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논설위원 耕海 金鍾吉

▲ 1976년 여름, 해사문제연구소 윤상송 이사장(가운데)이 해운업계 전문가들과 특별좌담회를 개최하고 있다. 해양한국 이원철 편집장(왼쪽)이 좌담회 내용을 필기하고 있다.
이원철(李源哲)은 1941년 3월 20일 서울 영등포구 도림동에서 이학현과 구갑술 사이에 4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선친이 일정시대 철도공무원이었기 때문에 부유하지는 못했지만 그런 대로 단란한 가정에서 자랐다.

6·25전쟁은 민족적 참상이었지만 이원철에게는 더 이상 처참할 수 없었다. 그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고난이 시작되었지요. 인민군이 점령하고서 9월 28일 수복 때까지 서울에서 거의 굶다시피 지냈습니다. 1·4 후퇴 때는 식구들이 화물열차를 타고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영등포를 떠나 구포역에 도착할 때까지의 17일간은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지요. 얼마쯤 가다가 열차가 멈추면 도무지 떠나질 않아요. 밥을 해 먹으려고 내리면 기차가 움직여 온 식구가 솥단지와 밥그릇을 들고 기차에 뛰어올라야 했습니다"라고 소설 같은 이야기를 했다.

이원철의 가족은 김해에서 귀인을 만났다. 김해수리조합장 내외가 그들을 한 달 동안 손님으로 대접해주었다. 살벌한 전쟁 중에서도 아름다운 인정의 꽃은 피어 있었다. 마냥 대접을 받고만 있을 수 없어 옷가지를 팔아 연명하다가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렸다. 아버지는 김해시장 모퉁이에서 오징어튀김을 만들어 팔았고 이원철은 신문팔이, 껌팔이, 아이스크림 팔이 등 먹고살기 위해 무엇이던지 했다. 이렇게 1년 반을 버티다가 휴전협정 전에 서울로 돌아와 영등포초등학교 6학년에 복학했다.

그는 전쟁 중에 공부와 담을 쌓았는데도 1953년에 치러진 국가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서울중학교에 입학했다. 천재로 인정받던 그가 서울중학교에서 둔재가 되었다. 전차로 영등포에서 노량진까지 가서, 폭파된 한강 인도교가 복구되지 않아 미군 트럭을 타고서 한강을 부교로 건넜다. 트럭을 타려는 사람들의 장사진은 한 두 시간을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학교에 도착하면 오전수업이 끝날 무렵이라 처음으로 배우는 영어는 맹탕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서울중학교를 그만두고 영등포에 있는 성남중학교로 전학했다. 성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소설을 쓰려고 했으나 형님의 강권에 못 이겨 중앙대학 약학과에 지원했다. 15:1의 경쟁률을 뚫고 4등으로 합격하는 괴력을 보였다.

졸업하고 약국을 개업했다. 목이 좋지 않은 곳이라 장사가 되지 않아 약국을 걷어치웠다. 제약회사에 취직도 되지 않아 낭인처럼 방적회사의 잡역부, 전매청 벙커C탱크 공사감독 등으로 전전했다.

『교육연구』의 편집부장으로 취직했다가『현대해양』과『코리아쉬핑가제트』를 거쳐 1973년 8월 해사문제연구소의『해양한국』편집장이 되었다. 이원철이 구절양장(九折羊腸)의 험한 길을 걸어온 끝자락에 『해양한국』발행인 윤상송(尹常松)이란 거목이 있었다. 그 거목의 넓은 그늘이 이원철을 끝까지 품어주었다. 윤상송은 1916년 8월 15일 한반도의 최북단 함경도 회령에서 태어나 두만강에서 물을 길어다 먹으며 국경지대에서 자랐다. 그는 고려조의 명신(名臣)이며 명장(名將)인 윤관(尹瓘)의 후손임을 항상 자랑했다. 그가 세상을 올곧게 살아온 것은 조상에 대한 긍지가 정신적 지주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윤상송은 경성고보를 졸업하고 동경고등상선학교 기관과에 입학했다. 일본인들 틈바구니에서 홀로 5년 6개월을 버티어 1940년 12월에 졸업했다. 재학 중에 동경상선과 신호상선 두 학교가 기량을 겨루는 축제행사가 매년 개최되었다. 종목이 유도와 사교춤이었는데 윤상송이 두 종목에 모두 출전하여 신호상선을 제압했다. 축제가 끝나고 술판이 벌어지면 주량으로도 일본인을 압도하는 호탕함을 보였다. 그리고 횡포를 부리는 일본헌병을 때려 눕히는 반골기질도 있었다.

그는 졸업하고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조선우선에 승선하다가 전시총동원령에 의하여 설립된 조선선박통제회사 원산지점에 근무하고 있을 때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에 일본인으로부터 인수한 조선우선에서 선박부장과 부산지점장으로 근무했다. 1950년 1월 대한해운공사가 설립되고서 선박담당 상무를 역임했다. 4·19혁명 직후 해양대학 학장 신성모가 별세하자, 그 뒤를 이어 9대 학장으로 취임하여 윤보선 대통령을 모시고 연습선 반도호 취항식을  거행했다. 그 후 선주협회 이사장으로 근무하다가 1971년 2월에 사임했다.

