수 1년은 그가 해운인생을 살아가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그에게 또 행운이 찾아왔다. 해운공사 런던주재원으로 근무하던 김희석이 본사 영업상무로 발령되어 김성응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가 런던주재원으로 근무하면서 굵직굵직한 일들을 해냈다. 첫째, 미주항로에 취항했던 Korean Challenger호 등 선박들을 영국에서 인수하는 실무를 현지에서 깔끔하게 처리했다. 한국정부로부터 채무지불보증을 받고 영국정부의 투자보증기관인 ECGD을 통한 차관으로 선박들을 도입했다.

둘째, 김성응은 선복을 확보하기 위해 ECGD의 투자보증을 확인하고서 Baring Bros.은행과 접촉하며 영국과 독일 조선소를 찾아다녔다. 벨기에의 유태계 Geoffrey은행이 김성응의 이런 활동을 알아차리고서, 서울의 브로커로 하여금 한국정부를 움직여 해운공사의 신조발주를 대행하려고 김성응을 모함했다. 해운공사는 김성응이 이권에 개입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오해했다. 이맹기 해운공사 사장이 신조선 발주를 위해 영국을 방문하여 전후 사정을 파악하고서야 김성응에 대한 오해가 풀렸다. 그리고 이맹기는 브로커를 통하지 않고도 신조선 건조가 가능함을 알고 귀국했다. Geoffrey는 해운공사와의 거래가 실패로 돌아가자 막대한 로비자금과 비용만 날리고 한국에서 손을 뗐다.

셋째, 그는 1969년부터 유럽정기항로 개설계획에 착수했다. 2백년 전통을 가진 유럽의 해운동맹들 중에, FEFC(Far Eastern Freight Conference:극동운임동맹)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이어서 국가배경과 수송물량을 까다롭게 검토하여 동맹에 가입시켰다. 당시 한국/유럽 항로에는 물량이 소량이었지만 김성응은 5년 앞을 내다보고 최경록 주영한국대사의 지원을 받아 Ben Line, Blue Funnel, Hapag Lloyd 등 유력 선사사장, 그리고 FEFC사무국장 등과 교섭했다. 해운공사의 FEFC가입이 원칙적으로 합의되었으나 세계적인 운송형태가 컨테이너화 되면서 시행이 유보되고 있다가 상당한 기간이 지나서야 컨테이너정기항로가 개설되었다.

넷째, 최경록 대사 재임 중에 그가 재영 한인회장을 맡아 한국인과 영국인과의 친목을 위해 열정적인 활동을 했다. 친목회에 많은 교포와 親韓영국인들이 참가했고, 특히 유학생들은 오랜만에 한국음식을 즐기며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기도 했다.

다섯째, 런던성공회에 Korea House가 있었다. 6.25한국전쟁 때 한국에 대한 구호사업을 하던 성공회 건물인데 한인회는 이 건물을 무상으로 사용했다. 그곳에 한인 어린이학교를 개설하여 교포와 상사주재원과 대사관직원의 자녀들을 토요일마다 모아놓고 김성응이 한인회회장 겸 교장으로 우리 말과 글, 그리고 노래를 가르쳤다. 그 공로로 1972년 광복절을 기하여 김성응은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상했다.

그는 해운공사 주재원으로 8년간 정열적으로 일하다가 1974년 7월에 귀국했다. 범양상선 영업이사로 자리를 옮겨 근무하던 중 FEFC부회장이 그를 만나려고 서울에 와서 FEFC한국대표직을 제의했다. 런던에서 해운공사의 동맹가입을 추진할 때 자주만나면서 신뢰를 쌓았던 관계라서 곧바로 영국 FEFC본부를 방문하고 1976년 5월에 대표로 취임했다. 그때 극동지역의 6개 사무소 대표들이 모두 유럽인이었는데 김성응만은 동양인이었던 것을 보면, 동맹이 그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였다고 하겠다.

김성응이 대표로 취임하기 전에는 한국의 FEFC업무는 동맹회원사의 일본 주재원들이 Korea Sub-Committee를 만들어놓고 서울을 드나들며 대리점과 협의했다. 주재원들은 Korea Sub-Committee를 주관하며 직접 관리하려고 김성응의 대표취임을 반대했다. 김성응이 취임하고서 만들어진 서울 월례회의에서 그들과 충돌이 있어 동경 Sub-Committee회장이 본사로 소환되었다.

