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논설위원 耕海 金鍾吉

▲ Washington D.C에서 해무관 재임중의 김성수(좌)와 필자. 미국 제3대 대통령이며 독립선언문을 초안한 제퍼슨 기념관에서(1992. 5. 8).
김성수(金成洙)는 1947년 6월 27일 서울 용산구 삼각지에서 김시영과 박풍성 사이에 4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서울에서 초등학교 5학년까지 다니다가 부모를 따라 강원도 고성군 간성으로 이사했다. 어려운 가정형편에서, 휴전선과 맞닿는 오지에서 고성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9년에 고려대학 신문방송과에 입학한 것은 그의 자질이 출중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 대학 4학년 때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1976년에 묵호지방해운항만청 항무과장으로 공무원의 첫발을 내딛었다. 그는 처음에는 대학전공과 관련이 있는 문화공보부에 발령되지 않아 아쉬워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지정학적으로 보아 해운항만행정이 필요불가결함을 인식하고서는 다른 부처에서 전출요청이 있었는데도 사양했다.

김성수는 묵호에서 6개월 근무하고서 해운항만청 선원계장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첫 과업이 부산선원학교 설립이었다. 원래 민간차원에서 아태지역 선원훈련센터를 설립코자 하였으나 지지부진하자, 강창성 초대 해운항만청이 이를 대신하여 보통선원 양성기관을 설립하라고 지시했다. 선원훈련센터를 추진하려던 민간인들이 민사소송을 제기하여 김성수는 법정에 나가 소송을 수행한 후에야 선원학교 설립을 추진해야만했다. 그는 문교부를 드나들며 국립학교 설치령을 개정하여 각종학교(各鐘學校) 1년의 선원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개교를 위해 교사신축 예산확보를 위해 경제기획원과 예산투쟁을 했고, 교원확보를 위해 문교부와 총무처의 실무진과 힘든 줄다리기를 했다. 실무자들의 까탈에 수 없이 자존심이 상했으나 감내하고 1978년 3월에 부산선원학교를 개교하게 되었다. 인천선원학교는 그 다음 해에 문을 열었다. 새내기 공무원이 일구어낸  대단한 업적이었다. 선원학교는 후에 3년제로 승격되었다가 현재는 해사고등학교로 문패를 바꾸어 달았다.

김성수는 신설된 선원노정과에 첫 노정계장으로 발령되었다. 당시 원양어선의 민원이 빗발쳐 사회문제가 되자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지시를 내렸다. 그는 조업성과를 선·기장 절대 우위로 배분하던 비율을 보통선원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조정했다. 그리고 일정금액을 매월 지급토록 하는 부분월급제를 실시하였고, 동시에 2년 이상 가족과 헤어져 조업하는 원양선원의 애로를 다소나마 해소하기 위해 고용계약을 단축시켰다.

그는 1978년 9월 주싱가포르 한국대사관 해무관으로 발령되었다. 당시 싱가포르는 중계무역항으로 급성장하였고, 해운업에 종사하는 교민이 2백여 명에 이르고 이었다. 게다가 월남전 패망 후에 많은 동포들이 귀국하지 않고 싱가포르로 모여들었다. 싱가포르가 한국과 북한과의 동시수교를 하는 예민한 상황이라 해사업무 겸 영사업무를 동시에 처리하는 해무관 직제를 신설했다. 월남에서 온 대부분의 교포들이 특별한 기술이나 자격증이 없었다. 그는 이들이 해기사 면허장을 취득한다면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한국해기사협회에 강사 파견을 요청해 항해과 이진풍(후에 해기사협회장)과 기관과 이헌탁(당시 해기사협회 상무)이 싱가포르에서 1개월간 교육을 실시한 후에 현지에서 해기사국가시험이 실시되었다. 그가 예상한 대로 월남피난교포들이 해기사면허를 취득하여 일자리를 얻어 생활이 안정되었다.

그는 귀국하여 해운국 진흥과에 근무하다가 1984년 5월 서기관으로 승진하고서 영국 웨일즈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세계를 제패한 영국이 4백년간 세계해운을 주도했다. 이러한 영국에서 해운경제학 석사과정을 이수하며 세계해운에 대한 이론적 체계를 세우게 되어 그에게는 행운이었다. 그는 귀국 후 진흥과장과 외항과장을 맡아 영국에서 배운 이론에 근거하여 해운대외적 협력과 정기선해운 정책을 수립했고, 해운산업합리화도 무리 없이 마무리했다.

김성수는 1989년에 주미대사관 해무관으로 발령되어 다시 해외로 나갔다. 그는 세계 최강의 미국과 해운협력을 함으로써 우리해운을 한 단계 도약시킬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 미연방해사위원회(FMC)의 강력한 정기선에 대한 감독과 규제가 당시 한/미간의 현안이었다. 그는 FMC의 실무진과 접촉해가며 이미 진출한 한국 정기선사들을 보호하고, 해운개방 압력에 대응하는데 열중했다.