윤상송은 해운광복세대로서 다양한 직책을 맡아 황무지였던 우리해운을 개간했다. 때문에 한국해운에 대한 애정과 애착이 남달랐다. 그는 미국 ICA(국제협력처)계획으로 6개월간 미국의 해운행정과 해운경영을 시찰하면서 한국해운발전을 위해 체계적 연구가 필요함을 절감했다. 이를 위해 해운연구소 설립을 서둘렀다. 해운계가 연구소 설립의 당위성에는 공감했으나 자본금 마련이 난제였다. 그는 자택에다 사무소를 차려놓고 자신을 포함 김재근, 박건석, 박종성, 이맹기, 이준수, 박현규 7인이 1971년 3월 1일 재단법인 한국해사문제연구소 발기총회를 개최했다. 주무관청인 교통부 장관의 설립인가와 법원등기를 마치고서 1971년 4월 1일 해사문제연구소가 출범했다.

연구소가 발족되었으나 독자적인 연구를 할 만한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운업계가 연구용역을 발주할 형편도 아니었다. 윤상송은 연구소가 지속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정기간행물을 발간하여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문화공보부에 『해양한국』발간등록을 하고서 1973년 9월 1일 창간호(10월호)를 발간했다. 해사문제연구소와 『해양한국』발간이 유지된 데는 천경해운 김윤석 사장의 뒷바라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윤석이 1971년 북창동 천경 서울사무소로부터 시작하여 천경 본사를 서울로 옮긴 백남빌딩을 거쳐 1976년 현재의 사옥을 매입한 후에도 사무실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김윤석은 공사를 불문하고 유상송을 끝까지 돌봤다.

이원철은 창간호부터 참여해서 2004년까지 『해양한국』의 편집장으로 31년의 오랜 인생을 살았다. 급여수준이 형편없었고 전망도 없었다. 그렇다고 소신을 갖고 편집을 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편집장을 떠나지 못한 이유는 그의 취향 때문이라기보다는 윤상송이란 거목을 곁에서 모실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윤상송은 1982년 8월에 한국해운학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한동호, 박은희, 이준수, 박현규, 배병태, 이균성 등 학계와 업계의 쟁쟁한 발기인명단 말미에 이원철 이름이 끼어있었다. 이원철이 일약 한국해운학회의 일원으로 우뚝 섰다. 이는 윤상송이 이원철에 대한 애정과 신뢰였다.

윤상송은 이원철이 술에 대취하여 다음날 지각하는 경우가 많아도 꾸짖지 않았다. 연말이면 이원철을 불러놓고 이것저것 칭찬을 하고서는 지각이 너무 잦다고 조용하고 자애롭게 지적했다. 윤상송이 해양대학에 출강을 하면서 매년 논문을 제출하는데 이원철에게 자료 수집을 부탁했다. 그리고 외부에서 원고청탁을 받으면 이원철에게 집필을 시켰다. 그러다가 이만하면 손색이 없다고 판단했음인지 이원철 이름으로 논문을 제출토록 했다.

세계경제의 불황으로 우리해운이 회복불능의 위기에 몰렸다. 정부가 해운산업을 기사회생시키기 위해 통폐합을 하던 1984년 2월 윤상송이 '해운산업합리화심의위원회'위원장으로 위촉되었다. 이것이 윤상송의 한국해운에 대한 마지막 봉사였다. 정부, 금융, 해운 실무진으로 구선된 '해운불황대책반'과 해운항만청이 위원장을 보좌했지만 이원철은 측근에서 윤상송을 지극 정성으로 도와 분신 역할을 했다.

1978년 해운항만청으로부터 『한국해운항만발전40년사』용역을 수주했다. 이는 해사문제연구소 창립이래 최대용역인데도 윤상송은 집필 책임을 이원철에게 맡겼다. 이때부터 이원철은 『해양한국』편집업무에서 손을 떼고 연구업무에만 전념했다. 이처럼 이원철에게 각별한 배려를 아끼지 않던 윤상송이 병환으로 1985년 8월 연구소를 떠나야만했다. 해사문제연구소는 윤상송에게는 생계수단이 아니었고 그의 보람이고 인생 전부였다.

해사문제연구소를 이어받은 박현규가 특유의 사교와 활동으로 연구용역을 꾸준히 수주하여 이원철은 연구업무가 더욱 활발해졌다. 한국선박대리점협회가 발주한 1995년 『국제해운대리점업발전사』와 한국항만하역협회의 1997년 『한국항만하역협회20년사』를 실무책임자로 집필했다. 그리고 해운항만청에서 발주한 1997년 『한국해운항만사』, 1998년 『부산컨테이너부두운영공사20년사』, 2000년 『한국컨테이너공단10년사』를 집필했다. 또한 한국해사재단이 발주한 2001년 『잃어버린 항적』과 2002년 『해운· 물류 큰 사전』, 마지막으로 2004년 『우리 선원의 역사』를 실무책임자로 집필했다.

필자가 "수많은 연구용역을 집필하면서 한국해운의 근현대사를 속속들이 섭렵하셨지요?"라고 묻자 이원철은 "윤상송 이사장님께서 모퉁이에 버려진 돌멩이 같은 저를 주춧돌로 만들어 주셨습니다"라며 성경의 한 구절을 인용해 답했다.

◇취재지원 : 창명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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