김성응은 “컨테이너수송 초기에는 대량화물 FCL보다 소량화물 LCL이 많았어요. 20피트 컨테이너에 LCL은 31톤까지 적재가 가능하지만 최소 21.5톤까지는 허용해 주었지요. 이런 맹점을 이용하여 일부 대리점들이 30톤을 적재하고도 21.5톤으로 기재하고서 운임차액을 부당하게 취했어요. 선사들이 도착항의 CFS에서 재검량을 한 결과 그 운임차이가 10~15%에 달하자 검량회사 협성해운으로 불꽃이 튀여 협성이 불신임을 당했지요. 조사를 하였던 바 협성이 정확하게 검량을 해서 검량보고서도 정확하게 작성하여 대리점에 보낸 사실이 확인되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어요. 부당운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리점에 Cargo Manifest와 B/L사본을 의무적으로 제출토록 지시하고, 검량회사로부터 검량보고서를 받도록 제도화하자 그런 악습이 일소되었지요”라고 그 때 그가 취한 조치들을 옛날이야기처럼 말했다.

그리고 이어 “일부 대리점들이 하주로부터 수납한 운임을 장기간 송금하지 않고는 한국은행에서 외환사정이 좋지 않아서 지체되었다고 핑계됐어요. 한국은행 실무자에게 확인해 보니 해운운임은 즉시 승인해준다고 했어요. 당시 시중사채금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 몇 주일만 늦게 송금하고 사채시장에 돌리면 대리점이 부당이득을 취할 수 있었지요. 그래서 FEFC를 통해 선사들에게 이 사실이 통보되자 장기간 송금을 지체하든 대리점들이 혼쭐이 났어요. 대리점들은 우리나라 외환사정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애국하는 일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저를 매국노라고 매도했어요.”라고 웃으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영국생활 8년의 습성이 몸에 배여 정직하게 업무를 처리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문제가 생기면 FEFC가 “S. E. Kim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김성응은 호주항로해운동맹 ANZESC의 한국대표도 겸직했다. UNCTAD Code 40:40:20을 해운항만청이 직접 동맹과 협상을 해서 우리가 40%를 쟁취했다. 김성응이 회의에 참석해서 법률용어가 많이 들어간 난해한 양해각서를 즉석에서 영문으로 작성했다. 회의가 끝나고 곧 이어진 만찬석상에서 양해각서가 한 자도 고치지 않고 원안대로 서명되었다. 동맹회장과 일본 호주 선사대표들이 김성응의 실력에 감탄했다.

그는 1994년 6월 30일 FEFC 18년 근무를 마감했다. 그동안 컨테이너정기항로에 강력한 비동맹선사가 출현하여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해운동맹의 통제에서 벗어난 비동맹선사와의 경쟁이 격심해졌다. 비동맹선사 Evergreen의 도전에 대해 동맹사무국이 너무 유화적이고 타협적이라고 동맹선사들이 비난을 했다. 그러나 하주들은 운임이 싼 비동맹선박을 선택하는 시대적 변화에는 어쩔 수 없었다. 우리나라의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이 비동맹으로 취항하게 되었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조양상선도 동맹에서 탈퇴했다.

필자가 “선배님! 젊은 날에 해운발전을 위해 치열하게 활동하셨으니 이제는 여유롭게 노후를 보내시지요.”라고 말하자 김성응은 “그러려고 미국 영주권을 얻어 남가자주 Irvine시 남쪽 Laguna Woods Village에 조그마한 빌라를 마련했어요. 주위 골프장에서 단돈 8불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담소를 하며 골프를 즐길 수 있어요. 그러다가 해마다 한국에 돌아와 6개월을 지내며 보고픈 친지들을 마나고…. 딸 다섯이 모두 외국교육을 받아 영국, 미국, 불란서, 홍콩에 살고 하나만 서울에 살아요. 이렇게 딸들이 흩어져 살아서 귀여운 외손자 외손녀들을 1년에 단 한 번이라도 보려면 한가할 수가 없군요”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행복을 볼 수 있었다.

◇취재지원 : 창명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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