긴박한 문제가 터졌다. 현홍주 주미대사가 그에게 LORAN-C(중·장거리 선박무선항법장치)문제를 해결하라는 특별지시를 했다. 당초 미제5공군과 제7공군이 휴전선 부근의 항공작전을 위해 LORAN-C를 대외비로 설치 운영했다. 이것을 미국 Coast Guard가 인수하여 북태평양의 선박무선항법 서비스를 하고 있었는데 미국의 재정악화로 인해 이를 폐쇄하는 방침이 확정되었다. 일본어선이 LORAN-C를 이용하고 있었고 한국어선도 4700척에 수신기를 설치하여 이를 이용했다. 당장 LORAN-C를 폐쇄한다면 고가의 수신기가 하루아침에 고물이 될 뿐더러 어선들이 갑자기 장님이 되는 심각한 상항이었다. 김성수는 미국 Coast Guard와 해군성과 그리고 국무부를 수차례 드나들며 코 크고 자존심 강한 미국인들을 설득했다. 한국의 수많은 선원과 어민들의 안전과 생계에 큰 위협이 됨을 호소하여 마침내 연장동의를 얻어내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김성수는 국방대학원을 거쳐 1995년에 해운항만청 안전관리관으로 부임했다. 그의 경력으로 보아 해운국장으로 발령되어야 함에도 전연 다른 방향으로 발령되어 인사의 난맥상을 드러냈다. 그는 안전관리관으로 재임하며 일생일대의 고난을 겪어야만 했다. 사상 초유의 최대 원유유출사건인 시프린스호 사고가 1995년 7월 23일에 발생했고, 이어 9월 22일에 제1유일호 사고가 발생했다. 연달아 그해 11월 17일에는 호남사파이호 사고가 발생했다. 대량유류 유출로 인해 남해안에 어패류가 집단 폐사됐고 해양생태계가 파괴되어 남해안 어장이 회복불능의 중병을 앓았다. 더욱이 맹독성 적조까지 겹쳐 어민들을 절망과 분노로 몰아넣었다.

그는 사고수습을 위해 현장점검을 했고 피해보상대책회의를 주재했다. 그리고 재발방지대책을 수립하는 등 공휴일에도 밤낮없는 강행군이 계속되었다. 연안유조선의 전용항로를 설정했고 정유회사로 하여금 유조선 안전관리전문회사를 설립토록 하여 유조선의 기름 양하와 적하에 대한 안전관리 모니터링 등 대책을 수립했다. 그는 극한적인 고통을 겪었던 경험에서 유류오염사고가 수산자원의 폐해와 해양환경의 파괴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깨달았다. 그리고 사고예방을 위한 해상안전관리가 얼마나 중요한가도 뼈저리게 체험했다. 김성수는 그때 고통을 함께 나누었던 동료들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 후 그는 울산해운항만청장으로 발령되어 우리나라 유류산업 최대항만인 울산항을 관리했다. 시프린스호 사건 등 쓰라린 경험을 살려 유사한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다가 1996년 8월에 해양수산부가 발족되어 해양심의관으로 발령되었다. 21세기 해양수산비전수립 기획단장을 맡아 해양수산 장기계획수립을 이끌었다. 그는 국립해양조사원장과 인천해운항만청장을 거쳐 1급으로 승진하여 차관보와 기획관리실장을 역임하며 해운항만행정 요직을 두루 경험하고 2001년 8월 공무원 생활 24년을 마감했다.

김성수가 공무원을 아쉽게 마감한 것은 부인의 건강 때문이었다. 가난한 공무원 남편의 뒷바라지를 위해 오랫동안 부업을 하면서 건강이 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시간적으로 정신적으로 여유가 있는 민간부분에서 일하면서 부인의 희생적인 내조에 대해 보상하겠다는 마음으로 옷을 벗었다.

그는 2001년 8월에 한국해운조합 이사장으로 부임했고 해운조합은 이듬해부터 매년 20%이상 성장하며 흑자경영을 시현했다. 그의 재임기간 6년 동안 해양수산부 산하 공공기간 경영실적평가에서 5년 연속 최우수기관으로 선정되었다. 해운조합 공제사업이 민간보험회사와 경쟁하면서도 그의 취임 당시보다 2배 이상 신장되었다. 여객의 수요창출을 위해 지하철 등을 이용하여 과감한 홍보를 펼쳤다. 그 결과 2003년부터 5년 연속 해상관광 1000만명을 초과 달성하여 여객선사업자와 해운조합이 모두 Win-Win했다.

필자가 "여객선사업자와 조합직원들이 이사장직을 계속 맡아달라고 간청했다면서요?"라고 묻자 "조합 대의원들이 정관을 바꿀 터이니 연임해 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붙잡을 때 떠나는 것이 아름답고…. 그리고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신조로 살아왔기에 또 한번의 인생 고비를 넘기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보려고 합니다"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진지함과 당당함을 엿볼 수 있었다. 김성수는 국가에 공헌한 공로가 인정되어 대통령표창과 황조근정훈장을 수상했다.

◇취재지원 : 창명해운㈜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